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영선목사

로마서 7강(롬 1:16-17), 하나님의 의(義)/박영선 목사

새벽지기1 2016. 2. 7. 07:47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6-17)


복음이라 그러면 우리 마음속에 떠오르는 첫 번째 생각은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다는 16절의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그러나 기억할 것은 복음에는 이 구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나타내 보였다고 이야기합니다. 바로 17절에 있는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로마서의 대주제이고 잊어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두드러지게 표현되는 내용이라고 이해할 수 있어야 구원을 바로 알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늘 구원을 얻는 방법, 구원에 관한 좋은 소식 이런 식으로만 이해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로마서 3:21을 보시면 이 복음에 관한 설명에 하나님 의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 하나의 중요한 주제로 등장하는 것을 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의’가 무어냐 하는 것을 오늘 우리가 제대로 이해해 보려고 합니다. 1:17로 다시 돌아오시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무어냐 그럴 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할 때 믿음이라면 다 아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 쳐 놓고 믿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바로 구원을 얻는 방법입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이것이 16절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복음이 무어냐 그럴 때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설명하는 것이야말로 복음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은 분명히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동시에 그것이 하나의 방법이나 조건, 선전이나 설득이 아니라, 복음 내용 자체에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성경이 주장하는 복음이 뭐냐 하는 설명에서 사도 바울은 일단 복음은 내용이고, 개념이고, 도이고 교훈이기 이전에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 1:2)


이 복음이 무어냐 그러면 아들에 관한 것이고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이 무어냐 그러면 정확히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이 아니고 그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시사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 것과 부활하사 우리를 위하여 하는 보좌우편에서 아직도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이야기하고 기독교 신앙을 이야기할 때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내용이 무엇이냐, 그 가르치는 바 원리가 무엇이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가 우선적으로 전제되어야 하며,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여 간섭하셨다는 신적 개입에 관한 개념이 먼저 들어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로마서가 이방인에게 보낸 편지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하나님을 원래 몰랐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몰랐던 이방인에게 이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구원이 무엇이냐,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느냐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니까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지금 형편을 설명하지 않고는 설명되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요 그 대속 사역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이라” 그럴 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 그것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그런 하나님이 실제로 존재하느냐,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우리가 정말 그런 구원을 필요로 하며 구원을 안 받으면 안 되는 존재냐”하는 것들을 먼저 풀어 나가야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곧 로마서 1장은 18절부터 하나님과 인간에 관한 이야기로 이어 나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 첫 번째 작업으로서 하나님이 누구냐 하는 것을 복음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라는 것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님 공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거룩과 순결과 그런 공의이기 때문에 부정하거나, 죄악을 지은 자들이 그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공의로는 인간은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영어로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공의는 영어로 ‘justice'라고 하고 우리말로는 ‘의’라는 말로 양쪽 다 쓰고 있어서 우리가 조금 혼동을 합니다. ‘justice'라는 말을 쓰고 지금 여기 있는 ‘하나님의 의’의 ‘righteousness'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옳으심‘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 나타났다. 그래서 믿음에 이르게 한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다루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 무어냐 하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하나님다우심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데 하나님다우심이 무엇에 있느냐고 할 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이라 그러면 16절에 있는 바와 같이 “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하는 것에서 오해했듯이 선택, 결정이라고 생각하십니다. 대표적으로 복음에 관한 큰 오해 중에 하나가 예전에 우리는 우리의 죄값을 치를 수가 없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 빛을 갚을 수가 없어서 구원 얻기가 불가능했는데 지금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빚을 다 탕감해 주셨다. 이제 남은 것은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우리가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이것은 복음주의자들 가운데서도 아주 흔하게 등장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의 조건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가 자생적으로 그리고 자력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어리석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믿음을 요구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두 가지로 하나님을 설명합니다. 믿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이 유일한 권위자이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 하나님이 유일한 주권자이심을 인정해야 됩니다. 이 6절에서 말하는 믿음은 누구의 믿음입니까? 누가 소유해야 되는 믿음입니까? 누구에게 요구되는 조건입니까? 믿는 자인 우리 모두가 가져야 되는 조건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을 한번 봅시다. 로마서 3:9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 9-12)


