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영선목사

로마서 4강(롬 1:3-4), 강력한 복음/ 박영선목사

새벽지기1 2016. 2. 2. 07:06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불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3-4)


우리의 믿는 바 신앙의 본질, 소위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을 이야기할 때는 그것이 교훈이거나 어떤 개념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주권이 먼저 강조되어야 되는 것이 성경적인 설명법이라는 것을 지난 몇 시간에 걸쳐서 상기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과 기독교 신앙을 이야기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계시다’, ‘그 하나님이 온 천하만물을 만드셨다’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 보는 바와 같이 복음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할 때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롬 1:2)이라고 표현되고 있습니다.

아들에 관한 것입니다. 유교나 불교나 다른 모든 종교들이 선이나 도나 고귀한 어떤 이상을 좇는데 반하여 기독교적 신앙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3-4).


이 예수가 누구냐 그러면 ‘다윗의 후손이요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말은 무척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종교적인 본성이 언제나 관념론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란 무엇인가? 그러면 사랑의 종교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은 핵심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기독교가 무엇이냐 그럴 때 은혜의 종교라는 것도 기독교 맥락의 한 핵심을 붙잡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사실은 그렇게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정답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개념으로 이해하느냐 인격으로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가 오늘 우리가 살펴보아야 하는 문제입니다.


본문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설명을 봅시다. 3절에는 그의 육신에 관한 이야기, 5절에는 그의 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오늘은 먼저 3절에 있는 말씀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분입니다.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 하는 것은 오해하기 꼭 좋게 기록되고 말았습니다. ‘나셨다’라는 말은 ‘되셨다’라는 말입니다. 후손이 되셨다, 나셨다라는 말이 틀릴 것은 없습니다만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사람의 존재의 시작은 출생부터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때 ‘나셨다’하면 그때 존재가 시작되셨다, 이렇게 오해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이런 식의 싸움이 언제나 기독교 역사 속에는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시냐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모든 거룩한 율법과 요구를 최초로 만족시킨 사람, 그래서 인간 중에서 유일하게 최초로 신의 반열에 오른 자’ 이렇게 오해한 이단이 너무 많이 있었으며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이 쪽 사상은 보통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말하는 범주에 속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싸움거리는 기독교의 복음이 교훈과 도에 관한 싸움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때부터 그 존재를 시작하신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통하여 비로소 하나님께서 가장 만족하신 지위에 오른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어떤 낮은 자리로부터 출세하시고 성공하시며, 완성되신 분이 아닙니다. 그는 본래부터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을 봅시다. 성경 어디서나 이 문제는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나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 1:1-11).


육신의 모양으로 자기 땅에 오셨습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 육신으로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 차이가 되느냐 하면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한 인간에서부터 완성된 분으로 생각하면 그가 어떻게 그 완성의 경지에 들어갔느냐 하는 깨우침의 싸움이 됩니다. 그럼 기독교가 불교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예수와 석가의 만남’ 이런 이야기가 나오게 되고 예수님의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인도에 가서 수업을 하고 왔다느니 하는 책들이 등장하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다같이 어떤 대오각성의 문제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존재로부터 우리가 아직 깨우치지 못한 어떤 경지에 들어가신 분이 아니라 본래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기도 중의 한 내용입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소서”(요 17:5).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기 전에도 영화로운 분, 존귀한 분, 하나님이였고 이 땅에 오셔서 그 사역을 마치시고 돌아간 곳도 본래의 자리인 영광의 자리로 가신 것이지, 오시기 전에는 뭔가 부족했는데 오셔서 완성이 되어 가신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란 결국 부족한 것이 없고 모자랄 것이 없고 아쉬운 것이 없는 그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어야만 했던 어떤 문제와 그렇게 오시도록 간섭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간섭하셨다는 신적 개입에 초점이 있습니다.


복음 자체를 우리는 자꾸 어떤 교훈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는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아닙니다. ‘주님이 오신 것’이 핵심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은 것’이 핵심이 아니고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잘 아는 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요한복음 3:16로 대표되는 구절에 잘 명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은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해서 독생자를 주시는 것입니다. 저로 말미암아 세상을 구원하시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시는 그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의 간섭이 복음이지 이제 그를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것은 그 결과에 불과한 것입니다. 복음은 주님께서 오셔서 설파시고 제시하신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오신 것, 오셔서 행하시는 사역, 그분만이 감당하실 수 있는 그 일, 그래서 주님 자신이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으로 가 보십시오. 이런 부분들은 우리에게 익숙지 않기 때문에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 하느냐, 은혜의 종교라 하느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깨우침이 아닙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4-5).


