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롬 1:8:12)
오늘 읽은 8절부터 12절 말씀 속에는 사도 바울이 이 서신을 보내는 중요한 목적이 하나 나옵니다. 11절에 있는 바와 같이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고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만나려는 목적이고 만나서 자기가 할 일 자기가 나누고 유익케 할 목적을 먼저 서신으로 보낸 셈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8절에서 본 바와 같이 이미 로마에 있는 성도들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라고 이미 소문이 날 정도로 신앙이 좋았던 사람들로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저들은 믿음을 견고케 하기 위하여 만나기를 원한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시점에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신앙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참 풍성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예수 믿고 구원을 얻어서 지금 죽어도 천국 간다라는 식으로만 이해하고 있는데 그것은 상당히 초보적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믿음의 확신을 갖는 것도 필요하고 구원의 소망을 분명히 갖고 있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본문에서 본 바와 같은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상을 여기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신앙이 견고하다고 하는 부분도 그런 의미에서는 많이 오해되는 것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습니다.
믿음이 좋다고 하는 것을 기도를 많이 한다든가, 성경을 많이 본다든가, 혹은 전도를 많이 한다든가, 구제를 많이 한다든가 하는 것들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은 오늘 우리가 배우고 있는 로마서에서 바울이 설명하고자 하는 것과 상당히 거리가 있다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되는 것은 구원이라는 것이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사 영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리로부터 이제 영원한 구원, 영원한 생명을 얻게 했다 하는 것으로 설명되는 것이 우리의 필요성, 죄인 된 인간의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우선적으로 나온 것이지 그것이 구원 내용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구원은 인류와 인간을 대상으로 택하는 정도가 아니라 전우주적인 영역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선 이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9-20).
전우주적인 모든 존재들을 자기와 화목케 하시고 새롭게 하는 것이 구원이다 하는 것을 기억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이고 구원에서 가장 중요한 절정을 이루는 것이 인간의 구원입니다만 인간만이 아니고 전우주라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지 말아 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세상에서 우리를 쏙 빼간 정도, 악한 세력과 선한 세력이 대등한 두 개의 존재로 있고 거기에 엔테베 공항 작전같이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를 기가 막히게 싹 빼가는 정도가 아니라 온 우주만물과 역사를 주관하시고 주인 되시는 그분이 이 세상 자체를 화목케 하는 일이 구원이라는 우주적인 차원으로, 구원을 이해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 가서도 이 사상은 자연계를 포함하여 이렇게 설명되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이나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리라”(롬 8:18-23).
아직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지 못했고 그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대신될,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이 그렇게 변화될 것을 성경이 약속하고 있음을 구원이라는 개념 속에 포함시키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우리에게 왜 중요하냐 하면 성경의 중심 사상은 구원론이 지배적이거나 그 중심 사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 얻는다는 것을 마치 세상으로부터 도망가고 세상과 우리가 분리되는 것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구원의 전영역을 약화시미는 것이 됩니다. 구원은 우리만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썩어지고 악하고 부패한 세상도 새롭게 되는 일을 선포하고 시작하신 것으로 그 내용을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가장 중요한 지배 원리는 우주론적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주권의 우주론적 위엄, 권세의 크기를 그 중심 사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온 우주의 영역과 우주의 모든 존재들을 장악하고 계시는 삼위 하나님의 주권성이 그 지배 원리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들에 걸쳐서 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도 구원이 무어냐 그러면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느냐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을 하셨느냐가 초점이었듯이 구원을 얻는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찾아오셨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어떻게’가 우리가 믿는 방법으로서의 어떻게라면 하나의 테크닉을 의미합니다만 ‘어떻게’ 찾아오셨는가라고 할 때는 이미 테크닉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과 은혜와 사랑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지은 것이 그분에게 무슨 누가 되겠으며 세상이 죄로 말미암아 좀 부패된 것이 하나님께 무슨 약점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인간식으로 표현하자면 싹 쓸어 버리고 새로 만들면 되는데 뭐 걱정이겟습니까? 