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ABC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롬 1:3-6)
복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할 때 복음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가장 중요한 선을 우리의 믿음에 분명히 못 박아 두기 위해서 1절부터 7절에 있는 말씀을 오늘로 세 번째 생각합니다.
처음에 우리가 확인했던 것은 구원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 같지만 그 속에는 어떤 중요한 부분이 있느냐 하면 ‘인간이 세상에 있는 존재 중에 제일 권위있고 지식적이지 않다, 하나님이란 존재가 있다, 창조주가 있다’ 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한 이 구원은 그의 성실하심과 신실하심과 또 그의 의지로,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구원하시고야 말며 어떤 방해도 받지 않으시며 약속하신 것을 하나님 자신이 변개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은 영원한 우리의 운명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복음 안의 중요한 내용 중에 하나인 하나님이란 분은 절대 권위적이다 하는 것을 또 하나의 중요한 근거로 우리의 생각 속에 갖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식으로 설명하는 복음의 가장 중요한 세 번째 요소는 인간의 위치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이다, 예수를 믿는 기독교적 신앙이다, 구원이다 그러면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느냐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주느냐 하는 차원에서 생각하기 바쁘지 그 안에 우리의 어떤 사고와 결정의 원리와 핵심 되는 근거가 숨어있는가는 놓치고 있는 적이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행복하다든가 주를 믿으면 못할 일이 없다든가 영원한 복락을 누린다든가 기쁘다든가 하는 것으로 복음을 소개하고 있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란 쪽으로 복음을 설명하고 우리에게 그런 기준을 먼저 설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쪽은 굉장히 약합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성경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잘 보시면 5절에 있는 바와 같이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한다”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순종한다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성경은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핵심 되는 단어가 무어냐 그러면 순종이란 것입니다. 신앙의 핵심 되는 단어는 행복도 아니고 감격도 아니고 복도 아닙니다. 신앙의 핵심 되는 단어는 순종입니다. 2절부터 다시 보면, 우리가 확인하려고 하는 신앙의 가장 핵심 되는 것 중 하나인 순종이라는 것이 왜 어떻게 주어지는가를 알게 됩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롬 1:2-5).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예수는 누구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우리식 이해로 조금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부자지간이라는 것은 넘을 수 없는 권위의 차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농담 중에 친구가 와서 “야 아버지께서 오셨는데 차린 것이 이것밖에 없느냐”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다, 아들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당신과 나 사이에 굉장한 차이가 있다, 내가 훨씬 높다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쓰는 표현, 성경이 쓰는 표현에서 아들이라는 말은 신분상 동등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무엇과 구별되느냐 하면 1절에 있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과 분명하게 구별되는 표현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즉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다 같이 동등하시고 우리 인간은 그의 종입니다. 이 시대의 종이라는 것은 요즈음 어떤 사람을 돈주고 쓰는 것과는 다릅니다. 개인의 사유물입니다. 생사 여탈권을 그 주인이 가지고 있습니다. 사고 팔 수 있으며 죽이고 살릴 수도 있습니다. 6절에 보시면 예수 믿는 자를 무어라고 표현하는냐 하면,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소유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복음이 무어냐 그럴 때 지금 표현은 복음스러워 보이지 않습니다. 복음의 핵심 되는 것은 그의 존재와 그의 권유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향해 갖고 계시는 사랑 그리고 그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이 왜 복음이냐 하는 것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게 됩니다. 그분이 하나님이다. 우리가 그의 종이다 하는 개념을 성경이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는 것을 봅시다. 사도행전 2:33입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행 2:33-36).