선을 행하는 자가 어떻게 없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깨닫는 자만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처지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죽었습니다. 그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그들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을 피해 숨었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원래 하나님에 관한 관계나 의식에 관계없이 태어납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런 감각이 없습니다. 제가 썼던 책에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자연인이 하나님에 대하여 상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연체류인 지렁이가 메니큐어를 생각하는 가능성보다도 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지식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라 이 말을 알아 듣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딱딱한 각질이 있어야 메니큐어를 생각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 지렁이가 메니큐어를 생각할 아무런 이유가 없듯이 자연인은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되지 않는 존재란 것입니다. 본성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믿음을 가지라고 합니다. 즉 이 두 가지 문제를 성경이 어떻게 연결시키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고 믿지 않고는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믿는 것은 고사하고 말입니다. 특별히 미국에 있는 교회들에서는 이 문제를 인간의 선택으로 많이 요구하고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의 의식구조가 우리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자기 결정을 매우 중요시하는 민족성을 가집니다. 그래서 자기 선택을 매우 좋아합니다. 그래서 결단이라는 것을 많이 요구합니다. 여러분, 미국에서 가장 강한 교파가 침례교인데 침례교에서 구원초청이라는 것이 자주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신 분 일어나십시오, 나오십시오.” 이것이 이런 이유 때문에 자행되고 있는데 그렇게 하는 방법론에 대해서 저는 시비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의도에 대해서도 시비가 없습니다. 단 분명히 이해와 설명의 미흡함은 지적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지금 우리가 1:17에서 본 바와 같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데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 무어냐 하는 것과 그것이 왜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 증거되는 것이냐 하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고 그것을 이해함으로써 성경이 믿음을 요구하는 것과 그리고 그 믿음을 자생적으로 가질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연결시키고 있는가에 대하여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데 이 뜻을 무엇으로 이해할 것인가에 대하여 힌트를 하나 줍니다. 바로 뒤 구절에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는 힌트를 줍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씀은 유명한 하박국서 2:4의 말씀입니다. 구약성경 하박국 2:2 말씀부터 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리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2-4)


이것이 바로 로마서 1:17에서 하신 말씀인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왜 여기 등장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이해해야 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무슨 질문을 하나님 앞에 던졌느냐 하면 “왜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며 선하고 의롭게 사는 세상을 의지하여 사는 자들에게 늘 당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가만히 계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질문을 던지죠? 왜 기도했는데 이런 저런 일이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정직하게 산 보상이 무엇입니까? 양보하고 산 가치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을 여러 번 하시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이 주신 답이 무어냐 하면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하는 답입니다.


대략적으로 이 하박국서를 이해하기 위해 1:2을 봅시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헤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합 1:2-4)


이럴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고 악한 자들이 하나님을 믿고 의롭게 사는 자들을 괴롭히는데도 가만히 보고만 계십니까? 5절 하나님의 답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열국을 보고 또 보고 놀랄지어다 너희 생전에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라 혹이 너희에게 고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그들은 두렵고 무서우며 심판과 위령이 자기로 말미암으며 그 말은 표범보다 빠르고 저녁 이리보다 사나우며 그 기병은 원방에서부터 빨리 달려오는 기병이라 마치 식물을 움키려 하는 독수리의 날음과 같으니라 그들은 다 강포를 행하러 오는데 앞을 향하여 나아가며 사람을 사로잡아 모으기를 모래같이 많이 할 것이요 열왕을 멸시하여 방백을 치소하며 모든 견고한 성을 비웃고 흉벽을 쌓아 그것을 취할 것이라”(합 1:5-10).


하나님, 악한 자들이 선한 자들을 괴롭히는데 왜 가만히 계십니까의 답이 무어라구요? “그 정도 가지고 놀라면 너무 이른 것이다. 앞으로 더 그렇게 된다. 더 흉악한 일들이 일어나고 더 강포가 심해질 것이다.” 이렇게 나옵니다. 여러분, 걸프전 마치고 후세인 잘 졌다고 그러싶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쉽게 전쟁을 그치고 평화를 주십시오. 그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후세인이 과거에 악당 같은 짓을 한 것보다 더 세게 부수고 악당짓할 것이란 말입니다. 부시는 메시아가 아니고 후세인은 꼭 사탄이 아닙니다. 둘다 자기 이익을 위하여 힘을 사용했던 동일한 악당들입니다. 저는 반미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됩니다. 미국은 세계 평화를 위해 하나님이 선택한 천사가 아닙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중동의 원유를 확보키 위하여 무력을 사용한 힘을 가진 날강도 중 하나입니다. 미국을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만 믿으십시오. 그래 놓고서 준 답이 이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그러면 잘 보십시오. 지금 하박국이 한 질문이 무어냐 하면 “도대체 하나님을 믿고 산 대가가 무엇입니까?” 이것이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산 자와 세상을 믿고 산 자가 세상에서 득세하고 세상이 언제나 이기는데 그렇다면 하나님 믿은 이익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왜 이렇게 악당들이 흥왕하는데 내버려 두십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무어라 답하셨다구요? “야 너 그 정도 가지고 놀라면 안 된다. 앞으로 더 흉악해진다. 세상은 더 악해진다. 그때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된다” 이렇게 답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은 가치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었는데 “더 흉악해진다”고 하면서 ‘믿음으로 살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에 하박국 선지가 이해했던 믿음과 하나님이 살아야 된다고 한 답 중에 다른 차이가 있는 것을 봅니다.

