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영선목사

로마서 2강(롬 1:1~2), 하나님의 복음/ 박영선목사

새벽지기1 2016. 1. 31. 06:15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로마서에서 기록된 내용은 이스라엘에 국한되었던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그 신앙이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이방인에게 설명되어지는 것이라는 근본적인 시각을 가지고 이해하여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서신서는 기독교의 복음이라는 내용에 관하여 그 어느 서신서보다도 정확하게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 복음을 제대로 추적해 보면 신앙에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뜻밖에 보통 신자들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즘 들어서 특히 기독교 신앙은 너무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적이라서 틀릴 것은 없습니다. 또 틀릴 것이 없다는 것 자체가 좀 우습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본문에 보시면 복음이 일차적으로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1:1-2).

 

우리가 복음을 성부 하나님 중심적으로 생각하느냐 성자 예수님 중심적으로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의 신앙의 색깔을 굉장히 차이나게 합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같은 하나님이지만 구별된 분입니다. 성경에서 한 하나님이라고 그럴 때는 권위와 능력이 동등하시다는 의미에서 하나라고 그러지 숫자적인 개념의 하나라는 것은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다른 분들입니다. 그 세 분은 한 분이 이런저런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만은 분명합니다. 그 이상은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성경이 그 이상의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즉 성자 하나님을 중심적으로 한 신앙을 가지면 신앙이 자꾸 감상적인 형태를 띠게 됩니다. 원래 성부 하나님은 노하시기를 잘 하시고 벌 주기를 기뻐하시는 공포의 하나님이고 성자 하나님은 그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시고 우리를 치마폭에 감싸주시는 어머니와 같은 분이라는, 분위기상 그렇게 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교회 역사상 구약의 하나님은 전쟁의 하나님, 진노의 하나님, 공포의 하나님, 신약의 하나님은 그 독재자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을 구해 낸 구세주, 이렇게 구별한 이단운동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 중심적으로 신앙을 가질 때 그 신앙이 이런 식의 분위기를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골고다 길을 십자가를 지고 한발한발 올라가시는 예수님, 눈물이 글썽글썽해 가지고 ‘성자의 귀한 몸 날 위하여’ 이런 찬송을 부르며 눈물 흘리고, 이런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의 감동과 이해 속에 감정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된다면 난처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로마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복음을 설명할 때 가장 굵고 중요한 근거로서 제시하는 것은 성부 하나님의 주권성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은 예수님이 주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그 일을 즐겨, 성부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시고 기쁘게 순종하셔서 대속 제물로 오신 것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과소평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성경은 복음에 관한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근거입니다.

 

우리는 ‘복음’그러면 눈물이 앞을 가리는 무슨 신파배우들 같습니다.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회개, 눈물 이런 것의 시작은 아닙니다. ‘구원’ 그러면 높으신 하나님, 온 천하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가장 크고 놀랍고 영광스러운 그리고 열심 있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으로 가 보십시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후에 제자들이 다 도망갔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입니다. “그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픔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여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된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13-23).

 

제자들이 와서 실망한 고백이 무어냐 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인 줄 알았는데 안 그렇더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인 줄 기대했던 것과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대속 사역을 이루신 것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는 것 아닙니까? 제자들이 기대했던 것과 같이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일하심에 관한 기대가 하나님의 약속과 다른 우리 나름대로의 생각이라는 것을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을 우리 마음대로 상상하고 우리 혼자 정하고 기대해 놓고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슬퍼합니다. 그리고 성경이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는 것을 혼자서 기대하고 배신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주님의 답변을 잘 보십시오.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4:25-26).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언제 너희를 구원하실 때에 너희가 하는 식으로 하겠다고 했느냐! 하나님이 너희를 구원키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내어 너희 죄를 대속케 하기 위하여 그를 죽여 너희 죄값을 그들에게 지우기로 하지 않았느냐!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지 않았느냐! 도대체 너희가 무엇 때문에 이것을 모르느냐! 왜 너희들 마음대로 생각하느냐?

