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영선목사

로마서 14강(롬 2:1-9), 하나님의 공의 /박영선목사

새벽지기1 2016. 2. 20. 05:49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내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간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가가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롬 2 : 1 ~ 9)


로마서 2 : 1 ~ 9까지의 말씀은 이해하기 좋게 지름 우리가 그 내용을 분리해서 생각하면 이런 내용이 됩니다. ‘옳고 그른 것을 알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심판은 공평하며 절대적일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죄를 지을 때 심판하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 배짱대로 살고 있다. 하나님께 마땅히 돌릴 영광과 두려움을 갖지 않고 불경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심판권을 가지시고 불경한 자들을 가능한 한 벌주시기를 기뻐하지 않고 기다리시고 오래 참으사 어떻게 해서든지 구원받게 하시기 위하여 긍휼과 자비로 그 심판을 연기하고 계신다. 그런데 인간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불경하고 죄를 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을 악용하여 하나님이 없다고 하며 하나님을 멸시하며 죄 짓는 것에 더 담력을 가지고 하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두렵고 미련한 짓인 줄 아느냐?’ 하는 것이 오늘 읽은 로마서 2 : 1 ~ 9까지 말씀의 대표적인 내용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주된 내용은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멸시하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오래 참으시는가 하는 부분과 하나님의 심판권의 절대성, 그의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의 높으심과 엄위하심과 그의 공평, 공의, 그리고 심판권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공평한 심판을 행하신다’ 하는 부분에 대하여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물론 (믿지 않으니까 더 할말이 없습니다만)믿는 자들 중에도 많은 분들이 하나님의 심판권에 대하여 회의와 항복하지 않는 부분들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근거 중의 하나가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이 큰 이유를 이루고 있습니다. 멀쩡하게 행복하게 살고 있는 가나안 족속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서 다 쳐 죽이고 남의 나라를 뺏고 어린 아이부터 시작해서 노약자까지 모든 것을 진멸하는 그 참혹한 일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허락하셨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공평하시다 하는 것에 대하여 조금은 만족하지 않고 항복치 않은 근거를 가지곤 합니다. 신명기 7장으로 가시면 바로 그 구절이 나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신 7 : 1 ~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붙이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보지 말고 진멸하고 그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신 7 : 16).


잔혹한 명령을 내립니다. ‘불쌍히 여기지 말며 진멸할 것이라.’ 이런 것들은 역사상 기독교인들, 기독교 국가들에게까지도 오해된 구절들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청교도들이 들어가 얻은 미국땅에서 원주민 인디안들을 쳐 없애는 데도 이 신앙적인 근거가 저들에게 작용해서 참혹하게 인디안 원주민들을 학살했고 흑인들을 노예로 쓰는데 있어서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당연시했습니다. 호주를 점령한 영국의 죄수들과 나중에 다른 이유로 간 모든 백인들이 백호주의를 앞세우면서 호주 원주민들을 학살한 것도 이런 데 근거합니다. 여러분들은 여기 살아서 잘 모르겠지만 외국에 갔을 때 서부국가에 가면 황인종은 백인종 흑인종 다음입니다.


그런데 백인종과 흑인종 사이에는 개와 고양이가 낍니다. 이 문제는 상당히 심각한 것입니다. 백인들은 흑인과 황인보다 개와 고양이를 훨씬 중요시합니다. 우리는 인간으로 취급치 않습니다. 근거는 여기 이것입니다. 백인과 황인 이것을 가지고 보면 이갈리는 일이지만 여러분들이 신자로 이 세상을 살 때 어떤 불신자와 이해관계가 얽히고 어려움을 당하면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당장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저것들은 죽어 마땅하다. 진멸받아야 된다’라는 하나님만이 내릴 수 있는 심판권을 여러분이 당연히 여러분의 권리로 주장하게 되는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진멸하라는 이 문제는 생각같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해서 멀쩡히 사는 사람 것을 빼앗아서 주는 것이 가나안 정복은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제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창 15 : 13 ~ 16).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차지할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 중의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을 편애해서라는 국면만이 아니라 이 일곱 족속이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죄에 대한 심판이 동시에 행해지는 것이 이 가나안 정복입니다. 그러니까 이직은 저들이 벌받고 심판받을 죄를 짓고있지만 아직은 좀더 기다려 주고 싶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됩니다. 그러니까 저들의 구원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야 된다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족속이 심판을 받을 때가 되어야 한다는 것과 함께 맞아 떨어져야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남의 땅을 빼앗아 주는 데만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빼앗길 수밖에 없고 하나님 앞에 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 가 있었다는 것이 성경적인 또 하나의 경고입니다.