그래서 구원을 이야기하고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복음을 이야기하면 사랑, 은혜, 자비, 이런 식으로 설명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지금 사도 바울이 이야기할 때도 바로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너희를 견고케 하려고 한다”는 이 이야기는 무엇으로부터 출발하느냐 하면 다시 8절로 가셔서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롬 1:8)라고 시작합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어 견고케 하려고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너희가 예수를 믿어서 참 고맙다”고 우리가 자녀들에게 말할 경우가 있습니다. 바울의 경우는 이런 뜻이 아니란 말입니다. “너희들이 어떻게 하다가 예수를 다 믿게 되었느냐 내가 가기도 전에 참 용키도 하다. 어쩜 그렇게 똑똑하고 어쩜 그렇게 착하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예수 믿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이 복음을 허락하셨다 너희에게 이 구원을 허락하셨다. 나는 내 하나님께 감사한다”라는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전시각이 이 일을 우리에게 허락하고 우리에게 가능케 하신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악 중에 신음하고 죽어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전우주적인 영역으로 볼 때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자녀로 부르신 것 같이 죄 많은 이 세상을 이제 언젠가 역사를 끊으시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주의 구원을 얻고 하나님이 자녀가 됨으로서 이 죄많은 세상과 등지고 우리끼리 모여서 기도나 하고 우리끼리 모여서 가끔 전도하고 들어오고 우리끼리 모여서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마땅히 다시는 상함도 없고 죄짓는 것도 없고 사망도 없는 땅을 약속하셨고 그것을 얻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새롭게 주신 성품과 신앙적인 것들, 거룩한 것들을 이제부터 발휘하면서 살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 얻었다는 것은 불타고 있는 건물에서 건져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 새로운 질서, 새로운 목표, 새로운 내용으로 부름을 받은, 즉 새 영역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여기가 바로 바울이 내가 너희를 만나고 싶은 이유가 있다라고 말하는 이유가 되는 자리인 것입니다. “너희는 불타던 곳에서 건짐을 받았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는 다시 무장을 하고 불타는 데 아직 남아있는 신자들을 건져내러 가자”는 정도가 아니라 너희는 옛날에 죄짓고 사망이 왕노릇하고 그리고 흑암속에 있었고 너희의 욕심대로 살던 때로부터 이제는 하나님을 알고 온 천하 만물을 지으신 그분,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의와 거룩과 영광을 위하여 살 수 있는 자리로 부름을 받았다. 그래서 ‘이제 거룩하게 살자’, ‘영광스럽게 살자’, ‘주의 모습을 닮자’ 이것이 견고케 하기 위한 목적 속에 있는 분명한 내용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만이 구원이 아니라 이 세상 역사 이 우주만상을 새롭게 하시기로 한 그 거대한 약속 속에, 계획 속에 우리가 포함되어 있고 그래서 우리를 구원해 내시고 하나님을 따라 살며 거룩하게 사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한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삶의 전체계 속에서 반응하고 이겨내는 사람으로 견고해져야 된다는 의미에서 견고케됨을 목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견고함, 우리 신앙의 깊음이라는 것은 누가 더 많이 기도했느냐 그리고 누가 더 많이 성경을 읽었느냐, 누가 더 많이 전도했느냐는 아닙니다. 물론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더더욱 아닙니다. 성경울 보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우리가 신령한 영양소를 공급받을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에서 힘을 내느냐 할 때 우리의 삶의 전체계에서 삶의 전현장에서 힘을 발휘해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아서 의와 거룩으로 지은 바 되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모든 은사로 무장된 자들입니다.
우리는 좋은 자리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를 해하려고 하고 우리를 유혹하려고 하는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하고 우리를 어떻게해서든지 미혹케 하려고 하는 모든 것들에서 의와 거룩으로 그것을 이겨내야 됩니다. 세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하기 싫은 것이 무엇입니까? 아이들한테 물어보면 공부고 어른한테 물어보면 일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게으름 떠는 겁니다. 무엇이 훌륭한 것입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누르는 지혜와 의지력이 아닙니가! 미련한 때, 철들지 않았을 어렸을 때는 꾀병을 부립니다만 나이가 들어서 회사를 꾀병 부리고 안 나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회사를 그만 두기로 결심을 하기 전에는 말입니다. 따라서 모든 성경의 요구들은 바로 이런 싸움에 초점을 모으고 있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에베소서 3:14입니다.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4-19).
