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1-5
요한은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고, 말씀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고 말합니다. 산과 바다는 물론이고 밤하늘에 빛나는 수많은 별들도 다 말씀이 창조했다고 말합니다. 지금 지구촌을 뒤덮고 있는 온갖 생명도 다 말씀이 창조했다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 생명이 있다는 것은 신비 중의 신비입니다. 이 세상이 물질로 가득하다는 것도 신비이지만 생명이 있다는 것은 더더욱 놀라운 신비입니다. 아주 작은 미물 하나도 보십시오. 살아있는 것은 정말 놀랍도록 역동적이고 기묘합니다. 요한복음이 다른 복음서와 다른 점 중의 하나가 생명을 강조한다는 것인데 사실은 요한복음만 생명을 강조하는 게 아닙니다. 성경 전체가 생명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생명의 소중함을 강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처음으로 말했을 때 베드로가 나서서 죽음이 웬 말이냐고 항변했습니다. 주님께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큰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리고는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16:26)고 목숨의 소중함을 역설했습니다. 한 사람의 목숨이 온 천하보다 더 값짐을 역설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생명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글이나 영어에는 생명이라는 단어가 때문에 요한이 말하는 생명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인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리스어는 생명이라는 단어가 둘입니다. bios와 zoe입니다. ‘비오스’는 물리적인 생명 - 생체활동을 통해 발현되는 생명을 가리키고, ‘조에’는 비물리적인 생명 - 사회 내에서 자신이 가진 정치적인 위치나 태도를 통해 발현되는 생명을 가리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비오스’보다는 ‘조에’를 훨씬 중요한 생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비오스’는 동물이나 식물들도 가진 생명이지만 ‘조에’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차원 높은 생명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조에’를 그리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오하고 근원적인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 영원한 생명을 말할 때 ‘조에’를 사용했습니다. 그리스어 원문을 보면 요한복음이 말하는 생명은 거의 다 ‘조에’입니다.
3절과 4절을 보면 확연히 드러납니다. 요한은 3절에서 말씀으로 말미암아 온갖 것들이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에는 세상만물뿐 아니라 온갖 생명들이 다 포함됩니다. 이것은 모든 생명이 말씀의 창조물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3절이 말하는 창조된 생명들이 바로 ‘비오스’인 것입니다. 그런데 4절에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그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말씀에 의해 창조된 생명이 아닙니다. 말씀 안에 있는 생명입니다. 요한은 이 생명을 가리켜 ‘조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조에’는 창조된 생명이 아닌 겁니다. ‘비오스’는 창조된 생명이지만 ‘조에’는 창조된 생명이 아니라 태초부터 말씀 안에 있었던 생명입니다.
이처럼 생명에는 창조된 생명과 창조되지 않은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말이나 영어는 생명이라는 단어가 하나라서 구분이 잘 안 되지만 요한은 그리스어 ‘비오스’와 ‘조에’를 사용해 생명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비오스’는 사람의 생명을 가리키고, ‘조에’는 하나님의 생명을 가리킵니다. ‘비오스’는 일시적인 생명, 죽음의 필연에 갇힌 생명을 가리키고, ‘조에’는 영원한 생명, 죽음의 필연에서 해방된 생명을 가리킵니다. ‘비오스’는 형태가 있는 생명을 가리키고, ‘조에’는 형태가 없는 생명, 모든 생명을 생명이게 하는 생명을 가리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예수님은 이천년 전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습니다.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기 전까지는 ‘비오스’로서의 예수는 없었습니다.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는 순간부터 ‘비오스’로서의 생명이 시작된 겁니다. 예수의 ‘조에’는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기 전에도 있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기 전에도 말씀이 있었고, 이 말씀 안에 ‘조에’가 있었고, 예수님은 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니까 예수님의 ‘조에’는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기 전에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생명을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물론 ‘비오스’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명입니다. 그러나 ‘비오스’는 근원 생명이 아닙니다. 죽음의 필연에서 해방된 생명이 아닙니다. ‘비오스’는 죽음의 필연에 갇힌 생명이요, 쉬 흩어지는 생명이요, 쉬 썩어버리는 생명입니다. ‘비오스’는 절대로 ‘조에’가 될 수 없습니다. ‘비오스’를 아무리 잘 돌보고 활성화시킨다 해도 ‘비오스’가 ‘조에’로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비오스’는 죽었다 깨어나도 ‘비오스’일뿐입니다.