하박국서 2:12부터 봅시다. “피로 욥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민족들이 불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열국이 헛된 일로 곤비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말미암음이 아니냐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 이웃에게 술을 마시우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로 취케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네게 영광이 아니요 수치가 가득한즉 너도 마시고 너의 할례 아니한 것을 드러내라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 더러운 욕이 네 영광을 가리우리라 대저 네가 레바논에 강포를 행한 것과 짐승을 두렵게 하여 잔해한 것 곧 사람의 피를 흘리며 땅과 성읍과 그 모든 거민에게 강포를 행한 것이 네게로 돌아오리라”(합 2:12-17).


지금 하박국 선지가 불만을 가지고 하나님께 대든 것은 믿은 것이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였고 하나님의 답은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만 산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믿음이 양자 간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하박국식의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 그 표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은 표가, 하나님을 믿은 보답이 이 세상에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답은 나를 믿고 사는 것에 대한 보답이 이 세상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고 산 것이 표가 없고 보상이 없다는 것이 하나님이 그를 방치했다는 뜻은 아니란 말입니다. 이 세상이 흉포화하고 이 세상이 행악하는 자들이 더 많아지고 이 세상이 부패하고 썩어져 간다 할지라도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해 견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랬다면 하박국식의 불평이 나오는 것입니다. 믿은 값이 무엇입니까? 세상이 흉포해지고 악해지지만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흉포하고 행악자들이 날뛴다고 해서 하나님의 보호와 하나님의 간섭과 하나님의 뜻이 세상에 의해 방해되거나 세상에 의해 구부러질 수 없다고 선언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그러니까 의인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가 아니라 의인은 하나님이 보호하고 자키고, 세상에 악한 자들이 일어나고 더 나쁜 나라가 일어나고 더 나쁜 나라가 일어나고 더 나쁜 식으로 역사가 진행되더라도 하나님의 계획이 방해받거나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손안에서 뺏겨지는 일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는 행악자들이 들끓고 그들이 승리해 보이고 우리가 늘 당하는 것 같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 손 안에 있으며 보호 안에 있으며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우리가 주를 믿어서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의인을 지키는 힘, 그 힘, 그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보호, 하나님의 간섭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3장에 와서 이런 결론으로 끝이 납니다. “사기오놋에 맞춘 바 하박국의 기도라 여호와셔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 거룩한 자가 바란산에서부터 오시도다(셀라) 그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 찬송이 시계에 가득하도다”(합 3:1-3)