여기까지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되기까지 악에게 지지 않는 것,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 오른편 빰을 맞으면 왼편 뺨도 대는 것,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는 것이 모든 것을 사랑과 덕에 관한 문제가 아닌, 신자가 도달해야 되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해지는 어떤 경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이 훈련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당하는 모든 교활하고 험악한 유혹과 시련 속에서 싸워 획득하고 만들어 내야 하는 실력입니다.
에베소서에 기록되 어떤 말씀들은 다른 서신서들과 어떤 차이를 느끼게 합니다. 대표적으로 갈라디아서라든가 고린도서에서는 많은 꾸중이 나옵니다만 에베소서는 별로 그런 꾸중을 못 봅니다. 지금 이야기한 것 같이 이렇게 미래 지향적이고 적극적인 권유를 받는 것으로 인해서 에베소 교회가 상당히 괜찮은 교회였을 것이라고 상상하게 되는데 그것은 너무 성급한 결론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으로 가 보십시다. 아시는 대로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은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들입니다. 대부분의 교회들이 다 심각한 꾸중을 받았습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내 촛대를 옮기겠다”, 라오디게아 교회에는 “내 입에서 너를 내치겠다”는 심각한 꾸중을 받았는데 무엇을 잘못해서 그랬나 봅시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1-5).
어디에서 잘못했다고 그럽니까?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빼놓으면 얼마나 잘한 것이 많으냐 하면 2절을 다시 봅시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 2:2-3).
이만 하면 됐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사랑을 버렸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우리들은 쉽게 처음에 가졌던 그 불붙는 사랑으로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을 보자고 그럽니다. 요 근래에 유명한 영화 중에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대단히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전 이런 영화에서 이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야 웃기지 말고 죽지 말고 한번 살아봐라. 이 원수야 살아도 그런가.” 산다는 것은 훨씬 어려운 것입니다. 눈물이나 흘리고 껴안고 춤추는 것이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지지고 볶는 것이요 인내 위에 또 인내, 또 인내하는 것이요 헤어질가 말까를 하루에 몇 번씩 생각하는 것이요 저 원수를 만난 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시험하는 것인가, 십자가인가, 가시인가 이런 갈등을 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하십시오. 언제 사랑에 강해지냐 그러면 아이들을 대학쯤 보내고 시집 장가 보내고 나야 사랑이 강해집니다. 젊었을 때 신혼초 아이들 낳기 전에 연애하던 시절의 사랑은 달콤하고 감미로운 멜로디 속에서 커피나 나누고 서로 마주보고 쳐다만 보아도 눈물이 납니다. 그때는 그것을 갖고 목숨을 겁니다. 그러나 가장 사소한 것 하나로도 꺼집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연애를 여러 번 했는데 잘 안됐습니다. 그러다 어떤 괜찮은 남자를 만났는데 어느날 아주 사소한 것으로 깨졌습니다. 왜 깨졌느냐 하면 영화를 같이 보러갔는데 끝나면 끝이라는 글자가 나옵니다. 영어로 끝이라고 나오는데 하필이면 일어나면서 ‘더 앤드(the end)’라고 그랬답니다. 조금 괜찮게 영어를 배운 사람들은 모음 앞에 ‘the’는 ‘디’로 발음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말 한마디에 어떻게 정이 떨어지는지 그만 두었답니다. 그것이 실력입니다. 자기는 굉장히 고결한 사랑에 대한 실력을 갖고 있는 것 같지만 ‘더 앤드’로 깨지는 정도입니다. 실력이 개뿔도 없는 것입니다. 같이 자보고 결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모르냐 하면 코는 고는지, 이빨을 가는지 아닌지 모릅니다. 결혼하고서야 압니다. 그런데 코 골아서 이혼한 사람은 없습니다. 코를 안 골면 잠이 안 온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더 앤드’ 같은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지붕이 떨어져 나가도록 코를 골아도 행복하게 사는 것이 부부입니다. 이것이 실력입니다.