그러면 영생(영원한 생명)이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영원히 사는 것이 영생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오스’를 영원히 사는 것이 영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비오스’를 영원히 사는 것은 영생이 아닙니다. ‘비오스’를 영원히 사는 것은 저주이지 축복이 아닙니다. 영생은 ‘조에’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인 ‘조에’를 사는 것이 영생입니다.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이 영생이 아이나 지금의 생명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생명을 사는 것이 영생입니다. 예, 생명이라고 해서 다 같은 생명이 아닙니다. 생명에는 ‘비오스’도 있고 ‘조에’도 있어요. ‘비오스’는 창조된 생명이고, ‘조에’는 창조하는 생명입니다. ‘비오스’는 피조물의 생명이고, ‘조에’는 창조자의 생명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생명의 근원 진실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조에’라는 단어를 52회 사용했습니다. ‘조에’가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생명이 ‘조에’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조에’를 강조했습니다.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조에)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요20:31).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양으로 생명(조에)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요10:10). 예수님은 아예 자신을 가리켜 ‘생명(조에)의 떡’이라고 했습니다(요6:35,48). 이 생명이 곧 구원이고 영생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조에’에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오직 ‘비오스’에만 골몰합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은 항상 무엇을 먹을까 ‧ 무엇을 마실까 ‧ 무엇을 입을까에 골몰했습니다. 요즘은 건강을 위해 운동하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언제부터인지 먹는 방송이 유행입니다. 모든 텔레비전이 먹는 방송으로 도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도 먹방, 저기도 먹방입니다. 텔레비전의 인기에 힘입어 요리책도 엄청나게 팔리고 있고, 요리사들의 인기 또한 하늘을 치솟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관심이 몽땅 ‘비오스’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첫 번째로 유혹한 것도 ‘비오스’였습니다. 예수님이 40일 동안 금식을 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비오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밥이었습니다. 사탄은 이 사실을 꿰뚫고 예수님에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유혹했습니다. 여기서 사탄의 관심은 단지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사탄의 진짜 관심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온 세상에 보여주라는 거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임을 멋지게 보여주라는 거였습니다. 그리고는 친절하게 아이디어까지 제공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길은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는 것이지 않겠느냐, 그러니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기막힌 아이디어까지 제공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비오스’가 원하는 바를 충족시켜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너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따를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예, 오늘도 똑같습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비오스’가 원하는 바를 충족시켜달라고 아우성입니다. 정치인은 내가 빵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니 나에게 표를 달라고 아우성이고, 사람들은 박정희가 우리나라의 빵문제를 해결했으니 그가 위대한 지도자라고 아우성입니다. 사실은 이게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하며 했던 소리인데 학자든, 정치가든, 종교인이든 하는 이야기가 똑같습니다. 하나같이 하는 이야기는 ‘비오스’의 번영이고, ‘비오스’의 충족입니다. 그리스도인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도 ‘비오스’의 번영과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자들을 열심히 추종하고 떠받듭니다. 예수를 믿으면 비오스가 잘 되고, 비오스가 복 받는다는 이야기에 홀딱 넘어갑니다. 이것이 사탄의 소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합니다. 그저 좋으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굳게 믿고 돌들로 떡덩이를 만들어달라고 울고불고 난리입니다.
예수님은 어땠나요? ‘비오스’를 충족시켜주라는 사탄의 소리에 ‘얼씨구나 좋다’ 화답하셨나요? 아닙니다.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박수치고 환영할 소리라는 건 아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는 신명기의 말씀을 들이대면서 사탄의 소리를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비오스’를 부정한 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일단 사람이 ‘비오스’를 가진 존재임을 인정했습니다. 사람은 ‘비오스’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떡을 먹어야 산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비오스’를 인정하는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비오스’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 ‘비오스’도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지만 ‘비오스’보다 더 중요한 생명이 있는데 그 생명은 ‘조에’이고, 이 ‘조에’는 떡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사는 생명이라는 것도 함께 인정했습니다. 아니, 그걸 강조했습니다. ‘비오스’도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지만 ‘조에’야말로 진짜 생명이요 근원 생명이다,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생명은 ‘비오스’가 아니라 ‘조에’다, 내가 이 땅에 온 것도 ‘비오스’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에’를 주기 위해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니 돌들로 떡덩이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돌들로 떡덩이를 만드는 순간 ‘비오스’가 전부가 되어버리는데, 예수는 ‘비오스’를 위해 봉사하는 자가 되어버리는데 어떻게 돌들로 떡덩이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깨끗이 거절하는 게 당연했습니다.
그리스도인도 그래야 합니다. 생명에 대해서 예수님과 같은 시각을 가지고 예수님과 같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비오스’도 중시해야 하지만 ‘조에’에 더 깊은 관심을 갖고 ‘조에’를 사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어찌하든지 ‘조에’를 살기 위해 결단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바울이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 여기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조에’를 선택하고 ‘조에’를 살라는 말입니다. 순간순간 ‘조에’를 선택하고 살 수 있도록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깨어 있으라는 말입니다.
인생살이를 보면 사람마다 천태만상입니다. 사람의 얼굴이 제각각 다르듯이 인생살이도 사람마다 각양각색입니다. 그런데 각양각색의 인생살이를 크게 나누면 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살림살이’이고, 또 하나는 ‘죽임살이’입니다. ‘살림살이’는 ‘조에’를 사는 것이고, ‘죽임살이’는 ‘비오스’를 사는 것입니다.
아주 단순한 구분법 같은데 사실은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기본 메시지입니다. 아담 이후로 모든 인간은 ‘비오스’를 살고 있다, 죽임살이를 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살이가 아니다, 너희는 ‘비오스’를 넘어 ‘조에’를 살아야 한다, ‘비오스’를 넘어 ‘조에’를 사는 것이 사람이 살아야 할 진정한 인생살이다, 이 ‘조에’는 말씀 안에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가 곧 ‘조에’요 ‘조에’의 떡이다, 그러니 나를 먹어라, 나를 먹고 ‘조에’를 살라,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기본 메시지입니다.