우리는 보통 ‘하나님’ 그러면 성부 하나님이라 생각하고 ‘주님’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합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히브리어로 하나님이라고 쓰는 것을 주라고 합니다. 그래서 헬라어로 주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주님’ 그러면 그리스도는 히브리어의 메시아란 단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이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고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왕이 되거나 제사장이 되거나 선지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공식적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사역하는 자라는 신분의 표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큰 일을 맡아 가지고 오신 분입니다. 이런 측면에서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종으로서 쓰임을 받기 위하여 오셨지만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 그럴 때에는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대속물이 되시고 우리를 대속하시는 제사장으로 오셔서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고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시기 위한 제사장으로 하나님 앞에 섰지만 그분이 또한 하나님인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이렇게만 써 먹지만 말라는 말입니다. 무엇을 얻게 해 주는 주문, 대가로만 취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화 구경하기 위하여 몰래 얻어 낸 극장표, 열려라 참깨가 아닙니다. 우리가 경배해야 될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성경이 이야기하는 바는 무엇이냐 할 때 ‘그분이 하나님이시다. 주님이시다. 그런데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다’ 그것입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3:37-38).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러니까 죄사함을 받는 것 구원을 얻는 것은 지금 이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결국 내가 예수님밖에, 하나님밖에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소유로 들어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선택해서 하나님 소유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피로 값주고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는 말은 “그의 소유가 되라”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설명하는 성경적 표현법이란 말입니다.
요즈음 식으로 잠이 안 오십니까? 예수를 믿으십시오. 사업에 실패하셨습니까? 예수를 믿으십시오. 슬픔과 비탄에 젖어 있습니까? 그러면 예수를 믿으십시오도 맞습니다. 틀림없이 예수를 믿으면 우리에게 행복이 있고 영원한 확신이 생기며 영생에 대한 소망이 생깁니다. 그러나 성경이 설명하려고 하는 복음의 복음 된 가장 중요한 요소들은 기쁨과 감격이 우선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수적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이냐?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버려졌던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이 하시고 그의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여기가 중요한 대목입니다. 내가 기쁘면 하나님도 좋아 보이고 내가 슬프면 하나님이 미워 보이는 식으로 복음을 이해하지 말아 달라는 말입니다. 내가 성공하면 하나님이 복 준 것 같고 내가 어려움에 처하면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셨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성경이 설명하는 복음의 ABC가 아닙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로마서에서 배우는 복음입니다.
다시 본문에 오시면 베드로의 설교에 나타났던 복음의 핵심과 일관된 표현이 다시 등장합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니라 그로 말미암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롬 1:2-6).
무엇이 복음입니까? 그의 소유가 된 것,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 것, 그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복음이라는 것을 행복이니 기쁨이니 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된 것을 성경이 어떤 차원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강조하는가? 믿지 않은 것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대표적으로 무엇과 대조시키고 있는가 하는 것을 성경상에서 찾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그 대조가 왜 우리에게 복된 것이 되는가를 봄으로써 복음을 성경적으로 한번 정립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10).
지금 8절, 9절에 있는 말은 복음에 대하여 우리가 두 번째로 생각했던 것과 같이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하나님쪽의 주도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도권 속에는 첫 번째 살펴본 하나님의 존재라는 것이 이미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은 결국 우주만물의 존재 중에 인간이 최고냐, 인간이 전부냐라는 싸움과 인간 말고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있느냐는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의 싸움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관문이 됩니다. 