결국 어디에서 어디로 하박국 선지의 신앙이 바뀌느냐 하면 ‘하나님을 믿었으면 믿는 보상이 이 세상에 있을 것이다’라던 믿음으로부터 그 백성을 지키시며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 그의 일을, 그의 지혜와 그의 깊은 뜻과 능력을 이루시고야 말며 그 일을 모든 역사와 모둔 장소에서 이루시고야 만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래서 찬송이 다 무어냐 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이다’입니다. 예전엔 아닌 줄 알았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세상은 행악자들이 득세하고 주를 의지한 자들이 피해를 보는 것 같으니까요. 어디가서 낮잠 주무시고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뭐하고 계십니까? 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지금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3:17 결론입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어떻게 달라집니까? “하나님이 내 편을 드시는 한 외양간에 소가 없고 악당이 총을 들고 쳐들어 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내 편인 이상 나는 무너질 수 없다.” 이런 개념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었는데 결국 준 것이 이것입니까? 이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편을 드는 한 누구든지 나를 손댈 수 없다”간다는 말입니다. 즉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믿음이 내가 꺼내 놓아야 되는 조건으로서의 믿음, 하나님에 대한 나의 신뢰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이란 우리를 우리의 손과 우리의 힘에만 맡겨 두시지 않는 하나님의 간섭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다시 우리가 보았던 로마서 1:17로 갑시다. 즉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그 안에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게 하는, 히브리서 11:6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를 찾는 자에게는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하는, 이 믿음이 생성되게 하는 하나님의 간섭이 있었단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를 믿도록 하나님께서 하신 어떤 간섭, 역사 속에서, 그리고 우리 개개인의 영혼 속에 하신 하나님의 간섭으로 말미암아 생긴 결과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이 둘을 비교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렇습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믿어야 얻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고 의인도 없고 선하지 않은 우리가 어떻게 이 믿음을 소유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믿게 한 어떤 하나님의 간섭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린 자꾸  전에 하박국 선지자가 이야기했던 것과 같이 내가 꺼내 놓은 믿음을 조건으로 해서 하나님 왜 그 보상을 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성경이 하는 이야기는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겁니다. 하나니님다우심, 우리는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내 죄를 씻기 위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 만드시고 부활 생명으로 이끄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사 하늘 보좌 우편에 앉히셨습니다. 그래서 잠자던 내 영혼을 일으키셨고 눈 먼 우리의 눈을 뜨게 하셨고 시체였던 우리를 일으키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래서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 것입니다. 두 번째, 우리가 가진 믿음을 우리로 소유케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 속에 믿음을 행하셨습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이 그의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행사하실 세상적인 조건과 힘이 아니라 영적이고 거룩한 하나님 쪽에서 계시하시고 완결하시고 간섭하시고 이루신 하나님의 간섭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이 복음은 구원의 조건으로서만, 가능성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치료한 치료로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제시하는 사도 바울의 주장 속에는 무엇이 있느냐 하면 이 복음을 믿어 구원을 얻는다 하는 선포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죽을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이 복음을 믿을 조건이나 능력이나 관심도 없는 우리에게 어떻게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내시고야 말았는가가 복음 안에 들어 있다는 의미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자녀가 잘못하면 뭐라고 나중에 말합니까? 자녀가 심한 잘못을 해서 경찰에 잡혀가거나 혹은 부모가 학교에 불려가거나 했을 때 “그 놈은 내가 낳지만 내 자식은 아닙니다”라고 이야기합니까? “ 다 제가 잘못 가르친 탓입니다”라고 하지요. 그것이 부모의 마음 아닙니까? 부모답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특별히 로마서 1:17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이방인들 특별히 로마 사람들은 헬라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은 나라입니다. 제우스가 있고 아폴로가 있고 헤라클레스가 있고 프로메테우스라는 신들이 있는 그들에게 그들이 갖고 있는 신관같이 편협하고 변덕이 많고 부도덕한 신으로 오해하지 말아 달라,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 불쌍한 인간을 찾아 오시는 하나님, 하나님 쪽에서 희생을 감수하시면서 불쌍한 우리를 위하며 베푸신 사랑의 크심, 그의 은혜, 그의 거룩하심, 그의 자비와 긍휼 이런 모든 것이 복음 안에 어떻게 잘 드러났느가로 이방인들 앞에 복음을 그리고 하나님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말씀드린 이런 것들은 여러 가지 성경적인 지지를 받습니다. 몇 구절만 찾아드리겠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앞에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는 믿을 수 없습니다. 24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그러니까 구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다. 그러면 구원의 조건이 어디에 달려 있습니까? 내가 믿어야 되고 내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능성은 예수로 말미암아 생겼다 할지라도 구원을 얻기 위한 최종적인 마지막 열쇠는 내가 믿느냐 안 믿느냐가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구원을 얻을 자 없고 그 구원을 획득할 자 없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미쳤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생성시켰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다. 믿어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간섭에 의하여 우리에 나타난 첫 번째 결과인 것입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 3:15). 믿음이 내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얻어야 된다면 구원이 누구 안에 있어야 됩니까? 믿음이 예수 안에 있다고 합니다. 믿음이 예수 안에 있는 믿음입니다. 복음이 무어냐? 우리가 믿는 신앙의 가장 영광되고 가장 자랑스러운 부분이 무어냐 그럴 때 여러분이 기억해야 될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가지신 사랑과 열심과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시작됐고 역사적으로 시행하셨고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보호하고 계시는 그의 살아계신 간섭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셔야 됩니다. 하박국 선지자같이 기도를 열심히 했는데 아이가 시험에 떨어졌다든지 기도 열심히 했는데 병이 안 낫다는 것 가지고 또 망루에 올라가서 “하나님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이렇게 믿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살아야 됩니다. 그 믿음이 무어라 그랬다구요? 하나님의 간섭하심, 세상의 조건과 세상의 힘이 아닌, 그 수단과 방법으로가 아닌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는 그 힘으로 의인은 삽니다. 즉 의인을 사는데 있어서 자기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보호와 힘에 근거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의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를 보내게 하셨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깨끗케 하시며 그 안에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신다는 이것이 우리가 믿는 바 신앙의 핵심이요,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니 아무도 그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영광 중에 그리스도 예수 앞에 설 것을 믿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