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영선목사

로마서 15강(롬 2:1-8), 하나님의 인내 /박영선목사

새벽지기1 2016. 2. 21. 07:33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인간이 죄인 된 것,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방법이 없는 자리에 있는 것을 우리가 로마서 1 : 18 이하에서부터 살펴보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권과 그 공평하심, 그 심판의 엄중함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는 것을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앞서 확인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한번 더 그 문제를 놓고 확인하려 하는 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안에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함과 공평함 속에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2 : 4에 있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그 심판권을 가능한 한 유보하고 계시며 죄 지은 인간들을 구원케 하여 그의 깨우침과 용서와 사랑을 받을 만한 기회를 우리에게 아는 방법으로 허락하고 계시다는 것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악 된 지독함은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깨우칠 만한 기회들을 돌이킴으로 반성하고 회개하는 것으로 쓰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고집을 더 높이는 데 쓰고 있다고 역사와 성경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로 그 문제, 인간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목도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그 심판권을 가능한 한 유보하사 우리에게 사랑과 긍휼로 기회를 주심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려 죄를 지으며 또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멸시하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아 인간의 죄악상을 조금 더 분명히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보았던 유대의 멸망 사건을 한 번 봅시다. 역대하 36 : 11말씀입니다. 열왕기하에 기록된 유대의 멸망과 역대하에 기록된 멸망에는 조금의 시각 차가 있습니다. 열왕기하에서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마지막 멸망할 때 왕이던 시드기야가 어떻게 처참한 꼴로 그가 잘못한 일에 대한 보복을 받는가 하는 것을 목도했다면 역대하 36 : 11 이하에서는 조금 다른 시각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시드기야의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일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 일년을 치리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선지자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일러도 그의 앞에서 겸비치 아니하였으며 느부갓네살 왕이 저로 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케 하였으나 저가 배반하고 목을 곧게 하며 마음을 강퍅케 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고 제사장의 어른들과 백성도 크게 범죄하여 이방 모든 가증한 일을 본받아서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에 거룩하게 두신 그 전을 더럽게 하였으며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백성과 그 거하시는 곳을 아끼사 부지런히 그 사자들을 그 백성에게 보내어 이르셨으나 그 백성이 하나님의 사자를 비웃고 말씀을 멸시하며 그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와 진노로 그 백성에게 미쳐서 만회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대하 36 : 11 ~ 16).


이미 므낫세 왕 때부터 하나님께서 유다 왕조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고 사자들을 보내서 회개를 촉구하고 있지만 그 뒤로 아무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여호야김 때 이미 일차 포로가 있었고 그 후에 왕조를 걸쳐서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에 의해서 왕위에 오릅니다만 자기가 앉아 있는 위치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이며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미 심판의 칼을 뽑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고집을 부립니다. 여기 있는 식으로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말씀을 전해도 듣지 않고 또 다른 사자들을 아무리 보내도 듣지 않고 왕뿐만 아니라 백성들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경멸과 조롱을 보내다가 급기야 멸망했다 하는 것이 역대하의 기록입니다.


그런데 이런 유다 왕조의 멸망은 이것이 처음이거나 전에도 이런 비슷한 일을 당해본 적이 없어서 생긴 시행착오가 아닙니다. 그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고 충분히 각성할 만한 역사적인 증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한다는 데에 인간의 죄악 된 모습과 지독한 면이 보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시드기야 왕에게 와서 말씀을 전하고 회개를 촉구했다는 것은 예레미야 7장에 가면 좀 더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로서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경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인아 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 곳에 거하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 무궁히 준 이 땅에니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도다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7 : 1 ~ 11).


예레미야 선지자는 기원전 626년부터 포로 된 잠시 후까지 사역을 한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 기록된 예레이먀 7장은 여호야김 왕일 때에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니까 벌써 몇 왕 전에 지금 이 글을 쓸 때가 기원전 608년 경으로 추정되고 있고 일차 포로가 여호야김왕이 왕으로 있던 605년에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약 3년 전에 이 글이 쓰여졌습니다. 일차 포로가 있었고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도 그때 잡혀 갑니다.