그런데 이 두 대조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 때는 2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라는 불순종이 이 세상 삶의 가장 두드러진 원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3절에 있는 바와 같이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모든 가치와 모든 결정의 궁극적 권위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바로 이것과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소유입니다. 우리의 최고 권위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혹은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 신앙이 불신앙과 대조될 때 불신앙이란 자기가 결정권을 가지는 것이고 신앙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이라는 말은 권위 아래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 아닙니까? 물론 그것이 왜 복음이냐 하는 것은 조금 있다 설명하겠습니다. 이 대조를 잊지 마십시오. 신앙이란 무어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어냐 그럴 때 이제는 더 이상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며 내 인생과 어떤 사람의 원리와 목표를 내가 스스로 결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결정과 하나님의 요구 아래 있기로 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 행하게 하려하심이니라”(엡 2:10). 우리가 자신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 된다는 것이 왜 복음이냐 하는 것은 여기 나오는 바와 같이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고 그 안에서 행하도록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왜 복음이냐를 이렇게 설명합시다. 우리가 이 문제를 설명하는데 제일 도움이 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톰소여와 허클베리 핀입니다. 톰소여가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이 허클베리 핀입니다. 그는 아무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가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자기가 자고 싶을 때 자고, 자기가 놀고 싶을 때 놀고 게으름을 피우고 싶을 때 피우면 됩니다. 그러나 톰소여는 무엇이 불편합니까? 원치 않는 일을 해야 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되고 학교를 가야 되고 세수를 해야 되고 밥 먹을 때 잔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사람은 그런 일에 제약받는 것을 무척 싫어합니다. 학교에 간다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디를 갈 때 어떤 예의를 지켜야 된다, 교양을 지켜야 된다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의 영광입니다. 학교를 간다는 것은 복입니다. 학교를 못 가고 놀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안 다닌다는 것에 비하여 여러 가지 구속과 어려움을 감수해야 되는 것인 만큼 손해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자유라는 것은 무척 오해되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은 훈련이 되지 않았다고 하고 방종이라고 그럽니다. 방종이란 무어냐 하면 그가 하는 일들이 가치있는 목표를 향하여 일관되지 않은 행위일 때 그것을 방종이라고 그럽니다. 우리가 여기서 부산을 간다고 그러면 아무리 느리게 가고 가다가다 아무리 쉬어도 남쪽을 향해서 가면 그것은 일단 목적지를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 됩니다. 하루에 세 걸음 가고 쉬었다 가도 세 걸음만큼은 부산을 향하여 진전을 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하루에 몇십 킬로씩 가도 그것이 동으로 갔다 북으로 갔다 서로 갔다 하는 것이면 분주했지만 하나도 목적지를 향해 진전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방종이고 허황된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를 모르는, 즉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모든 삶이 왜 허무하냐 그러면 그가 부지런하지 않기 때문도 아니고 불성실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가 가치있는 목표를 세울 수 없고 가치있는 목표를 향하여 쌓아지는 일로 하루하루를 연결해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지런히 살며 남보다 더 악착스럽게 사는데 그 모든 것이 어떤 목적지를 향하여 그를 진전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것도 희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못해도 됐다, 됐다하는 부모는 좋은 부모가 아닙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 그의 소유가 되었다라고 하는 것이 왜 복음이냐 하면 우리는 비로소 이제 영원한, 가치있는 목표를 갖게 되었고 그 길로 나갈 수 있게 되었고 그 길에 우리를 실패시키지 않게끔 방종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는 우리 보호자를 만났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이란 무어라구요? 여러분이 놀고 싶을 때 놀게 하고 여러분이 하고 싶은 것을 다 들어 주고 하는 것이 복음이 아니라 여러분을 이제는 영원한 가치와 필요한 일을 위하여 간섭하는 손길 속에, 그리고 그 길에서 여러분이 실패되지 않도록 여러분을 붙들고 계시는 전능하신, 그리고 성실하신 뜻에서 구원은 복음인 것입니다.
조금 더 진전해 봅시다. 에베소서 4:17입니다. 불신자와 신자의 삶 중 성경이 어느 쪽을 더 강조해서 이야기하는가를 잘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어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으로 행하되”(엡 4:17-19).
이것이 바로 불신자의 삶입니다. 불신자의 삶에 대표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모든 일을 결정권자입니다. 자기가 목표를 세우고 자기가 방법을 세우고 그 일을 하기도 했다, 말기도 했다 합니다. 그런 하나님을 모르는 자의 목표와 방법이 무엇입니까? 허망하고 헛된 것을 구하고 참다운 것이 아닌, 가치가 없는 것을 목표로 세웁니다. 그리고 무지하고 마음이 완악합니다. 한번 고집을 부리면 틀린 것을 알고도 고집을 부립니다. 그러나 이제 믿고 나면 무엇이 달라지는지 20절을 보십시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 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5:20-24).