 

복음을 말할 때 기억할 것은 내용 이전에 하나님이 정하시고 계획 하신대로 수행하고 있다는 하나님의 주도권입니다. 하나님의 주도권, 하나님의 근거되심 이것을 놓치고는 믿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장 잘못된 신앙의 실패는 우리가 신앙이라고 믿는 것들이 성경에 약속된,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약속하신 것과 동떨어진 내 상상과 내 기대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혼자서 넘어지고 비탄에 빠진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 시대에 있으면서 성경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것을 정말 “찬송하리로다”라고 맞이했어야 할 사건이 아닙니까? 주님이 무어라고 그러면서 운명하십니까 “다 이루었도다”입니다. 오늘날도 똑같이 이 신앙을 성경적인 신앙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소유하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자기 기분에, 자기 필요에 의한 신앙을 설정하고 혼자서 실망하고 울고 불고, 한탄하고 그리고 도망가고 그러는 셈입니다. 같은 누가복음 24:44을 보시면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 나타나셔서 다시 한 번 이렇게 강조합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24:44-48).

 

강조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죽기 전에도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느냐” 그것입니다. “내가 우연히 하려던 어떤 일이 실패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약속대로 계획대로 된 일이 아니냐 내가 같이 있을 때 이것을 가르치지 않았느냐? 죽으로 왔다고 하지 않았느냐? 나는 대접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나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러 왔다고 내가 분명히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내가 약속대로 죽었고 약속대로 살아나지 않았느냐?” 구원과 회개는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느니”( 24:47)에서와 같은 것입니다.

 

대개 구원 얻는 것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의 결실입니다. 49절을 봅시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24:49).

사도행전 1:8의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온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1:8).

우리는 성령을 받는 문제도 우리가 먼저 구원을 받아서 이제 주를 위하여 무엇을 보답할까, 그리고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우리가 성령을 받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좀 조심해서 들으십시오.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되는 것은 우리쪽이 아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쪽이 아쉬운 것입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좀 우습습니다만 여러분의 이해부족 때문에 할 수 없이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쪽의 집념이고 열심입니다. 성령을 부어주시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쪽에서 그의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갖고 계신 그분의 깊은 목표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 일을 해야 할 책임과 빚을 지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일은 우리를 위한 것이고 우리에게는 아무런 능력과 조건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무한하신 은혜와 긍휼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 일이 시행되었고 그리고 지금까지 시행되고 있고 장차 완성될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그러면 기억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 안에 있는 우리의 구원, 우리의 기쁨, 우리의 영원한 천국과 기업 이것만이 아니라 온 천하만물을 지으시고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는 이가 세상과 역사의 가장 중요한 프로그램을 무엇으로 갖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전파입니다. 세상 역사라는 것은 문명이나 문화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슨 그리스문명, 영국문명,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 즉 아리스토텔레스, 세익스피어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이 역사의 주인공은 아닙니다.

 

역사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 그의 아들을 보내사 모든 인류를 하나님께서 은혜와 긍휼 속으로 부르신 이 구원 역사를 위해서 존재합니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그 나라의 군사력이나 정치력이나 경제적 측면에서 찾으면 안됩니다. 복음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 민족을 따로 불러서 심은 모판을 이제 모내기하는 작업입니다. 그 나라를 멸망시켜서 그것이 하나의 민족주의 속에 파묻혀 있는 이 기독교 신앙을 전세게에 퍼뜨리기 위하여 그 나라를 멸망시킵니다. 로마의 흥망은 그 모내기를 하기 위한 경운기입니다. 로마를 통하여 전세계에 복음이 전파됩니다.

 

19C에 이르러서 구라파 열강들이 전세계를 식민지로 하고 식민지 정책을 폈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모든 나라에서 수탈을 했습니다. 어느 나라를 식민지로 삼고 그 나라의 모든 좋은 것들을 다 빼앗아 갔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 그 나라가 영원무궁토록 잘 먹고 잘 살지는 않았습니다. 해 지는 시간이 없는 영국이 이미 거렁뱅이가 된 지 오래 되었고 미국도 지금 깡통차기가 일보직전입니다.

