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영선목사

로마서 1강(롬 1:1-7), 복음이란 / 박영선 목사

새벽지기1 2016. 1. 28. 07:10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라노라”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 4권이 있고 그 다음에 어떻게 이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되었는가 하는 사도행전이 있으며 그 후에 서신서들로 되어 있습니다. 그 서신서들 중에 로마서가 처음에 있는 이유는 제일 길기 때문이거나 제일 먼저 기록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경을 편집할 때 로마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서신서의 맨 앞부분에 로마서를 편집한 것입니다. 로마서가 다른 서신서에 비해서 더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내용과 다루는 부분의 포괄성, 균형성, 이런 데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서,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서 등은 바울이 자기가 세운 교회에 어떤 문제가 있음을 듣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또는 어떤 문제를 권면하기 위하여 쓴 서신서들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서신서들은 일단 바울이 자기가 세운 교회에서 복음에 대한 모든 것들을 전하고 그 중에 문제가 됐던 어느 부분을 다루고 있다면 로마서는 전혀 상황이 다르게, 바울이 세우지 않은 교회 교인들을 향하여 쓴 서신서입니다.

 

로마는 당시 이교도의 수도이고 전 이방의 대표적 이름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르며, 모세를 부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을 모르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안에 있는 복음에 관한 소개와 기독교인이 지켜야 하는 내용들은 그런 의미에서 복음에 관한 전체적인 시각 그리고 균형감각 속에서의 중요한 부분들을 살펴 보기에 적절한 서신서가 되었습니다. 로마서에서 설명하는 복음에 관한 설명을 이해하는 것은 신앙인들이 알아야 하고 지켜야 하는데 우선 필요한 것입니다.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균형감각인 것 같습니다. 1:11에는 이 글을 쓰는 대표적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1:11). 여기서 신령한 은사란 무엇이냐 하면 복음입니다. 이것을 은사라고 설명합니다. 은사란, 말 그대로 은혜로 베풀어 주는 것, 공짜로 주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이해의 균형감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우리 한국교회는 별로 그렇게 좋은 곳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의외로 복음과 구원 자체는 은사로 생각지 않고 구원을 얻은 이후에 덧붙여 주시는 어떤 특별한 다른 선물을 계산하기 일쑤입니다. 방언이라든가 신유의 은사라든가 환상을 본다든가 특별한 어떤 체험을 한다든가 하는 것을 은사로 생각하지,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것 자체를 은사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그리고 로마서에서 강조하는 것은 이 복음이라는 것,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은사로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는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서신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복음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 복된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글을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 썼을 때 사도 바울이 기록한 이런 표현들은 상당히 충격적인 것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은 조금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은사이며 충격적입니다.

 

왜 충격적이냐 하면 원래 인간이란 그 사고방식에 있어서 어떤 신이 있다고 믿지 않는 족속들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휴머니즘이라고 합니다. 휴머니즘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우리말로는 적당한 번역을 할 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우리말로 ‘인간애’라는 말로 많이 씁니다만 그것은 휴머니즘이라고 보통 쓰는 용어의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영화 광고에 나오는 ‘넘치는 휴머니즘’ 그럴 때 휴머니즘은 인간애입니다. 짐승과 다른 인간의 고급한 어떤 정신력, 도덕성, 인간미 넘치는 어떤 긍휼과 남을 위하는 사랑 이런 것을 휴머니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학적인 용어로 휴머니즘이란 전혀 다른 용어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고 전가치체계를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고 인간을 최고의 권위로 놓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휴머니즘이라고 합니다. 바로 그 휴머니즘밖에 없는 사고와 사상체계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우리가 믿는 이 기독교를 선언할 때 ‘우리가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복음을 설명할  이 복음이 복음 된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이것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식으로 복음을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이 너희를 구원으로 초대하고 있다고 설명한다는 사실입니다. 뭐가 다르냐 하면 인간이 휴머니즘이라는 사고체계 속에 있으면 구원이라는 문제는 의를 찾는 것입니다. 완전한 의를 찾는 작업, 철학이든 도덕이든 완전한 의를 찾아 나가는 가장 고급한 목표요, 종교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해야 인간이 의로워지는가, 어떻게 해야 사람이 사람다운가? 이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이 갖는 종교요 윤리요 도덕이요 사상이요 인간 된 가치라고 설명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설명을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는가”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결국 휴머니즘적 사고방식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하여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아니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세계를 향하여 이 복음을 말 할 때 이것이 왜 복음이냐, 구원은 너희가 무엇을 하여야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것이다. 즉 어떻게 구원을 얻는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을 베풀었느냐를 설명하고 그것을 목표를 하여 쓴 서신이 로마서인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다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느냐와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을 베풀었느냐의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느냐 하면 한쪽은 앞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사고방식과 모든 정신체계의 궁극적인 권위가 인간 자신인 것과 모든 사고체계와 모든 존재의 최고 권위에 하나님이 계신 것과의 차이입니다.