다시 신명기 7장으로 가 보시면 아까 우리가 앍은 말씀들에 ‘진멸하라’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그런 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신 7 : 3 ~ 10).


여기서 물론 ‘당장’이라는 말은 ‘곧’이라는 뜻으로만 해석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하는 뜻입니다. 그것이 나타난 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섬겨서 얻는 복이요 상급인 동시에 뺏기는 자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이 미워하는 짓들을 했기 때문에 지금 처참한 심판을 받고 있는 것으로 가나안 정복이 갖는 두 국면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가 잘못 생각하면 언제나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편이니까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리하도록 일의 판정을 내렸다 하는, 하나님이 조금 편벽되다는 생각을 갖기가 쉽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같은 일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일어난 것을 우리가 성경의 기록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서 9장으로 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배신해서 불신앙의 행위를 하다가 결국 그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의 포로가 됩니다. 9 : 1이하에 그 일에 대한 다니엘의 고백이 나옵니다. 자기네들이 당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신앙적인 눈으로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봅시다.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자시여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우리가 또 주의 종 선지자들이 주의 이름으로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와 온 국민에게 말씀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공의는 주께로 돌아가고 수욕은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오늘날과 같아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과 이스라엘이 가까운 데 있는 자나 먼 데 있는 자가 다 주께서 쫓아 보내신 각국에서 수욕을 입었사오니 이는 그들이 주께 범하였음이니이다 주여 수욕이 우리에게 돌아오고 우리의 열왕과 우리의 방백과 열조에게 돌아온 것은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마는 주 우리 하나님께는 긍휼과 사유하심이 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패역하였음이오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여호와께서 그 종 선지자들에게 부탁하여 우리 앞에 세우신 율법을 행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단 9 : 3 ~ 10).


핵심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우리 나라 정치인들이 썩었습니다. 우리 나라 경제인들이 자기 배만 불렸습니다. 그래서 나라들이 부강할 때 우리 나라는 부국강병책을 쓰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아닙니다. 바벨론이 쎄서 우리가 망했고 우리 나라가 군사력이 열악해서 망했습니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내던지셨습니다. 이겁니다. 두려워할 주 하나님 아시겠습니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들입니다. 두려워할 주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오늘도 예수 믿어서 여러분이 산 주가가 올라 가기를 바라는 건 아닙니까? 두려워할 분을 두려워하십시오. 두려워할 물건이라는 것은 업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주의 율법을 범하고 치우쳐가서 주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이 저주가 우리에게 내렸으되 곧 하나님의 종 모세의 율법 가운데 기록된 맹세대로 되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음이니이다 주께서 큰 재앙을 우리에게 이루셨사오니 온 천하에 예루살렘에 임한 일 같은 것이 없나이다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이 모든 재앙이 이미 우리에게 임하였사오나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은총을 간구치 아니하였나이다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재앙을 간직하여 두셨다가 우리에게 임하게 하셨사오니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는 행하시는 모든 일이 공의로우시나 우리가 그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강한 손으로 주의 백성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오늘과 같이 명성을 얻으신 우리 주 하나님이여 우리가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나이다”(단 9 : 11 ~ 15). 붙잡혀 오고 매맞고 처참한 자리에서 다니엘이 그 입을 열어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사실적 고백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입니다. 범죄하면 죄값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진리의 법칙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로 더불어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명령을 너희는 다 지킬지니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이미 건넌 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네게 들어가기를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하리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돌들을 에발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철기를 대지 말지니라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명백히 기록할지니라”(신 27 : 1 ~ 8).


이것이 우선해야 되는 일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가나안 족속을 다 진멸해야 됩니다. 그리고 무엇을 해 놓으라구요. 큰 돌을 세워놓고 여호와의 명령을 명백히 기록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28장에 두 가지 약속이 나옵니다. 축복의 약속과 저주의 약속이 나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그러나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이것이 신명기 28장 전반에 걸친 내용입니다.