 

모든 나라는 복음과 연결되어서 성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우리가 알아야 하냐면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이 역사와 국가, 인류, 아니 한 인간, 개인의 존재와 인생과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시대와 국가, 아니 전역사가 이것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움직이고 계시고 그 일을 추진하는 한, 복음 속에는 모든 안전 보장이 되어 있는 셈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안녕을 위하여 우리 나라가 잘되고 그래서 이번에 중동전쟁이 안 터져야 되고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신앙적으로 별로 바람직한 생각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가 못살게 된다고 해서 여러분 개인의 영혼에 무슨 손해를 입을 것도 없고 우리 나라 경제가 부흥한다고 해서 여러분 영혼이 그것으로 인하여 이익을 볼 것도 없습니다. 한 나라가 잘 사느냐 못사느냐, 전쟁을 하느냐 평화를 갖느냐 하는 것을 복음과 무관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역사를 움직이거나 역사의 핵심되는 줄거리는 아닙니다. 모두가 들러리입니다. 모두가 엑스트라들입니다.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요 그것을 믿고 추종하는 자뿐입니다. 이것이 역사의 핵심 되는 줄거리입니다.

 

세계 역사는 부시 대통령이나 고르바쵸프가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으로 인하여 여러분의 신앙이 좋았다, 나빴다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개인의 기분이 좋은 것으로 인하여 신앙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개인 기분이 저하된다고 해서 하나님의 열심히 식는 것도 아니며 한 나라가 공산화된다고 해서 복음이 끊기는 것도 아니고 한 나라가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다고 해서 그 나라의 영적 부흥이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이 흘러가는 것과 세상에서 관심을 두는 것과 실제로 역사의 줄거리가 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세상에 일어나는 일로 인하여 여러분의 신앙이 흔들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신앙이 흔들릴 것은 없습니다.

 

마태복음 11장으로 가 보십시다. 성경에 이미 이와 똑같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 11:2-3).

세례 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당신이 메시아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척 아이러니컬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그의 존재 자체, 그의 탄생 자체가 저 분이 메시아다 하는 것 때문에 탄생한 것입니다. 요한은 자기를 배고 있던 어머니 엘리사벳이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된 마리아의 방문을 받았을 때 기뻐서 복 중에서 뛰놀았다고 합니다. 영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성경적으로 인류 역사상 세례 요한보다 영적으로 뛰어난 자는 없습니다. 철들기 전에, 그 정도가 아닙니다. 젖 떼기 전에, 그 정도도 아닙니다. 복 중에서 이미 영적인 은사와 조명을 갖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만났을 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라고 증거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세례를 주는 특권을 부여받았던 자입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감옥에 갇혀서 제자들이 전해 주는 소식, “예수님이 이러이러한 일을 합니다”라는 이야기, 그 이야기가 무어냐 하면 누구 집에 가서 식사했다는 이야기가 제일 많습니다. 세례 마태네 집에 가서 식사하고 마르다네 집에 가서 식사하고 가나 혼인 잔치에 가서 식사하고 맨 쓸데없는 것만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고 산에서 설교하시다가 떡을 나누어 주시고 맨 그런 것만 하시는 겁니다. 요한쪽에서 보면 메시아가 무엇을 하리라고 기대했던 것입니까? 이 나라를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민족적으로 다시 한번 세워서 다시 한번 신성국가를 완성하시고 하나님을 반대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혔던 로마를 물리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아무런 준비가 보이지 않습니다. 요한이 그래서 헷갈린 것입니다. “당신이 오실 그이가 맞습니까” 예수님이 대답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11:4-5). 메시아의 사역을 충분히 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기대한 것은 무엇입니까? 비밀 결사를 만들고 정치적인 지위를 얻고 이스라엘 민족들, 백성들 앞에 추앙을 받고 그를 정점으로 하여 다시 한번의 민족적인 재결합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안 하고 논쟁만 벌이고 더 도망다니고 숨어 버립니다.