우리쪽의 회개, 우리쪽의 믿음이 결단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을 얻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그가 맞아서 내가 낫는 겁니다. 그가 찔림으로 내가 구원을 얻는 겁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그분에게 있는 겁니다. 나의 선택이나 나의 깨우침에 있지 않습니다. 그분이 찔려서 그분이 맞아서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우리는 다 각기 제 길로 가고 있는데 우리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신 것입니다. 우린 그 동안 얼마나 많이 구원이란 제시하신 내용을 지키는 싸움이라고 이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성경은 그래서 주인이 무엇을 제시하시기 전에 구원을 선포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강조점들을 몇군데 찾아보기로 합시다. 누가복음 2:8입니다. 주님이 나시던 때의 장면입니다.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히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눅 2:8-11).


그리스도가 나셔서 아직 무슨 행동이나 교훈이나 말씀을 베풀기 전에, 그리고 아직 십자가를 지시기도 전에 주님의 태어나신 사건 하나만을 놓고 이미 기쁜 소식, 복음이라 이야기하며 그 복음이 무어냐 하면 “너희를 구원하기 위한 구주가 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동시에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후에야 나타날 모든 찬송들이 이루어집니다. 13절입니다.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3-14).


주님이 아직 아무 말씀도 하시기 전, 산상 설교 같은 것을 하시기 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이라는 것을 자꾸 도(道)와 교훈으로 이해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낸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눅 2:25-32).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아기 예수를 보고 벌써 주의 구원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에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로 약속하신 그 일이 성취된 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선택, 우리의 반응 이전에 하나님께서 대속물로 보내신 것입니다. 이제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시간 문제이지 이 문제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는 예수님의 능력과 그의 반응 여하에 따라서 번복되거나 변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무어냐?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무어냐?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구원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문제이지 우리의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 일차적인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론일 뿐입니다. 요한복음 6:37입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7-39).


우리를 설득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는 자들을 구원키 위하여, 저들을 위해 대속물이 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서가 다른 겁니다. 주님께서 이제 십자가 상에 돌아가시고 그 교훈을 만방에 펼쳐서 누구든지 믿는 자는 교훈을 얻는다는 식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가 이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하니 이 사람들의 죄값을 네가 치르어라”는 순서입니다. 순서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나를 구원하려고 예수를 보내셨다는 겁니다. 분명히 나중에 하나님을 믿어야 됩니다만 그러나 어디가 핵심인가는 전도되지 않아야 되는 부분입니다. 44절로 가서 이런 부분이 얼마나 강조되는지 보십시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꼭 이런 반문을 마음 속에 하게 됩니다. ‘그럼 우린 뭐냐 우리는 바지 저고리냐’, ‘그럼 성부 하나님하고 성자 예수님하고 가위 바위 보 하고 우린 뭐냐?’ 이것이 인간이 갖는 죄성의 대표적인 반응입니다. 권위적 차원에서 하나님께 우리는 그런 것을 따질 존재의 위치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긍휼히 여기고 사랑했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이 싹 쓸어 버려도 우리는 할 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인격적으로 대접하시고 사랑하셔서 우리 같은 것들을 구하기 위하여 성자 하나님이 피를 흘리셨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어디로 가 있느냐 하면 “내가 믿었다”로 가고 있습니다. “넌 안 믿었지만 나는 믿었다” 이것은 꼭 “넌 떨어졌지만 나는 붙었다”라는 싸움하고 똑같지 않습니까? 이것이 가장 비성경적이며 인간이 갖는 나쁜 죄성의 대표적인 표현들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신약은 이런 식으로 시작이 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 1:1). 여기서 세계라는 것은 족보라는 뜻입니다. 세계는 한문으로 世界입니다. ‘이을 계’입니다. 그래서 낳고 낳고의 족보에 우리도 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품 안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1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막 1:1). 사실 마태복음 1:1에서 본 것과 내용상으로 정확히 일치하는 것입니다만 표현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이것은 우리말로는 척 떠오르는 생각이 없습니다만 편의상 이해를 돕기 위하여 영어로 하면 여러분 기억나는 구절이 있을 것입니다.