1절부터 14절까지는 축복의 약속이고 15절부터 68절까지는 저주의 약속이 나옵니다. 모든 내용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내 말을 들으면 내가 복을 줄 것이고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저주하리라. 다른 방법을 없다. 하나님이 생사화목의 주인이시고 그만이 주권자이시고 그만이 우리의 심판자이십니다. 그를 사랑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이 다니엘의 입을 통하여 고백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바벨론이 강해서 우리 나라가 망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바벨론에 집어 던지셨습니다. 역사적인 배경을 봅시다. 정말 어떻게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됐으며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적 사건에서 그의 약속하신 바를 이행하셨는가를 찾아 보도록 합시다.


열왕기하 21장으로 갑시다. 이 당시는 이미 북 왕조 이스라엘은 망하고 남 왕조 유다만 남아 있을 때입니다. “므낫세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 오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헵시바더라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서 그 부친 히스기야의 헐어버린 신당을 다시 세우며 이스라엘왕 아합의 소위를 본받아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 성신을 숭배하여 섬기며 여호와께서 전에 이르시기를 내가 그 이름을 예루살렘에 두리라 하신 여호와의 전에 단들을 쌓고 또 그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그 진노를 격발하였으며 또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아세라 목상을 전에 세웠더라 옛적에 여호와께서 이 전에 대하여 다윗과 그 아들 솔로몬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이 전과 예루살렘에 내 이름을 영원히 둘지라 만일 이스라엘이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종 모세의 명한 모든 율법을 지켜 행하면 내가 그들의 발로 다시는 그 열조에게 준 땅에서 떠나 유리하지 않게 하리라 하셨으나 이 백성이 듣지 아니하였고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열방보다 더욱 심하였더라”(왕하 21 : 1 ~ 9).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이 마치 무엇 같았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쫓아내고 심판을 행하게 했던 가나안 족속이 행한 것과 방불한 죄를 범하였으며 그것보다 더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도 멸하기로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종 모든 선지자들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유다 왕 므낫세가 이 가증한 일과 악을 행함이 그 전에 있던 아모리 사람의 행위보다 더욱 심하였고 또 그 우상으로 유다를 범죄케 하였도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제 예루살렘과 유다에 재앙을 내리리니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내가 사마리아를 잰 줄과 아합의 집을 다림보던 추로 예루살렘에 베풀고 또 사람이 그릇을 씻어 엎음같이 예루살렘을 씻어 버릴지라 내가 나의 기업에서 남은 자를 버려 그 대적의 손에 붙인즉 저희가 모든 대적에게 노략과 겁탈이 되리니 이는 애굽에서 나온 그 열조 때부터 오늘까지 나의 보기에 악을 행하여 나의 노를 격발하였음이라 하셨더라”(왕하 21 : 10 ~ 15).


그래서 이제 유다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멸망의 길로 들어 섭니다. 심판을 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므낫세는 기원전 692년부터 624년까지 55년간을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악한 왕에게도 회개할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가능한 한 심판을 연기하고 돌이킬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하나님이 아무리 기다리고 끝까지 봐 주어도 옳은 길로 가지 않았고 이 죄악 때문에 죽고 맙니다.


그런데 이 당시의 소아시아, 지금의 아랍 사람들이 살고 있는 중동 아시아와 그 밑에 팔레스타인 그리고 그 밑에 이집트까지 그 서아시아의 세 나라가 초강대국이었습니다. 이집트가 하나의 강대국이었고 앗시리아가 강대국입니다. 바벨론이 강대국입니다. 이 강대국 세 나라가 그 여러 나라들을 완전히 장악하고 살고 있던 때입니다. 그런데 기원전 627년에 앗시리아에 이슈파니팔 왕이 죽습니다. 세계사 속에서 배운 유명한 왕입니다. 앗수르는 이 왕의 죽음으로 인해서 서서히 몰락합니다. 그래서 기원전 612년에 바벨론과 메데 이 두 나라 연합군에 의하여 수도 니느웨가 함락됩니다. 나라가 아직은 완전히 멸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몰락한 앗시리아를 구원하려는 목표와 또 그 세력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이중적인 속셈을 품고 애굽의 왕인 느고가 북진을 합니다. 앗시리아가 망해서 그 모든 인력과 경제력이 바벨론 것이 되고 말며 바벨론이 너무 강대국이 되어서 자기네 나라가 이등 국가로 전락하게 되니까 그 나라를 위성국가를 만들자는 속셈을 품습니다.