결국 에베소 교회의 적중은 무어냐 하면 내가 처음 가졌던 첫사랑을 놓쳤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가졌던 어떤 정열, 그 열심히 식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신앙을 버린 것도 아닙니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만큼 정확한 신앙의 지식도 있었고 그리고 그것을 놓치지 않았고 수고하고 애쓰고 있고 구제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단 무슨 문제가 있었느냐 하면 그들은 그들의 출생을 성장시키지 않고 있었습니다. 첫사랑이 식었다는 것입니다. 첫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출생한 자녀는 자라야 됩니다. 당연히 자라야 됩니다. 그런데 이 자라남이 없는 것입니다.
퇴근해서 부부가 만나 눈물이 글썽글썽해지고 하는 것은 정신병자가 아닌 다음에야 그럴 수 없습니다. 집에 들어오면 나와 보는 사람이 요새 누가 있습니까? “아니 이거 나와 보지도 않어” 그러면 “누구는 지금 놀고 있는 줄 알우?” 이것이 부부입니다. 이것이 실력입니다. 살아온 것입니다. 싸움싸움 해 가지고 아이들을 키우고 그런 것 다 하면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인들을 향해 에베소서가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제발 좀 자라란 말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엡 1:17-23).
이 번역은 아주 재미있습니다. 주님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입니다. 주님만이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가 누구란 말입니까? 예수님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그분에게 만물 안에서 충만케 하시는 충만이 필요하답니다. 바로 교회는 그의 몸이니 그의 충만인 겁니다. 교회가 무엇입니까? 우리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없으면 예수 그리스도는 충만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충만을 위해서 필요하며 그의 충만의 충만을 만들기 위하여 충만해져야 되는 존재여야 됩니다. 그래서 이것이 교회 교인들에게 자꾸 요구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계속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애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1-13).
그렇죠. 가까워졌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구요? 다시 4장으로 가보십시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엡 4:17-20).
‘너희는 옛날에 저 세상에서 살았다. 그 세상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너희는 구원을 얻었다’. 그러니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주게할 것이 잇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5-29).
옛날의 영역,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고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였는데 이제는 그 영역으로부터 거룩한 영역으로 왔다. 그러니 그것은 다 버려라. 그러니까 신앙이란 무엇이며 신앙이 깊어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신앙이 강해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새 영역에 들어와서의 성장입니다. 거룩해지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데 그 모든 일을 종교화시킨 데서가 아니라 삶의 전영역에서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세상을 우리로 하여금 공격하도록 명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악한 자들이 승리하며 행악자들이 권세를 잡고 있으며 거짓말을 하고 속이고 더럽게 굴고 있습니다. 거기에 새로 거듭난 우리가, 의와 거룩으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가 정직과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과 온유와 겸손과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생명과 진리와 영원한 소망을 가지고 저들과 똑같은 형편, 똑같은 영역에서 힘있게 살아 나가야 됩니다. 그것이 전 삶의 영역, 삶의 전체계로 체계화되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었느냐? 구원 얻은 확신이 있느냐? 오늘 죽어도 눈을 뜨면 천국일 것을 믿느냐? 그것이 전부는 아니란 말입니다. 오늘 모가지가 잘려도 눈을 뜨면 천국이다. 그것 가지고 재지 마시고 그 목 잘리기 전에 잘 살라는 말입니다. 죽은 다음에 가는 천국 좋습니다. 그런데 살아 있는 동안은 무어냐 말입니까? 예수 믿는 것이 살아 있는 동안은 세상 사람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입니까? 예수를 믿었어요. 천국 가요, 믿음이 있습니다. 구제도 하고 전도도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그런 것 이외에 더 견고해져야 됩니다. 모든 삶의 영역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새사람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한 새 하늘과 새 땅의 부름을 받는 자들입니다. 그것이 지금 시작되어 우리가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갔을 때 부족함이 없는 사람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점도 흠도 없이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으로 다시 가 봅시다. 계시록 2장과 3장에 기록된 이 일곱 교회 편지는 그런 의미에서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계시록 2장 처음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결론을 봅시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
이 결론이 언제나 일곱 교회에 공통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8절 이하는 서머나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계 2:11). 그 다음 버가모 교회입니다. 17절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이기는 자는”, 18절로 시작된 두아디라 교회 29절과 26절을 보십시오. 사데 교회는 3:6과 5절을 보십시오. 7절은 빌라델비아 교회이고 13절과 12절을 보십시오. 14절은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22절과 21절입니다.