무엇이 다릅니까? 하나님 안에서 의와 거룩과 진리로 살고 그 마지막엔 영광 된 자리에까지 들어가게 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 있다, 주의 것이 되었다,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이 왜 복음인지 우리식으로 이야기해서 ‘학교 다니게 되었다’ 그런 겁니다. 좋은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무엇이 이익입니까? 열심히 공부를 해야 된다는 겁니다. 좋은 학교란 돈을 조금 받아서 좋은 학교가 아니고 가르치는 것이 실력이 있어야 됩니다. 열심히 가르치고 학생들이 게으름 피우지 못하게 단단히 붙들어 두는 학교가 좋은 학교입니다. 그리고 그런 학교를 다니는 것을 영광으로 압니다. 서울대학교 뱃지를 달았으면 왜 못생겼어도 모두가 쳐주고, 서울대학교 뱃지를 달면 얼굴이 달라 보인다는 것 아닙니까? 머리가 부시시하면 “봐라 저런 것은 관심을 두지 않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 아니냐”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머리 잘 빗고 옷을 잘 입으면 “봐라 공부를 잘하니까 저렇게 단정하지 않느냐.” 뭐든지 갖다 부칩니다. 신앙이란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알게 되고 그 안에서 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은 이제 뒤집어도 바로 놓아도 어떻게 놓아도 여러분은 바른 길로 들어선 특권 속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에베소서 5:3에는 이 문제를 조금 더 진전시켜 놓고 있습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엡 5:3-5).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 누추함, 어리석은 말, 희롱 이런 것을 하는 자들은 기업을 얻지 못한다, 이런 말을 하면 천당 못 간다, 이런 뜻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복음의 시각을 갖지 못하면 이 본문은 오해하기 꼭 좋게 되어 있습니다. 즉 희롱하는 말이나 탐욕이나 누추함이나 어리석은 말 같은 것은 우리가 이제 하나님 안에 부름을 받고 약속되어 있는 그 복된 자리로 가는 길을 진척시키는 데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성령을 좇는 것과 육체를 좇는 것은 늘 동시에 되지 않습니다. 내가 오락실에 가서 논 시간을 시간에서 빼고 공부하기로 결심하다고 해서 새로 12시간이 생기지 않습니다. 12시간의 여유 중에서 오락실에 가서 6시간 놀면 공부할 시간은 6시간밖에 남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보통 60-70년이라 볼 때 그 중 여러분이 세상을 향하여 나가며 여기 기록된 것같이 무슨 더러운 일이냐 욕심을 낸 것들은 그 시간 속에서 손해 본 시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허락된 시간은 영광된 목표를 향하여 진척시키는 우리의 발걸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은 한 번 얻어진 다음에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한 것이고 하나님의 열심과 그의 성실함과 능력으로 지켜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빼앗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허락된 이 길을 우리가 얼마나 더 깊이, 더 많이 더 풍성히 가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싸움입니다. 그럼 신자를 어떻게 권면하느냐? 8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9).
‘왜 착하게 살아야 하느냐’ 이것은 도덕과 윤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부름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훌륭함을 위하여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가 열심히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5-17).
신자가 꼭 기억해야 될 것은 이것입니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 우리가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노력하는가를 제발 좀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기억하면 헛된 것을 할 수 없습니다. 지금 부산으로 가야 되는데 백운데는 왜 갔다가 가느냐 말입니다. 백운대는 북쪽에 있는데 기왕 꼭 산에 가고 싶으면 관악산을 가야죠. 이것이 신자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거룩한 것을 요구하고 세상적인 것을 절제하라는 것을 말하는 이유는 우리의 영광이 무엇이며 우리의 목적지가 무엇이며 무엇이 우리의 유익인가 하는 시점에서,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는가 하는 시점에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름받은 복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의 소유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되느냐, 주를 믿었으니 마땅히 이 정도는 해야지, 그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신자 된 복이고 그것을 누리는 것입니다. 거룩과 진실함으로 진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궁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협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2-17).
우리가 누구의 소속이며 누구의 것이며 누구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신분이냐를 알고 거기에 맞는 자로 살아라.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이 너희에게 복이다. 이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는 중요한 기초 중의 하나닙니다. 우리에게 순종이 요구되고 있고 하나님의 뜻을 살필 것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 책임입니다만 그 책임은 복된 책임입니다. “공부 열심히 해라. 그래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 이 말이 학교 다닐 때 최고로 듣기 싫었던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말보다 더 진리가 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입니다. 열심히 주를 섬기시고 그를 따르시고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고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을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의 책임이고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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