20년도 채 안 되서 망하기까지 여호야긴이라는 왕도 있었고 시드기야왕까지 몇 왕을 지나면서 그 꼴들을 보면서도 시드기야가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어리석음입니다. 1절에서 11절까지는 의미심장한 경고입니다. 여호와의 전에 모였다가 나가는 사람은 생명과 거룩을 받고 나가야 되고 나가면 경건한 신자로서 행동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성전에 와서 예배와 제사는 드리면서 나가서 하는 짓은 온갖 못된 일을 합니다. 성전이 거룩한 자의 집단이 아니라 도둑놈들의 집단입니다. ‘너희는 이 이전이 도둑의 굴혈로 보이느냐’ 그렇게 꾸짖습니다.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을 인하여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 같이 너희가 의뢰하는 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곧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준 이곳에 행하겠고 내가 너희 모든 형제 곧 에브라임 온 자손을 쫓아냄 같이 내 앞에서 너희를 쫓아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렘 7 : 12 ~ 15).


이미 경고를 합니다. 여호야김 왕 때 그러니까 기원전 608년에 이 경고가 있었고 실제적인 행사가 605년에 일어나서 그때는 느부갓네살 왕에게 포위되어 여호야김 왕을 비롯한 모든 왕들이 일차로 잡혀가고 그 뒤를 이어서 여호야긴이 왕이 되고 몇 대를 걸쳐서 바벨론 왕의 입김 속에서 놀아 나다가 결국은 그 왕이 눈이 뽑혀서 잡혀가고, 성전이 몽땅 파괴되고 그 나라가 온통 망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제시하느냐 하면 내가 최초로 내 이름을 두었던 실로에 내가 행한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내가 하는 경고에 너희는 귀를 기울이라고 하십니다.


가능하면 하나님은 유다를 멸망시키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이 본뜻이 아닙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고 우리에게 그 심판이 임하기 전에 이미 내렸던 심판을 근거로 해서 우리가 돌이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실로에 있었던 사건이 무엇인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40년 간 광야생활을 하고 기원전 1500년 경에서 1400년 경 사이에 출애굽을 합니다. 또 가나안에 들어오는 것이 기원전 1400년 경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그 민족이 시작되는 것이 기원전 1400년 경 전후인데 1400년 경이라고 쳤을 때 왕조가 성립되는 것은 초대 왕 사울이 왕이 될 때까지 기원전 1050년입니다. 그러니까 들어와서 1050년까지는 이스라엘을 누가 다스리냐 하면 제사장과 사사가 다스립니다. 사사란 지금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법관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이 사법권을 가진 사람이 일종의 행정관으로서도 지도자였고 종교적 지도자인 제사장이 또 많은 부분을 지도자로서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좇지 않고 지난 번에도 살펴본 바와 같이 저주의 약속과 축복의 약속 사이에서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아서 늘 저주의 말씀 쪽에 서곤 했습니다. 그래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사사를 보내서 이스라엘을 구출하곤 하는 일이 일어나곤 합니다만 후기로 가면 사사들마저도 타락하고 맙니다.


그 중에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이때, 사무엘 다음 사울 왕으로 이어집니다. 그전 사사가 엘리입니다. 엘리라는 사사는 부패한 사사 중의 하나였습니다. 사무엘상 4 : 1 말씀부터 봅니다.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치고 블레셋 사람은 아벡에 진쳤더니 이스라엘을 대하여 항오를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장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 백성이 진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이에 백성이 실로에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연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바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 있었더라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히브리 진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찜이뇨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에 들어 온 줄을 깨달은지라 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가로되 신이 진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가로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일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어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같이 말고 대장부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블레셋 사람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육 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이었으며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삼상 4 : 1 ~ 11).


가나안 땅에 있었던 원주민들과 이스라엘 간의 대적 관계가 자주 일어나는데 가장 큰 대적이 블레셋입니다. 블레셋이라는 이름은 여러분이 익숙지 않겠지만 팔레스타인입니다. 지금 팔레스타인, PLO 해방기구의 아라파트를 의장으로 한 그의 민족이 바로 블레셋의 후예입니다. 그 땅 이름을 팔레스타인이라고 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블레셋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 사이는 가장 큰 적대관계가 있었고 그때도 전쟁 중인데 이 전쟁이 일어나는 것, 즉 블레셋이 강성해져서 이스라엘을 못살게 구는 것은 언제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했을 때입니다.