 

우리가 보는 인생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또 우리가 예수를 믿고 기도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 나라 국민의 사분의 일이 신자라는데 얼마 신자가 있지도 않은 일본에게 왜 밤낮 지는가? 왜 우리 이렇게 사는가? 사회적인 이 흉포함은 왜? 다른 것은 그만 두고 왜 우리 아이는 대학에서 떨어지느가? 그렇게 열심히 가서 기도했는데 기도해도 감기 하나 안 낫는가? 이것이 우리의 억울함이라구요.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타납니까? 소경이 봅니다. 귀머거리가 듣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자들이 하나님을 알고 그의 인생이 하나님을 목표로 하여 변화하는 이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한번도 그의 구속 사역을 잊으신 적이 없고 그 일을 위하여 모든 사람을 즐겨 순종하는 자들을 쓰실 뿐 아니라 그렇지 않은 자들도 하나님께서 쓰사 이 일을 이루어 내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사입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세상의 어떤 나라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거나 하나님의 일을 없이 할 수가 없습니다.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두쪽이 나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의 일을 방해할 자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갖는 인생관이요 세계관이요 역사관이 도어야 합니다. 그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의 일차적인 근거, 복음이라는 단어 속에 포함되어 있는 가장 큰 위안이 무어냐 그러면 개인적인 우리뿐이 아니라 우리가 몸 담고 있는,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운명과 현실이 결부되어 있는 온 우주와 그 질서와 그 나아감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은혜와 복주심이라는 뜻에서, 하나님의 그 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여러분 자녀가 대학을 실패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녀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원한 영광의 자리에 들어가는 것은 무엇으로도 실패받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병들어 아플 수 있고 여러분의 사업이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주를 믿고 복음 안에 있는 이상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와 인도하심과 그리고 함께하심 속에서 마침내 도달하고 지금도 누리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들은 어느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런 차원에서 일차적으로 근거되고 이해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개인적인 내 필요, 사소한 요구 이런 것과 결부되는 것은 너무 복음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더 크게 전우주를 놓고 전역사를 놓고 여러분의 마음 속에 흔들릴 수 없는 자신감을 갖게 하는 것,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의 존재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 12장으로 가서 이 말씀을 가장 대표적인 예로 끝을 맺읍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복음의 이 일을 인류에게 개인적으로 맨 먼저 시작하신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 12:1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의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12:1-3).

 

이것은 아브라함 한 사람에 대한 축복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하시고 복주실 모든 이들과 사랑하시고 복주시려는 모든 자녀들에게 대한 축복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범위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보십시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12:3).

 

그러니까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아브라함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시대에 제일 유명하고 제일 중요한 인물은 아브라함인 것입니다. 그 당시에도 여러 왕이 있었습니다. 소돔에도 왕이 있고 고모라에도 왕이 있고 그때 일어났던 전쟁을 보면 나오는 여러 왕들이 있습니다. 그 왕들이 그 시대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주인공입니다. 그와 만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한 복이고 가장 중요한 운명이 것입니다. 세상에서 왕이 되느냐 세상에서 거지가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복의 근원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시대에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 당시에 신문에 오르내릴 만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실상은 그가 주인공이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날 신문에 오르내리는 사람은 우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정치인들이거나 경제인이거나 하여서 신문에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주인공은 아닙니다. 소돔 고모라의 멸망은 소돔과 고모라 왕의 신실함이나 종교적 열심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의인 열 명이 있느냐였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한 나라와 시대를 어떻게 인도하실 것이냐는 거기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과 연결되는 것이지 거기에 있는 정치인이나 경제인하고 연결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여러분이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십시오. 복음이 왜 복음인가를 아십시오. 여러분은 전우주적입니다. 영원한 운명이라는, 시간적으로 이야기하면 영원이고, 공간적으로 이야기하면 전우주적으로 가장 중요하고 가장 대단한 신분으로 여러분은 초대받았고 운명이 확보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을 건드릴 자 없고 여러분을 실패하게 할 자가 없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로 인하여 여러분이 흔들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마침내 도달할 자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 하나님의 열심과 의지력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신앙을 굳게 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갈보리 산 위에서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그것까지 하셨는데 나머지 문제는 무엇인들 아끼시겠습니까? 그것이 우리 믿음의 최고의 근거인 것입니다. 우리는 실패합니다. 우린 미련합니다. 우린 연약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열심과 베푸시는 은혜와 우리에게 허락하신 복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복음을 알게 되고 그 안에 부름을 받게 되었다는 복된 여러분의 신분을 누리십시오. 그리고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승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