“The beginning of the gospel of the Jesus Chirst of the Son of God.”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이것은 한국말 어순입니다. 그런데 헬라어 어순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beginning)이란 말이 됩니다. 어디서 들어 본 말 같지 않습니까? 창세기 1:1이 그랬습니다.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 and the earth.”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말하자면 인류라는 존재와 우주라는 역사가 어떻게 시작되는가에서 하나님이 역사를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처음에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만물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게끔 지으셨습니다. 거기에 죄가 침투합니다. 인간이 죄를 범하였고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되고 죄와 사망의 그늘 아래 앉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버려 두시지 않고 이 반역한 피조물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새롭게 재창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의 영광 된 자리로 우리를 불러 내시는 일을 다시 시작하십니다. 그래서 신약 자체가 ‘beginning’ 이렇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엇을 강조해서 비교해 보아야 되느냐 하면 기독교 복음이라는 것이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선택하느냐 혹 거역하느냐의 싸움이 아니라 온 우주만물의 주인이시고 우리를 만드신,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역사와 인류에 대하여 어떤 뜻을 가지셨고 어떤 개입을 하셨느냐는 것이며, 이것이 복음이란 사실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고 우리를 긍휼과 자비로 회복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이라고 그럽니다. 복음이란 전혀 다른 무게를 가지는 것입니다. 약장수가 약 선전하듯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 싸움이 왜 중요하냐 하면 이런 의미에서 강조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것을 하나의 교훈으로 알기 시작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는 흔들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가 흔들리면 묘하게도 성부 하나님의 위치가 흔드리고 기독교는 기독교만이 갖는 그의 유일성을 잃어 버립니다. 요한일서 2:22입니다.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요일 2:22-23).


왜 아들을 부인하면 아버지가 없어지죠?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 아닙니까? 지금까지 가장 많이 기독교를 공격했던 모든 이단들은 처음에 메시아직을 찬탈하러 나섭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의 메시아직을 수행하는 데 실패한 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박태선 씨가 그랬고 지금 문선명 씨가 그럽니다. 그래서 자기가 두 번째 예수라는 것입니다. ‘재림예수!’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보통 재림예수라고 해서 와서는 무슨 싸움을 거느냐 하면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 중에 이런 것이 틀려서 내가 그것을 보완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가 교훈과 도로 간다는 말입니다. 기독교가 교훈과 도로 가면 그것이 예수일 필요도 없고 문선명일 필요도 없고 석가일 필요도 없고 공자일 필요도 없습니다. 누구 주인이 되냐 하면 모든 고급한 이상과 고급한 가치의 주체가 인간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없어지고 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직을 뺏어 버리는 것이 그를 보낸 분의 존재까지 없애게 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이단은 100%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불충족성을 공격하고 자기가 그것을 충족시키러 왔다고 이야기하다가 예수는 원래 메시아가 아니고 내가 참 메시아다 그랬다가 나중에는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그럽니다. 꼭 그렇게 갑니다. 안 그런 사람은 그러기 전에 죽어서 못 그런 것이지 다 꼭 그쪽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 왜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 되느냐 하면 교훈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왜 복음의 핵심이요, 교훈의 핵심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말씀이나 교훈 이전에 그분을 보내신 분이 있다, 그분이 성부 하나님이요 온 천하만물의 주인이시다, 나의 생명을 주신 분이다라는 것을 근거로 해서만 그가 오심이 빛을 발하고 복음의 핵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전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놓쳐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무엇을 했느냐는 이차적인 것입니다. 죽어가는 인류를 위하여, 지옥 형벌밖에 남은 것이 없는 인류를 위하여 하나님이 드디어 움직이셨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성경이 초점을 맞추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공부했을 때도 생각한 것과 같이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보내신 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 나의 일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 내 일이다’라고 강조하는 이유가 예수님이란 존재는 예수님 한 분만으로 국한되거나 그의 가르침으로 대치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언제나 그를 보내신 분을 전제로 하고, 그분들이 밀접한 관계로 함게 있어서 예수님을 인정하는 자는 곧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되는 상황이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얼마나 거대한 손길 속에 있느냐를 아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이란 무어냐 그럴 때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 온 천하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온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 그분이 인류에 대하여 그리고 특별히 내 자신에 대하여 사랑과 긍휼과 자비를 베푸셨다는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 하나님이 내 편을 드니까 아무도 나를 하나님의 사랑의 손끝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는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것이 무엇에서 나타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강림, 그의 수난 이것이 강조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놓치고 교훈으로 빠지면 기독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기독교는 여타 다른 인간들이 만들어 낸 종교에 불과하게 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높이고 주님을 높이고 인간을 겸손하게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만들고 그를 찾고 그에게 의지하는 것이 우리의 행복이요 우리의 자랑이요 힘인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에게 그렇게 하마 하고 약속하셔서 우리를 위하여 그를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운명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지신 사랑을 막을 자 없음을 우리가 아는 것, 이것이 우리가 믿고 있는 복음 안에서 우리 성도들의 영원한 운명이요, 자랑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