이 전쟁에서 4000명이 죽자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고 살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애굽에서 구해 낸 신인데 우리가 질 리가 있느냐, 이것은 분명히 우리가 무언가 잘못한 탓이다”라고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고 성막 이동하면서 만들었던 하나님의 성막의 법궤를 이 땅에 들여와서는 실로라는 땅에다 그 성막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아직까지 성전을 짓기 전입니다.


실로에 텐트로 쳐 놓은 성막 속의 법궤를 이 전쟁터에 가지고 나옵니다. 하나님을 앞세운다는 뜻입니다. 그래 가지고 이번에는 삼만 명이 죽습니다. 법궤도 빼앗깁니다. 이 법궤를 모시고 있던 사사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망나니였습니다. 재물을 가지고 오는, 제사 드리려고 오는 성도의 제물을 제사도 드리기 전에 빼앗아 먹거나 또는 제사 드리러 오는 부녀자들을 희롱하는 죄를 범한 자들로 악명이 높았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 엘 리가 그 두 아들을 꾸짖지 않곤 했습니다. 이때 나이 98세에 이른 엘리는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크게 꾸중을 받아서 저주를 받습니다. 이 날 법궤를 빼앗기던 날, 두 아들은 죽고 그 소식을 전해 듣고 그 자리에서 엘리는 몸이 비대하고 눈이 어두워지고 놀래서 의자에서 떨어져 넘어지면서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 며느리는 그 날 애를 낳다가 죽고 애이름을 이가봇이라고 명명하고 죽습니다. 이가봇이라는 뜻은 영광이 떠났다는 뜻입니다. 그 저주가 이스라엘 백성과 그 가문에 일어나는 것을 생생히 보여 주는 사건이 예레미야 7장에 기록된 하나님께서 내가 실로에 행한 일을 기억하라는 내용의 골자입니다. 이 경험을 이스라엘 백성이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명한 사건입니다. 법궤를 빼앗겼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법궤를 빼앗아 가도록 놓아 두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똑같이 이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버려서 성전이 훼파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 안에 있었던 모든 보물들을 빼앗기고 거기에 영광스럽게 칠하여 놓았던 금 같은 것을 다 빼앗기고 있는데도 이스라엘 왕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왕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없다, 정치적, 군사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된다고 생각해서 부지런히 정치, 경제, 국방 외교에 전념합니다. 결국 망합니다. 그런데 이 역사는 또 뒤에 가서 되풀이됩니다.


지금 여기 실로에서 있었던 이 일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났던 이 일에 비하면 그 앞에 오백년 전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 사건이 경험이 되었어야 했는데 그것이 유익한 경험으로 남지 않고 유다가 멸망하고 그 후에 기원전 539년에 바벨론은 페르시아에 의하여 멸망합니다. 페르시야 초대 왕인 고레스는 정책을 어떻게 쓰느냐 하면 각 민족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정책을 씁니다. 그래서 유대 포로들이 돌아가도록 고레스 칙령을 반포합니다. 기원전 538년부터 516년에 걸쳐서 약 22년동안 유대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일차 귀환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기원전 536년에 맨 처음에 귀환한 포로들이 먼저 와서 한 일이 무어냐 하면 성전을 쌓기 시작한 것입니다. 파괴된 성전을 쌓기 시작해서 성전의 기초를 완성합니다. 그러나 주변 국가들의 반대로 모함에 걸려서 방해를 받아 계속 연기되다가 기원전 522년에 이르러 페르시아 왕 다리오에 의하여 다시 허가를 받고 기원전 520년에 성전을 재건합니다. 성전이 완성됩니다. 그래 놓고 약 100년이 흘러서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상태가 어떠냐 하는 것이 말라기서에 나옵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床)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 1 : 6 ~ 10).