성경은 잘 읽어보십시오. 성경은 놀랍게도 ‘비오스’에 올인하는 자들을 가리켜 ‘죽은 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주님을 따르겠다고 했을 때 예수님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 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마8:22). 여기서 앞의 ‘죽은 자’는 죽은 시신을 가리키지만, 뒤의 ‘죽은 자들’은 살아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분명히 ‘비오스’가 살아있는 자들을 가리켜 예수님은 ‘죽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또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는 말씀도 했습니다(요5:25). 여기서도 ‘죽은 자’는 죽은 시신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바울도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향해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했습니다(엡2:1). 지금 버젓이 살아 있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향해 ‘죽었던 너희를 그리스도 예수께서 살리셨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이처럼 ‘비오스’만의 생명을 생명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비오스’만의 생명은 생명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이라고 보았습니다. 독일 뭰헨에서 정신과 의사로 일하고 있는 베르너 후트도 같은 뉘앙스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후트가 많은 내담자들을 만나면서 가장 많이 받은 느낌이 세 가지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내면이 죽었다는 느낌이고, 둘째는 이웃과의 관계가 방해받고 있다는 느낌이고, 셋째는 삶의 방향을 상실했다는 느낌이라고 했습니다(예수 생명의 문. 안셀름 그륀. 15쪽). 예, 이것이 ‘조에’가 없는 생명의 실상입니다. 우리 모두도 날마다 경험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인생살이 자체가 ‘조에’가 없는 생명의 실상을 날 것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비오스’를 미워해야 합니까? ‘비오스’를 미워하는 것은 예수님의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거부한 것은 사탄의 제안이었지 ‘비오스’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비오스’를 버리라거나, ‘비오스’는 필요 없다거나, ‘비오스’는 악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비오스’를 하나님이 주신 생명으로 인정하고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기도 했습니다. 세례 요한과 그의 제자들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습니다만 예수님은 즐겁게 먹고 마셨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먹고 마시는 것을 좋아했던지 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욕할 정도였습니다(마11:19). 정말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금욕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비오스’를 미워하거나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비오스’를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나 ‘비오스’만 즐거워하지는 않았습니다. ‘비오스’도 즐거워했지만 ‘조에’에 더 집중했습니다. ‘비오스’보다는 ‘조에’에 더 깊은 관심을 가졌고, ‘조에’를 살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했습니다. ‘비오스’를 죽이기까지 순종했습니다. ‘조에’가 ‘비오스’보다 천 배, 만 배 더 소중하기 때문에, ‘조에’가 생명의 태양이라면 ‘비오스’는 생명의 촛불에 불과하기 때문에, ‘조에’를 사는 것만이 진짜 사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이 당신의 ‘비오스’를 희생하는 것만이 온 생명이 ‘조에’를 사는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기꺼이 당신의 '비오스‘ 희생하셨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조에’가 ‘비오스’보다 천 배, 만 배 더 소중합니다. ‘조에’가 생명의 태양이라면 ‘비오스’는 생명의 촛불에 불과합니다.
물론 ‘조에’는 찬란하지도 않고,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세상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것은 ‘조에’가 아니라 ‘비오스’입니다. 사람들이 열광하고 욕망하는 것도 ‘조에’가 아니라 ‘비오스’입니다. 그러나 ‘비오스’는 잠간 있다가 사라지는 아침안개와 같습니다. 잠시 피었다가 지는 한 송이 꽃과도 같습니다. ‘비오스’가 생명의 촛불이라면 ‘조에’는 생명의 태양입니다.
인생살이에서 정말 소중한 것은 사회적으로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가 아닙니다. 많은 것을 성취했느냐 성취하지 못했느냐가 아닙니다. 인생살이에서 정말 소중한 것은 ‘조에’를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지식이 많고 권세가 높다 해도 ‘비오스’를 살았으면 가련하고 어리석은 인생을 산 것이고, 아무리 돈이 없고 지식이 없고 권세가 없다 해도 ‘조에’를 살았으면 아름답고 풍성하고 지혜로운 인생을 산 것입니다. ‘비오스’를 살았으면 죽임살이를 한 것이고, ‘조에’를 살았으면 살림살이를 한 것입니다. ‘조에’만이 참 생명입니다. 예수의 생명만이 ‘조에’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생명의 근원 진실이고, 인생의 근원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비오스’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이 세상이 다들 ‘비오스’에 열광하고 ‘비오스’를 과시하는 세상이다 보니 ‘비오스’에 현혹되기 쉬운 게 사실이긴 하나 그렇다 하더라도,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조에’를 사는 길로 잠잠히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조에’를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육체의 죽음에 연연할 것도 없고,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할 것도 없어요. ‘조에’는 육체의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이고, 육체의 죽음과 무관한 생명이니까요. ‘조에’ 안에는 ‘비오스’도 있지만, ‘비오스’ 안에는 ‘조에’가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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