영원하시고 전능하시고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상과 인간이 최고라는 사상 사이의 이 넘을 수 없는 체계가 두 사상체계 사이의 대립되는 개념으로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우리 모든 신자에게까지도 종종 틀리기 쉬운 문제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가 로마서를 배우면서 특별히 사도 바울의 강조함을 따라서 분명하게 우리 신앙의 근거로써 깔아 놓아야 됩니다.

 

그래서 로마서가 하려는 작업이 무엇이냐 하면 “복음이 무어냐”,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것이다. 그래서 복음이다”라는 것입니다. 16절에 가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16)

 

이것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구원이라는 것은 어떻게 구원을 얻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이 구원을 베풀었느냐입니다. 그래서 복음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1-5).

 

고린도 교회에 가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지금식으로 이야기하면 설교했을 때, 설교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떤 도리를 설명하는 것이라는 개념이 훨씬 일차적으로 떠오릅니다. 그러나 영어로 이야기할 때 설교(preaching)라는 것은 라틴어의 어원이 ‘설득’, 아니면 ‘공포’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너희에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셨다는 것을 선포하러 왔지 “이것이 구원이다. 이것이 좋은 거다”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좋은 약이니 하나씩 사 먹으라는 식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오늘날 예수를 믿었다는 개념이 훨씬 많습니다. 난 믿었다. 난 선택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은 그런 의미에서는 복음이 되지 못합니다. 내가 믿은 것이 복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 죄인이요 다 양 같아서 자기 길로 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대사면령을 내리고 복귀를 선언한 것입니다. “내가 너희의 죄값을 묻지 않겠다. 너희를 처단치 않겠다. 너희를 용서하겠다. 다 집으로 돌아오라.” 그것입니다. 집으로 돌아오라는 것은 죄가 다 사하여졌고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인정했기 때문에 떨어진 명령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집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은 것이지 돌아왔기 때문에 용서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어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것입니다. 마치 어떤 나라에 왕을 배반하고 도망가서 살고 있는 나쁜 사람들의 마을에 왕의 사자가 와서 포고문을 읽는 것과 같습니다. “왕께서 이번에 득남하신 기념으로 여러분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기로 했으니 앞으로는 죄 짓지 말고 충성된 백성으로 살아라.” 이렇게 공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런 식의 표현은 성경에 참으로 많이 등장합니다.

 

사도행전 2:38로 가보십시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2:38-39).

 

‘회개하고 구원을 얻으라’ 이것을 누구에게 주었다구요?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그러니까 구원의 시작, 구원의 역동성, 그 능력의 출발과 그 효력이 누구의 손에 달려 있느냐 하면 반응자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시행하시고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교도들에게 무척 놀라운 일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있고 인간이 전부인 줄 알고 있는데 하나님이 갑자기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의가 무어냐 구언이 무어냐 복이 무어냐 하는, 우리가 무엇을 하는 작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속에는 하나님의 존재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 된 것, 이 관계가 일차적으로 정리되지 않고는 복음 구실을 못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신앙의 최고 취약점이 무엇이냐고 할 때는 언제나 우리가 얻고, 우리가 약속받은 것들의 근거를 자신 안에서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언제나 우리의 신앙은 흔들립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게을리했거나 어떤 죄를 지었거나 혹은 어떤 실패를 맛보면 우리는 갑자기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의심하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의심하게 됩니다. 가장 기초적인 것이 흔들리는 한 그 위에 무엇을 쌓아 나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신자의 신앙이 약한 가장 큰 이유는 자주 지진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지진이 일어나는 땅 위에다 건물을 지을 수는 없습니다. 지반이 튼튼해야 2층을 짓든 20층을 짓든 200층을 짓든 건물을 지을 것 아닙니까?