성전을 재건하고 100년도 흐르기 전, 그때가 기원전 430년 경입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상태가 이 꼴이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 들마저도 하나님을 멸시하고 성의없는 제사를 그저 하나의 요식적인 행위로 치르는 상태로까지 전락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그 역사적인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네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하나의 의식을 행하고 있는 것으로써 자기네들은 만사형통하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따르지 않습니다.


가나안 땅을 줄 때 약속했던 “거기 사는 족속 같이 하지 말라. 내 말을 들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그의 인생관이나 가치관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면서 “종교적 행위”만 유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종교적 행위를 방법론으로 써 먹습니다. 그래서 실패했던 것이 아까 이야기했던 실로 사건입니다. 블레셋에게 법궤를 빼앗겼던 사건이고 이제 유다 왕조가 멸망했던 사건입니다. 내가 필요한 것 하나도 도와주지 않은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고 완전히 정치적, 군사적으로 몰두해 버렸다가 멸망한 것이 유다 왕국의 멸망입니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이제 정신을 차리고 종교적인 회개와 각성이 일어나서 성전을 재개하고 종교적인 개혁이 일어났습니다만 그것도 나중에는 유야무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세상의 욕심을 하나도 채워주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에게나 불신자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시들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갖다 바치는 제사예배가 진심을 잊어 버리게 되고 정성이 없어지게 됩니다. 다른 말로 해서 세상을 사는 방법에 대해서 더 많은 마음이 기울어져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놓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가능한 한 돌이키게 하고 벌받지 않게 하려고 기다리고 계시는 그 시간을 우리는 우리의 욕심을 채우는 시간으로 쓰고 오히려 하나님이 싫어하는 쪽에다 더 많이 투자하고 욕심내어 달려가는 시간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어라고 한탄하셨습니까? 10절에 있는 말씀같이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일이 실제 역사적으로 일어납니다. 잘 아시다시피 바벨론 후에 일어난 나라가 페르시아이고 그 뒤를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이스가 세계를 제패합니다. 알렉산더가 죽자 그 휘하에 힘 있었던 네 장군이 헬라가 평정했던 소아시아와 이집트와 그리스의 전 지역을 넷으로 등분해서 통치하게 되는데 그 중에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통치했던 그 왕조의 통치자 중에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라는 장군이 있습니다. 나중에 알렉산더 뒤를 이은 네 통치자들, 네 나라를 분할한 이 왕국 간에 분쟁이 일어나게 되고 조그만 약소국가인 이스라엘은 이쪽에 붙었다. 저쪽에 붙었다 하면서 목숨을 연명합니다.


그러다 시리아쪽을 지배했던 곳에 붙었던 때도 있고 이집트쪽의 권세를 잡았던 곳에 붙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결국 그것이 나중에 화근이 되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다스렸던 안티오커스에 의하여 나중에 이스라엘이 침략을 당하는데 이때 아주 수치스러운 일을 당합니다. 이 민족을 완전히 말살하기 위해서 이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성전에 못된 짓을 합니다.