그러나 꼭 돕는 것도 아닌 이중적인 목적을 가지고 앗시리아를 쳐들어 올라오는데 북진하는 이집트군을 요시야 왕이(이 왕은 므낫세의 다음 다음 왕입니다), 어리석게 가로막고 나섭니다. 요시야 왕은 므낫세 왕이후로 하나님 마음에 들었던 왕이고 그 후로는 내리막길인데 그 내리막길의 첫 번째 원인이 므낫세입니다.


므낫세 다음에 아몬이라는 왕이 있고 그 다음 왕인 요시야 왕은 종교 개혁을 실시하고 정당하게 나라를 돌이키려고 애를 쓴 왕입니다. 그러나 불행했던 것은 백성이 그 개혁에 동참하지 못한, 그러니까 나라는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요시야는 자기가 종교개혁도 했고 하나님 마음에 들게 했기 때문에 다시 하나님 앞에 큰 힘을 얻어 나라를 회복시킬 수 있으리라는 개인적인 자만심을 갖고 바로 이 느고 앞을 가로막고 섰다가 그만 그 전쟁에서 죽고 맙니다. 그런데 이 이후로 유다나라는 애굽 왕 손아귀에 놀아납니다. 열왕기하 23 : 29부터 봅니다. “요시야 당시에 애굽 왕 바로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하수로 올라가므로 요시야 왕이 나가서 방비하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나 본 후에 죽인지라 신복들이 그 시체를 병거에 싣고 므깃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그 묘실에 장사하니 국민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데려다가 저에게 기름을 붓고 그 부친을 대신하여 왕을 삼았더라”(왕하 23 : 29 ~ 30). 이제 요시아가 죽자 그 아들 여호아하스를 왕을 삼았습니다. 31절입니다.


“여호아하스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삼 세라 예루살렘에서 석달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하무달이라 립나 예레미야의 딸이더라 여호아하스가 그 열조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니 바로느고가 저를 하맛 땅 립나에 가두어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지 못하게 하고 또 그 나라로 은 일백 달란트와 금 한 달란트를 벌금으로 내게 하고 바로느고가 요시야의 아들 엘리아김으로 그 아비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을 삼고 그 이름을 고쳐 여호야김이라 하고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잡아갔더니 저가 거기서 죽으니라”(왕하 23 : 31 ~ 34).


누가 왕이 되느냐 하는 것이 애굽 왕 손에 달려있는 위치로 전락합니다. 그래서 요시야가 죽고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 노릇했지만 여호아하스는 포로가 돼서 애굽에 가서 죽고 요시야의 다른 아들 여호야김이 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요시야 왕이 죽고 난 다음에 여호아하스도 죄를 범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고 그 대를 이어서 왕이 된 여호야김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만 합니다. “여호야김이 왕이 될 때에 나이 이십 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 일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스바다라 루마 브다야의 딸이더라 여호야김이 그 열조의 모든 행한 일을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왕하 23 : 36 ~ 37).


기원전 605년에 유프라데스 강변 갈그미스에서 에굽과 이집트와 바벨론에 카다란 전투가 일어납니다. 거기서 이집트가 집니다. 그래서 바벨론은 그 이후로 약 70년 간에 걸쳐 서아시아의 패자가 됩니다.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고 온 천하를 평정한 나라가 됩니다. 그래서 이 이스라엘 유다 나라도 여태껏 애굽 왕권에 의해서 영향을 받던 것이 이제는 바벨론 왕권에 의하여 좌우되기 시작하는 것이 나타납니다.


605년 갈그미스 전투에서 이 싸움을 승리로 이끈 장수가 느부갓네살인데 그는 왕자였습니다. 같은 해 아버지가 죽어서 아버지 뒤를 이어서 바벨론의 왕이 됩니다. 그리고 그 후에 예루살렘을 포함해서 여호야김에게 항복을 받고 그때에 여러 사람들을 포로로 데려가는데 다니엘과 친구들이 이때 포로가 됩니다. 이때가 기원전 605년입니다. 열왕기하 24 : 1 이하에 내용이 나옵니다. “여호야김 시대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오매 여호야김이 삼년을 섬기다가 돌이켜 저를 배반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 종 선지자들로 하신 말씀과 같이 갈대아의 부대와 아람의 부대와 모압의 부대와 암몬 자손의 부대를 여호야김에게로 보내어 유다를 쳐 멸하려 하시니 이 일이 유다에 임함은 곧 여호와의 명하신 바로 저희를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하심이니 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로 인함이며 또 저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그 피로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 (왕하 24 : 1 ~ 6).


