“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일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6-17)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되는 복음이라 하는 내용에는 처음에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사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과 또 부활하사 하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교회를 완성시키기 위하여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고 계시며 그의 메시아직과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를 완전케 하시고 완성시키는 이 모든 일이 다 들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오늘 16절과 17절에 이르면 이 복음의 내용에 핵심 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승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더 크고 원대한 스케일이 있음을 설명하는 내용과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16절에 있는 바와 같이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출발은 주님의 오심과 예수님의 승천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과 우리를 위하여 살아나셔서 지금 우리 편을 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크고 더 거대한 시각을 가지고 보자면 바로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란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얻은 바 구원과 구원에 관한 소식인 복음을 이야기할 때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지혜라는 차원에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이 복음을 따져야 되는 이유는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와 결부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언제나 흔들리고 믿음이 연약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얻은 바 구원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시고 우리를 향하여 어떤 뜻과 계획을 갖고 계신가? 어떤 능력을 행사하고 계신가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단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16절에 있는 말씀에서 오늘 우리가 생각하고 분명히 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왜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하는가? 그리고 복음은 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냥 ‘능력’이라고 하지 않고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대표적으로 살펴볼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표현된 복음의 핵심 되는 것과 그것이 믿음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선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가장 먼저 배제해야 되는 것, 우리 신자들이 절대 틀려서는 안 되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원칙, 핵심, 근본되는 원리는 휴머니즘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휴머니즘이라는 것은 이 로마서를 하면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경은 복음을 설명할 때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되는가를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할 때 산상설교는 아닙니다. 산상설교의 내용은 대단히 고귀한 것입니다.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을 대라. 속옷을 달래면 겉옷까지 주어라.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도 가라.’ 굉장히 중요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복음은 아닙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그것과도 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산상설교를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으로 내세우는 것은 복음의 ‘ㅂ’자도 모르는 소치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인간이 마땅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책은 아닙니다. 이것 때문에 이런 오해가 실제로 우리 주변에 많이 나타납니다.
여러분은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으실 것입니다. “저 따위 것이 무슨 예수를 믿는다고 그래.” 그러나 그 반대되는 말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저 사람은 예수를 안 믿지만 천당이 있다면 바로 저런 사람이 가야 돼.” 이것은 기독교 신앙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이야기들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의 자녀로 부름을 받는 것이지 착하냐 안 착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구원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느냐를 설명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복음은 아닙니다. 바로 이 생각이 인간이 갖는 본능적인 생각입니다. 요즘엔 이 생각과 기독교 신앙이 적당히 절충된 이상한 짬뽕이 하나 생겼습니다. 어떻게 짬뽕을 했느냐 하면 “우리가 우리 스스로 구원에 이룰 수 없게 된 것을 하나님께서 안타깝게 생각하셔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우리 죄를 위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 죄를 다 없이 하셨습니다. 구원의 문이 열렸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무슨 헌금을 많이 하라는 것도 아니고 착한 일을 하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다고만 하면 공짜로 값없이 구원을 얻게 됩니다”로 섞어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어떻게 짜집기 해 놓았습니다. “예전에 우리가 율법을 지켜야 했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간음을 하지 않고 살인을 하지 않고 안식일을 지켜야 했고 그리고 주님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마음으로마저도 율법에 저촉되는 것을 한다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을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여 우리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드디어 구원의 문이 마음껏 넓어졌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없고 믿고 오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도 못합니까? 이렇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이것까지도 아닙니다. 복음은 이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복음은 우리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제시하거나 설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의 방법이란 말입니다. 복음 자체가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고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것은 쇼윈도에 값없이 제시된 어떤 진열된 상품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값없이 공짜로 주워 가라가 아닙니다.