다들 공통적으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리고 “이기는 자에게는...”이란 말이 나옵니다. ‘이기는 자’ 이것은 참 재밌습니다. 일곱 교회에 공히 어려운 문제가 있었습니다. 일곱 교회가 공히 하나님 앞에 칭찬 받을 것이 있었습니다. 일차적으로 교회들입니다. 교회로 쳐줄까 말까가 아니라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칭찬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부족한 것들을 지적하는데 그것을 없이 해준다는 약속이 없습니다. 이겨야 됩니다.
신앙의 깊이가 무어냐, 더 좋은 신앙이 무어냐, 더 큰 신앙이 무어냐고 할 때 종교화된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만물의 주인이시며 하늘과 땅을 지으셨고 인간의 역사를 주장하신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지금 나타나는 것은 아직도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니요 약속한 나라가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아직은 행악자들이 권세를 잡고 있고 부패해 있고 유혹이 있고 협박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안에서 그의 나라를 시작하시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에서 나타납니다. 우선 우리가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자들이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분명히 이 내용에 포함되어야 됩니다. 그가 하늘과 땅의 권세를 잡은 것도, 역사의 주인인 것도 역사를 시작하셨고 역사를 이제 심판으로 마치실 것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삶의 전체계 온 우주 영역 속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는 신자로서 이 삶을 대처해 나갈 줄 알아야 됩니다. 세상은 우리를 협박하고 위협하고 그리고 유혹할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는 자로, 의와 거룩으로 새롭게 난 자로 모든 현장에서 모든 삶의 영역에서 우리는 신자로 싸워 나가야 됩니다.
그리고 모든 싸움을 회피하고 도망가면 안 됩니다. 안 되는 것을 기도로 때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기도가 어떤 제물이 되게 마십시오. 기도란 하나님 앞에 더 좋은 지혜를 구하고 방법을 구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던 문제를 기어코 이겨내는 것으로 기도는 응답되어야 됩니다.
사도 바울이 하는 이야기를 알겠습니까? 여러분은 이 온 천하만물의 주인이시고 시간과 공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고 의와 거룩으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입니다. 여러분 삶이 전영역에서 새로난 자로, 의와 거룩과 영원한 소망을 가진 자로 그리고 온 천하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다가오고 부딪치는 것을 책임져야 하는 모든 삶의 일들을 신자로 싸우시고 승리하기까지 포기하지 않으셔야 됩니다.
그것을 위하여 바울은 이제 로마서에서 복음이 무어냐, 하나님이 누구냐,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무어냐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를 설명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우선 이 시작을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삶에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식하시고 그의 자녀로 부름받은 것을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 속에서 기억하듯 이 첫사랑을 기억하십시오. 태어난 다음에 성장을 중지하지 마시고 끝없이 끝없이 자라나시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자리에 다 도달하여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여러분의 인생 속에서 감사와 찬송이 끊이지 않는 신앙생활을 몸소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말씀 > 박영선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 7강(롬 1:16-17), 하나님의 의(義)/박영선 목사 (0) | 2016.02.07 |
---|---|
로마서 6강(롬1:16-17), 하나님의 손길로서의 복음/박영선 목사 (0) | 2016.02.05 |
로마서 4강(롬 1:3-4), 강력한 복음/ 박영선목사 (0) | 2016.02.02 |
로마서 3강(롬 1:3-6), 복음의 A B C / 박영선목사 (0) | 2016.02.01 |
로마서 2강(롬 1:1~2), 하나님의 복음/ 박영선목사 (0) | 2016.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