그래서 이제 여호야김은 죽고 그 뒤에 여호야긴이 왕이 됩니다. 그런데 이 여호야긴이라는 왕은 다시 바벨론에 대해서 또 반역을 일으키고 여태까지 왕들이 당한 모든 고통들, 이스라엘이 애굽에게 왕권이 좌우됐고 그 다음에는 또 바벨론에 의해서 좌우되고 모든 수모를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섬겨 왕권을 정립하고 나라를 부강케 하고 나라를 보호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반항합니다.


“여호야김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 일년을 치리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와서 치고 저를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느부갓네살이 또 여호와의 전 기구들을 바벨론으로 가져다가 바벨론에 있는 자기 신당에 두었더라 여호야김의 남은 사적과 그 행한 모든 가증한 일과 그 심술이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그 아들 여호야긴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여호야긴이 위에 나라갈 때에 나이 팔 세라 예루살렘에서 석달 열흘을 치리하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세초에 느부갓네살이 보내어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여호와의 전의 귀한 기구도 함께 가져가고 그 아자비 시드기야를 세워 유다와 예루살렘 왕을 삼았더라”(대하 36 : 5 ~10).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므낫세의 잘못을 인하여 심판 내리시기를 작정했는데 그 이유는 왕 하나 때문이 아니라 백성이 다 쫓아갔다는 데에 잘못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일어난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행했습니다마는 그 개인은 정직했다 할지라도 국가 자체가, 백성 자체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부터 이 유다 나라는 애굽 왕의 노리개가 되기도 하고 바벨론의 노리개가 되기도 하고 왕들이 잡혀가기도 하고 그들의 처첩이 잡혀가기도 하고 또 많은 다른 젊은 남녀가 잡혀가기도 하고 성전 안에 있는 모든 금은 기구들과 다른 것들을 빼앗기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그래서 자꾸 다른 왕을 세웁니다.


그러나 일어났던 왕마다 앞에 있었던 일로 교훈을 삼았던 것이 아니라 똑같은 짓을 되풀이했습니다. 이것이 죄가 갖는 무서움일 것입니다. 죄는 이상하게도 더 죄를 짓게 만들지 그 죄를 돌이키게 하는 요소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어디까지 오느냐 하면 시드기야가 마지막 왕입니다.


“여호야긴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십 팔 세라 예루살렘에서 석달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느후스다라 예루살렘 엘라단의 딸이더라 여호야긴이 그 부친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그 때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신복들이 예루살렘이 올라와서 그 성을 에워싸니라 그 신복들이 에워쌀 때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도 그 성에 이르니 유다 왕 여호야긴이 그 모친과 신복과 방백들과 내시들과 함께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 왕이 잡으니 때는 바벨론 왕 팔년이라 저가 여호와의 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고 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전의 금 기명을 다 훼파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저가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방백과 모든 용사 합 일만 명과 모든 공장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가매 빈천한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더라 저가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왕의 모친과 왕의 아내들과 내시와 나라에 권세 있는 자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또 용사 칠천과 공장과 대장장이 일천 곧 다 강장하여 싸움에 능한 자들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바벨론 왕이 또 여호야긴의 아자비 맞다니야로 대신하여 왕을 삼고 그 이름을 고쳐 시드기야로 하였더라”(왕하 24 : 8 ~ 17). 지금 멸망해 가는 것이 보이시죠. 왕을 계속 바꿉니다. 하나님께서 아직도 최후의 심판을 내리지 아니하고 기회를 자꾸 주시는 것입니다. “시드기야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일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 일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하무달이라 립니 예레미아의 딸이더라”(왕하 24 : 18).


어머니 이야기가 꼭 나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그 어머니 잘못이다 하는 이야기가 내포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시겠습니까?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진노하심이 저희를 그 앞에서 쫓아내실 때까지 이르렀더라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하니라”(왕하 24 : 19 ~ 20).