성전을 다 없애지는 않습니다만 훼방을 놓고 그 성전 안에다 자기의 두상을 만들어 걸어 놓고 거기에다 제사를 드리게 합니다. 그리고 어린 양의 피로 지내던 제사를 이스라엘 민족이 가장 싫어하는 돼지 피로 지내도록 강요합니다. 그래서 가증한 것들, 미운 물건들이 성전 안에 가득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스로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라고 합니다. 안티오커스는 그의 이름이고 에피파네스는 ‘신의 현현’이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신이라는 말입니다. 기원전 167년에 일어난 일인데 이 장군이 죽고 이스라엘이 다시 국권을 회복한 다음 그때 일이 치욕스럽기 때문에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를 미워해서 안티오커스 에피마네스라고 부릅니다. 에피파네스와 에피마네스는 상당히 뜻의 차이를 가집니다. 에피파네스는 신의 현현이라는 뜻인데 에피마네스는 미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가 미친 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인들이 미친 자들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와서 성전을 훼파하고 하나님의 이름에 모욕을 가하는 것은 하나님이 모욕을 당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했던 백성이 돌이키지 않기 때문에 매를 들을 수밖에 없어 일어난 일이 아닙니까? 에피파네스를 욕할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욕했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자기네들의 죄악된 성품을 원망했어야 옳지 않습니까? 그것이 구약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더 넓게 인간 모두의 본성이요 현실입니다. 우리를 포함한 인간들의 죄성의 그 지독스러운 미련함과 어리석음을 이것보다 더 잘 나타내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그런 의미에서 다른 종교적인 교훈이나 종교적인 멋진 말을 기대하시면 구약에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하십니다. 그것은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오히려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인간과 역사에 대하여 정확한 책은 없습니다. 인간이 무엇인가, 죄가 무엇인가,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이것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책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 가시면 구약적으로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인류 모두를 통털어서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 : 3 ~ 7).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묻습니다. 세상이 뭐 망한다구, 언제 망하느냐 몇만 년 전부터 인류가 있어 온 이래로 세상이 망한 적이 어디 있느냐. 물론 전쟁도 있고 기근도 있고 태풍도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망하지 않았다. 영원히 갈 것이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 노아 홍수와 소돔과 고모라에, 실로에 행한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가 알고 있고 유다의 멸망을 알고 있고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에 의한 성전의 모독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아니 더 넓게 역사를 보십시오. 나폴레옹의 죽음, 징기스칸의 죽음, 악하게 살았던 나라의 종말을 압니다. 바벨론과 앗시리아의 멸망을 보십시오. 그리스 로마의 끝을 보았습니다. 대일본제국의 종말을 눈으로 보았고 공산주의의 종말을 우리가 우리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 : 8 ~ 9). 하나님은 이 세상 역사를 끝맺을 날을 준비하시고 작정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영원히 멸망치 않기 위하여 중간중간 우리로 보고 깨달을 만한 사건들을 준비하여 우리가 돌이키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으므로 오히려 하나님을 비웃고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과 자비하심을 악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이것을 앞에 있었던 말씀과 같이 일부러 고의로 잊으려 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죄성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가능하면 하나님의 경고와 하나님의 말씀을 몰랐으면 좋겠다는 쪽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설교를 들으러 교회에 오실 때 잘한다 잘한다 하는 설교를 기대하고 옵니다. 여러분들이 잘못이 지적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잘못한 것을 목사가 보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이중적입니다. 세상에 나가면 세상적으로 살고 교회에 오면 가장 잘 신앙생활하는 신앙인 같은 얼굴을 해서 서로 짜고 살자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진면목을 들키면 화를 냅니다. 어떡하자는 말입니까? 그래 놓고 내놓고 그 길로 가버립니다.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시자 주님을 쫓아 버렸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의 죄를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달라야 됩니다. 여러분은 거듭난 자요, 하나님을 아는 자요, 말씀이 마음에 이해되는 자들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일어나는 거스르려는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생각하셔야 됩니다.


짧은 인생입니다. 이 짧은 인생, 이것을 잘 살기 위하여 영혼을 팔아먹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과 깨우치시는 말씀을 경홀히 여기지 마십시오. 인간은 참 어리석어서 하루를 위하여 1년을 팔아 먹을 수 있는 족속들입니다. 60평생을 잘난 척 하려고 영혼을 팔아 먹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그의 어리석음은 단순히 어리석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은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멸시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벌리신 사랑의 품을 외면하는, 참으로 가증스러운 죄인 것을 명심하셔야 됩니다. 남의 것을 훔치고 십일조를 안 내고 하는 정도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사랑과 긍휼을 외면하며 그것을 악용하는 가장 악질적인 것입니다.


이 죄에 여러분이 빠지지 마시고 이 어리석음을 고집 피우지 마시기를, 주의 말씀을 의지하여 권면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붙잡아 하나님 앞으로 끌로 가시고 십자가 앞에 여러분의 무릎을 꿇리시고 힘을 다하여 목숨을 걸고 신자로서의 생활을 다시 한번 결심하시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기록된 성경의 교훈들이 여러분의 인생에 유익한 밑거름이 되도록 노력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