 

강한 신앙은 결국 좋은 기초 위에만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읽었던 본문 로마서 1장에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너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느냐, 너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 할 때도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1:6-7)

 

부르심을 입었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구원의 주도권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구원 문제에 관한 한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나 같은 것을 부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찬송이 있습니다.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이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 같은 것을 부르셨는지 너무나 놀라운 것입니다. 아무런 조건도 없을 뿐 아니라 최악의 상태에 있는 자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 너무 크고 그 은혜와 사랑의 약속이 너무 영광된 것입니다. 받을 만하지 못한 자에게 그것이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아는 그 찬송가 제목이 Amazing Grace입니다. 그래서 복음이라고 합니다.

 

공부 잘하는 사람은 붙고 공부 못하는 사람은 떨어졌다는 그런 것을 복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떨어져 마땅한 자를 붙여주고 장학금도 준다가 복음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복음 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된 소식이라는 말에 복됨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자기의 믿음과 신앙에 대하여 전전긍긍하는 곳으로 자기도 모르게 쉽게 떠밀려 내려가고 맙니다.

 

신앙을 확인하는 방법 중에서 과연 나에게 복음이 복된 소식인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서에서는 바로 복음이 무엇이냐를 설명하는 중에 지금 말씀드린 이것과 함꼐 한 가지 더 중요한 부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구원의 교리가,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얻은 바 이 구원이 그리스도인의 미래 전체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이 복음된 가치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죄인 된 우리에게 선물로 주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영원한 우리의 영광 된 운명으로 결정된다는 데에 복음이 복음 된 가치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잊지 마십시오, 나 같은 것을 구원해 주신 것이 하나님의 구원일 뿐만 아니라 그 구원이 절대 취소되거나 약화되지 않고 다른 것으로 방해되지 않고 영광 된  열매를 맺고야만다는 데에 이 구원의 복음 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절대 취소되지 않습니다. 방해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구원한 그의 자녀들을 어떻게 영광 된 자리에 앉히시고 말 것인가 하는 것, 그것이 로마서를 쓰게 된 동기이고 모든 신자에게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두가지를 이제 분명하게 하나의 결론으로 확인하려고 합니다. 구원은 내가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 운명은 누구도 방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5:8).

 

우리에게 허락된 이 구원은 왜 취소되지 않느냐 하면 하나님이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쪽에서 조건을 갖고 하셨지 내 쪽에다 조건을 묻지 않고 하셨다는 말입니다. 이 구원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즉 가장 최악의 조건 속에서 얻어진 구원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는 것은 보통 어느 때조? ‘내가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큰 죄를 졌는데도 하나님이 내 편이란 말인가?’ 그것이 우리를 흔듭니다. 그것이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입니다. 그때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자책감, 내가 이렇게 죄를 지었는데도 불구하고라는 것은 그 전에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라는 것에 비교하면 무척 괜찮은 상태입니다. 그때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을 상태입니다. 그때 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분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하물며 지금이겠습니까? 이것이 로마서에서 우리에게 밝히려고 하는 중요한 복음의 성경입니다.

 

두 번째로 기억할 것은 이 복음의 방식상 우리는 우리가 얻은 구원을 취소받지 않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8:9-11).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셨던 방법이 어떤 방법이냐 하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도 함께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부활과 함께 우리도 함께 부활시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할 수 있는 이유가 그 안에 주의 영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주의 영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지 못합니다. 성경식으로 표현할 때 나는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사는 자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으며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는 자입니다. 신자는 더 이상 자기 혼자가 아닙니다. 나를 건드리는 자는 주를 건드리는 것입니다. 바울이 회심히가 전에 예수 믿는 자를 핍박했고 하나님을 편든답시고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였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 앞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셨을 때 무어라고 꾸짖으셨습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나를 믿는 자를 핍박하느냐가 아니라 나를 핍박하느냐는 이것이 구원의 방식입니다.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닙니다. 나는 나 혼자가 아닙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십니다. 내가 지옥에 가면 주님이 따라 가셔야 될 지경인 것입니다. 주께서 하늘 나라에 계시면 우리도 거기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과 함께 하늘 보좌에 있습니다. 우리의 신분과 영원한 운명이 말입니다. 이것을 방해할 자가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 속에 포함되어 있는 성격입니다.