오늘 그 문제에 대한 성경의 전체적인 증거들을 제시하겠습니다. 예수를 믿고 있으면 그것이 여러분이 선택이든 무슨 결단이든 아무래도 좋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다면 여러분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정리했느냐는 문제는 여러분이 얻은 구원과 여러분이 가진 신앙이 커지고 깊어지는 데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합니다. 신앙의 가장 큰 걸림돌은 무어냐 하면 하나님이 구원을 제시하셨고 우리에게 공짜로 주신 것을 내가 선택했다고 믿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계서 하신 일이 99.9%고 내가 한 일이 0.1%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내가 맡은 0.1%도 완수하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신앙생활을 해 보시면 우리는 늘 완악하고 게으르고 배반하며 알고도 죄를 짓습니다. 그 0.1%를 못 해냅니다. 그래서 0.1%가 내 책임이라고 되어 있는 사람은 예외없이 좌절하고 실패합니다. 그렇게 되면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뭐와 같으냐 하면 이렇게 가정합시다. 제가 어떤 시체를 살려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시체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너를 살려 줄테니 너는 다른 것 하나도 할 것 없다. 내가 널 살려줄 때 나를 3초 동안 똑바로 보아라” 이러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너를 쳐다만 보면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테니까 나를 쳐다보라.” 그런데 눈알이 있어야 쳐다보죠. 이미 썩은 지 오랜데 “아니 그럼 쳐다볼 눈이 없으면 내가 하나 둘 셋 할 때 마음에 힘만 한번 써라” 시체가 무엇을 듣고 힘을 씁니까? 시체는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습니다. 시체는 들을 수도, 볼 수도, 자기가 어떤 처지인지도 모릅니다. 그에게 전혀 감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란 바로 그와 흡사합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감각이 없는 시체인 우리를 하나님 쪽에서 불쌍히 여기사 구원해 내신 것입니다. 그의 손으로, 그의 능력으로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면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지금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시체인 우리를 구원하셨다면 어차피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실 때 시체인 우리가 하나님을 쳐다볼 수도 없고 마음에 힘을 줄 수도 없고 귀를 기울일 수도 없었다면, 왜 믿음이라는 것이 등장해서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하는 구별이 생기는가?”라고 여러분은 물으실 것입니다.
제가 설명할테니 잘 들으십시오. 보통 구원은 실제적으로는 이런 식으로 시행됩니다. 누가 와서 복음을 “예수를 믿으십시오. 당신은 죄인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범죄한 우리를 위하여 예수를 보내셨고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구원키로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렇게 권합니다. 마치 우리의 반응과 결단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형태를 취합니다. 이것은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마저도 그랬습니다. 옥문이 열리고 사도 바울을 묶어 놓앗던 모든 결박이 풀어졌습니다. 도망간 줄 알고 간수가 자결을 하려고 하자 바울이 그를 제지합니다. “우리가 다 여기 있으니 내 몸을 상하지 마라” 그래서 간수가 떨면서 와서 묻습니다. “내가 어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때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분명히 우리에게 어떤 조건을 제시하고 우리의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서,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서 혹은 친구의 권유를 통해서 혹은 누군가의 전도에 의해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혼자 어느날 가만히 다락에서 생각하다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하고 온 사람은 없습니다. 하다못해 종소리를 들었거나 십자가를 보았거나 뭐 지하철에 흘려진 종이 쪽지에서 본 ‘교회로 오십시오’를 보고 왔습니다. 말씀과 전도라는 방법을 통해서 왔고 우린 거기에 반응했습니다. 바로 여기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들었을 때 우리가 믿기로 반응했다고 자꾸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면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우린 지금 이렇게 오해하고 잇는 겁니다. ‘복음이 나에게 제시됐고 나는 거기에 반응했다. 나는 선택했다.’ 성경이 하는 이야기는 복음은 우리에게 제시된 것이 아니라 우리를 파고 들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선택하라고 제안된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내 영혼, 골수, 심령 속에 파고 들어와 죽은 내 영혼을 살리고 감긴 내 눈을 뜨게 하고 막힌 내 귀를 뚫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설명할 때 모든 믿는 자에게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반응이거나 우리의 조건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게 된 모든 일들을 제시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고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는가를 진술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없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를 보내사 우리 죄를 씻는 작업과 우리를 완성시키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아직도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제사장 직분을 수행케 하는 것과 동시에 성령을 보내사 우리 마음문을 여시고 우리 죽은 심령을 깨우치는 작업을 동시에 하십니다. 이것을 다 합쳐서 복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 1:2-5).
데살로니가 교회에 편지를 보냅니다. “내가 너희의 믿음을 듣고 매우 기뻐한다, 하나님이 너희를 택하신 것이 너무나 분명하구나,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하면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이것이 말로만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확신으로 너희에게 이르렀기 때문에 너희가 신자가 된 것을 내가 목도했으므로 내가 감사하노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말씀 속에 능력으로 함께 하여 너희 심령을 찔러 쪼개어 변화시키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말과 설명으로 너희를 납득시키고 예수 믿게 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내가 알기 때문이다. 분명히 하나님이 너희를 택하신 것이고 택했기 때문에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 복음이 말로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말씀 속에 함께 하사 능력과 확신으로 너희의 심령에 간섭하여 너희를 믿게 하셨느니라.” 이렇게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들, 우리가 하나님을 알며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이 모든 것들은 내 선택과 내 결단이 아닙니다. 결과입니다. 무슨 결과입니까? 하나님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서 일으키신, 나를 거듭나게 하셨고, 내 눈을 뜨게 하셨고, 죽었던 내 심령이 살아나게 하시사 내가 보고 듣고 만지고 맞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된 결과란 것입니다. 이것은 결과입니다.