“시드기야 구년 시월 십일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진을 치고 사면으로 토성을 쌓으매 성이 시드기야 왕 십 일년까지 에워싸였더니 그 사월 구일에 성중에 기근이 심하여 그 땅 백성이 양식이 진하였고 갈대아 사람이 그 성읍을 에워쌓으므로 성벽에 구멍을 뚫은지라 모든 군사가 밤중에 두 성벽 사이 왕의 동산 곁문길로 도망하여 아라바 길로 가더니 갈대아 군사가 왕을 쫓아가서 여리고 평지에 미치매 왕의 모든 군사가 저를 떠나 흩어진지라 갈대아 군사가 왕을 잡아 립나 바벨론 왕에게로 끌고 가매 저에게 심문하고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저의 목전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갔더라”(왕하 25 : 1 ~ 7).


어느 쪽이 더 잔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가나안 백성들이 당한 일과 지금 하나님의 백성 유다가 바벨론 포로가 됐을 때 당한 잔혹성은 어느 쪽이 더 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둘이 막상막하라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권을 아시겠습니까? 심판을 무서워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죄를 무서워하십시오. 죄를 무서워하라는 이야기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눈에 벗어나는 짓은 이를 악물고 안 해야 됩니다. 여러분 중에 누가 매일 회사를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으며, 학생 중에 누가 매일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를 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어느 여자가 매일 기쁜 마음으로 밥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안 하면 밑지는 것이라는 것을 아니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가슴 속에서 사이다가 튀어 오르듯 좋고 미치고 좋아서 팔짝 뛰어서 하는 짓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토록 괜찮치 않습니다.


이를 악물고 해야 됩니다. 이를 악물고 하나님을 섬겨야 됩니다. 죄에게지지 마십시오 세상에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 멋대로 사는 사람들의 방자함을 여러분 마음으로부터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거기에 유혹되려는 마음을 이를 악물고 붙잡아 내셔야 됩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몇백 년에 걸쳐서 일어난 일인 줄 아십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정복을 한 것이 기원전 1400년 쯤의 일입니다. 사울 왕이 초대 왕으로 취임하여 이스라엘에 왕조가 생긴 것이 기원전 1050년 경입니다. 두 나라가 분리되고 결국 이 유다라는 나라가 망한 것이 기원전 586년입니다. 몇 년 안 됩니다. 왕조가 되어서 500년을 가지 못합니다. 그 동안 무수한 악을 행했고 하나님이 오래 기다려 주었기 때문입니다. 아모리 족속의 죄가 관영할 때까지 그들이 심판받아 마땅할 때까지 기다린 것이 그때도 심판을 해야겠다고 작정해 놓고도 하나님이 기다리신 것이 최소한 그 후로 400년이 넘습니다. 앞 사람의 잘못을 보고서도 내가 무엇을 어떻게 고쳐야 될 줄을 모르는 것. 인간의 가장 큰 비극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아는 사람들입니다. 아는 바를 행하십시오.


신명기 30장으로 갑니다. 이 모든 것이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공평하심과 그의 권세를 가진 진리대로 시행된 사건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이 말씀을 여러분 마음 속에 두시기 바랍니다. “보라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치 못할 것이니라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오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신 30 : 15 ~ 20).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렇게 따지지 마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주리라 하신 땅에 너희가 들어 가리라. 거기가 천국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의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그 자리로 영접하실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듣지 않고 여러분이 세상을 따라 가면 여러분은 반드시 망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지 마십시오. 종교적인 유희를 하지 마십시오. 헌금이나 내고 예배나 보는 것으로 여러분의 신앙이 신앙이라고 생각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돈을 섬기며 세상에서의 자랑을 목표로 삼는 사람들과 반대된 입장에서 신앙인으로 존재하고 있고 신앙으로 이 싸움을 하고 있는 자입니다.


극렬한 풀무불에 던지운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배신치 않으리라는 결심과 그 깨우침을 여러분의 자랑으로 갖고 계셔야 됩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경고와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된다는 그 간단한 말 속에 들어있는 무서운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이 두려운 쪽으로 열매 맺히지 않고 복된 쪽으로 열매 맺는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감사와 찬송으로 계속 이어 나가는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