 

복음은 그런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자는 아직도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잘 아시는 요한일서의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여쓴니라”(요일 4:18).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두려워하는 자는 아직 복음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시인하는 것이 갖는 가치를 모르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두려움을 몰아내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예수를 믿습니다.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오늘날 신자의 가장 큰 약점이 무어냐 그럴 때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을 스스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누가 이렇게 물을 수는 있습니다. “야 너 따위 것이..., “니 까짓 것이...” 이럴 때 분명히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내 까짓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래서 앞에서 말 씀드린 바와 같이 Amazing Grace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다가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사랑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이 복음이 복음 된 사실이 우리의 운명으로 고정된 방식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8:14).

 

성령께서 우리를 지키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지키시기 때문에 아무도 우리를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고 방해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비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심이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8:26-28).

 

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죠? 성령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자들도 실패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도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편을 들지 않는 사람들은 오히려 잘되는 것이 망하는 것이 됩니다. 부자라서 나빠지고 또 거꾸로 가난해지고 실패하면 실패해서 막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실패하면 실패해서 약이 되는 것입니다. 잘되면 잘된 것이 약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같은 사건을 보고 어떻게 이해하고 그것으로 본인이 어떤 영양소로 습득하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천차만별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유익하게 이해하고 각성하며 습득하도록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못가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내고 그렇게 하시기까지 우리를 채찍질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 안에 감추어져 있는 모든 특권들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디로 가야 하느냐 하면 복음이 무어냐, 이것을 허락하신 이가 이 일을 이루시고야 말 것이라는 그분의 의지력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강약은 무엇으로 말미암은 것이냐면 우리에게 허락된 것이 얼마나 굉장한 것이며 이것을 허락하신 이가 누구냐를 아는 싸움입니다. 그분의 의지를 이해하는 것만큼 신자의 신앙은 커집니다.

 

그것을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8:35).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8:37-39).

 

이것이 로마서를 쓰게 된 사도 바울의 깊은 뜻입니다. 그리고 모든 신자가 분명히 알기를 원하고 그의 신앙의 가장 큰 기초로 놓기를 원하는 성경의 주장입니다. 이 근거가 흔들리면 아무것도 그 위에 쌓지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연약함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우리에게 허락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허락한 것을 이루실 하나님의 능력과 우리를 향한 변치않는 사랑과 그 집념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실패하면 하나님도 실패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연약하면 하나님도 연약한 것으로 생각하고 우리가 하나님께 불성실하면 주님도 우리와 관계를 끊는다고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혼자 울고 불고 삐치고 도와 달라고 그러다가 좋은 시간들을 다 놓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복음을 복음 되게 간직합시다. 그것은 정말 복된 소식입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시며 모든 좋은 것으로 허락하셔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거기에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우리가 쓸데없이 무엇인가 더 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허락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자 된 것을 감사할 줄 알기로 합시다. 그리고 신자다운 싸움을 이제 시작하셔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운명을 영광 된 자리에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요구합니다. 신자답게 사십시오. 구원을 얻기 위하여 의롭게 살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신자가 되었은즉,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으 받았으니 의롭게 사십시오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이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을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12:1-2).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너희의 영원한 운명이 하나님 앞에 있으니 그분의 기뻐하심을 따라 살아라’입니다. 조건이 아닙니다. 구원은 조건이 아닙니다. 구원을 얻었으므로 요구되는 우리의 권리입니다. 우리의 우리 된 신분이요 마땅한 특권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하나님의 허락하신 은혜 안에서 굳게 하시고 성실히 신자 된 삶을 누리셔서 세상의 헛된 유혹과 시험에 지지 마시고 여러분의 인생을 낭비하지 마시고 신자 된 삶으로 열매맺는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누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