더 분명한 곳을 찾아 봅시다. 고린도전서 2:1에서 5절까지로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 중 바로 이 문제와 결부된 중요한 사도 바울의 논술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고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1-5).
왜 이 말을 써야만 했었느냐 하면 고린도 교회가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설립했는데 이 교회 내에 나중에 쓸데없는 싸움이 생겼습니다. 복음에 대한 오해가 생겼습니다.
처음에 지적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 제시한 구원에 관한 이 깊은 도리들을 본인들이 이해하고 선택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난 똑똑하고 신령해서 이 말을 알아들어 예수를 믿게 되었고 너희들은 덜 똑똑하고 덜 신령해서 안 믿었다, 혹은 늦게 믿었다 혹은 아직도 덜 믿고 있다.” 이런 싸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지금 바울이 무슨 싸움을 하려고 하느냐 하면 “너희가 믿고 고백하는 신앙들은 너희의 머리와 생각으로 너희가 이해해서 믿은 것이 아니라 너희 속에 성령께서 작업하셔서 알게 된 것이다. 네가 똑똑해서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희의 심령에 간섭한 결과로써 믿음이 생긴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하여 이 말을 씁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고전 2:1).
지혜와 사상, 철학적인 어떤 윤리와 도덕적인 것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 중에 이 일을 전할 때에 십자가 외에는 생각지 않았다”고 합니다. 십자가란 무엇이기 때문입니까? 인간의 구원에 관한 한 인간은 스스로 아무 능력도, 지혜도, 지식도 없다는 것을 십자가보다 더 잘 설명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떠하기를 요구했느냐 하면 4절을 봅시다. “내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예수를 선택했다. 내가 믿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것은 다 필요없다. 착하고 안 착하고 성실하고, 안 성실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일단 우리가 해야 할 단 하나의 책임이 있다면 예수를 믿는 것이다.” 뭐 그렇게 믿었다고 해서 제가 시비를 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신앙을 쌓는데 중요한 차이가 생깁니다. 그 믿음은 여러분의 의지도 아니고 여러분의 지혜도 아니고 여러분의 열심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만들어낸 중생한 결과로 생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어느 순간부터 알기 시작했고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여러분이 선택하고 이해해서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가 복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우리쪽에서의 자격과 조건을 따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못났고 완악하며 훨씬 처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 오시사 우리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만을 일으키신 것이 아니라 완악한 우리, 죽은 우리, 무능한 우리의 심령에 하나님께서 대수술을 행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우리를 행하여 갖고 계시는 모든 약속에 참여할 수 있도록 바꾸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0:9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이런 구절들이 우리에게 믿음과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물론 이것은 그렇게 쓴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리만은 분명히 해야 됩니다. 우리는 입으로 시인해야 됩니다. 그러나 믿지 않고서는 시인할 수가 없습니다. 믿어야 됩니다. 13절에 가면 이 믿음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3-14). 믿지 않고서는 주를 부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어디서 나느냐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오.” 이것은 중요합니다. 왜요?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아는 것은 우리 스스로 생각해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누가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가 나옵니다.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거나 우리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비밀한 것이고 이것은 너무나 높은 것이고 게다가 우리는 영적으로 죽어 있어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없었기 때문에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자, 그 소식을 전하는 자도 같은 인간인데 그는 어떻게 아는 것입니까? 내가 모르면 그 사람도 모릅니다. 우리 인간, 나라는 이 인간이 모르면 저 인간도 모르는 법입니다. 물론 그것이 세상 학문이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그렇지만 영적인 문제에서는 그렇다는 말입니다. 인간 중에서 아무도 이것을 아는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가 더 나옵니다. “보내심을 받지 않았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누가 보낸 것입니까? 하나님이 보내시는 것입니다.
자, 이제 분명해졌습니까? 복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나를 위하여 죽게 하셨습니다. 내 죄를 씻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나를 완성키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사 하늘 보좌 우편에서 오늘도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나의 것이 되고 놓쳐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성령 하나님을 보내사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가진 계획과 이루신 모든 것을 나의 것이 되게 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며 신령한 것을 소유케 할 수 있는 자로 그 심령을 중생시킵니다. 선한 의지를 줍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나를 바꾸어 놓으시고 중생시키시고 거룩한 일에 약속을 허락하시고 그 일을 감당하는 자로 오셔서 나와 함께 역사하십니다. 여기까지가 다 복음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시며 떠나시지 않았습니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주님이 내 편을 들고 계시고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십니다.
로마서 8:26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성령님을 보내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의 선택에 모든 것을 맡기시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운명이 우리의 선택과 우리의 손에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잘못 선택하면 하나님 앞에 맞으면서 고치도록 되어 있는 존재들입니다. 올바른 선택을 하면 칭찬과 상급 속에서 영광의 자리로 가게 되어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지금 자랑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 부끄러워하지 않느냐? 이것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 능력은 말하자면 하나님이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적용시키시되 우리가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하여 정당한 반응을 못하는 것을 내버려 두시지 않고 거기에 정당한 반응을 하도록 우리에게도 작업하사 그 일을 결과적으로 완성의 자리에까지 이루어 내실 것이 복음 속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이 복음이며 이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 우리의 운명은 우리 손에 있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몰아가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고 못살게 구십니다. 마음을 못살게 굴어서도 안 되면 다리를 부러뜨리든가 허리를 부러뜨리든가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몰아내실 것입니다. 그래서 28절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아멘 하십니까?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선전포고인지도 아시겠습니까? 알아서 하십시오.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아픔과 슬픔과 생각해야 되는 일들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지 않은 손길의 결과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고 싶은대로 다 됐더라면 이 자리에 안 있었을 것은 왜입니까? 부모를 잘못 만난 것도 아니요 시대를 잘못 만난 것도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사 여러분을 하나님이 기뻐하는 영광의 자리에 앉히시기 위하여 여러분을 내버려 두시지 않은 결과입니다. 이것에 만족하십니까? 아니면 더 맞는 수밖에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으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복음이 무엇이라구요? 하나님이 불쌍하고 비참하고 미련하고 게으르고 완악한 우리들을 사랑하사 우리의 운명을 우리의 손에 내버려 두시지 않고 찾아 오셔서 죄에서 꺼낼 뿐만 아니라 씻으시고 거룩케 하시고 아름답게 하사 영광의 자리에 앉히시기로 이제 그 일을 시작하셨고 그 시작하신 이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이루어지고야 말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인데 이 복음은 하나님이 미련하고 완악한 인생에 찾아오셔서 간섭하신 의지의 손길인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복음에 대하여 하나님의 간섭에 대하여 반항하실 수 있습나까? 남는 것은 매자국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고집과 여러분의 고집이 부딪치면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이기십니다. 왜요? 하나님이 고집이 얼마나 세신가 하면 그의 별명을 영원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고집을 부려봤자 기껏 100년입니다.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말로 할 때 순종하여 칭찬받고 상 받으면서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영위하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권면하신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의지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인가를 살펴보기로 합시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히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듯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사 55:6-11).
우리는 말로 해서 듣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말씀이 갖는 운명적 목적에 대해 감사하고 ‘아멘’ 하십시오. 그러나 동시에 이 말씀은 우리의 완악함과 비교하자면 우리는 죽었다고 복창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그분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작정하신 일, 우리의 복을 위하여 계획하신 일을 포기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좋게 말해서 절대로 듣지 않는 원수들입니다. 앞으로 얼마나 얻어터질 일만 남았는지, 생각하면 끔찍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만일 지혜롭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신다면 신자의 길이란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이 세상의 어느 것으로도 방해받지 않는 영광된 우리의 약속이 얼마나 확실한가를 생각하게 된다면 신자는 마땅히 매일의 삶을 찬송과 감사로 이어야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가? 왜 그렇게 못산다구요? 우리는 우리의 근거를 가지기 일쑤고 그 다음에 우리는 우리의 고집을 앞세우기 일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우리 속에서 이루시고야 만다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이루시고자 하는 영원한 약속이 복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신자의 행복입니다. 그것이 신자가 마땅히 해야 될 믿음의 순종인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인 줄 인정하시고 우리로 믿게 하시며 우리로 영원한 기업의 자리에 불러낸 그 자리에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마땅히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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