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1-5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님이고, 예수님의 핵심은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의 떡이다(요6:48),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14: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11:25)고 말한 대로 예수님의 핵심은 생명입니다. 좀 더 폭넓게 보면 사실은 창조의 핵심이 생명이고, 삶의 핵심이 생명이고, 역사의 핵심이 생명이고, 구원의 핵심이 생명입니다. 요한은 여기에 한 마디를 덧붙였습니다.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다(1:4). 태양이 빛이 아니고, 영원불변의 법칙이 빛이 아니고, 윤리도덕이 빛이 아니고, 생명이 빛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보고 따라야 될 가장 찬란한 빛은 오직 생명이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생명만이 빛입니다. 생명만이 가장 찬란한 빛입니다. 생명 이외의 다른 것은 다 그 빛을 반사하는 것뿐이지 참 빛은 아닙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어서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말을 합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5).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이 가장 찬란한 빛이고, 이 빛만이 사람들이 보고 따라야 할 유일한 빛인데 이 빛이 어둠에 비쳐도 어둠이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번역본은 어둠이 이기지 못한다고도 했습니다. 이 번역이든 저 번역이든 매우 절망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지만 어둠이 깨닫지 못합니다. 여기서 어둠은 일차적으로 ‘죄악된 세상’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9-10절을 보면 연결이 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고 했으니까 5절이 말한 어둠이 ‘죄악된 세상’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4절과 묶어서 생각하면 어둠이 ‘사람의 이성’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4절에서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고, 5절에서 ‘빛이 어둠에 비쳤다’고 했으니까 5절의 어둠은 4절의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고, 좀 더 구체적으로는 사람의 이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면 뜻이 좀 더 선명해집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는 말씀은 ‘빛이 온 세상이 비치지만 사람의 이성이 그 빛을 이해하지 못한다, 즉 객관적인 거리를 두고 분석하거나 해체하거나 조작하거나 소유하지 못한다는 뜻이 됩니다.
옳습니다. 생명은 사람의 이성으로 분석하거나 해체하거나 조작하거나 소유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생명의 실체는 결코 이성의 레이다 망에 포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사람의 이성이 규명할 수 없는 것처럼 생명의 실체 또한 규명할 수 없습니다. 무생물과 생물의 차이도 규명이 불가능하고, 생물과 생명의 차이도 규명이 불가능한데 생명의 실체를 무슨 수로 규명하겠습니까? 모든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생명이 생명의 뿌리인데 그 생명의 신비를 무슨 수로 규명하겠습니까? 아마 영원히 불가능할 겁니다. ‘조에’로서의 생명은 말할 것도 없고, ‘비오스’로서의 생명조차도 영원히 신비로 남게 될 겁니다. 그런 면에서 요한의 말은 100% 사실입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지만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합니다.
매우 절망적인 이야기이지만 이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은 이 절망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한다는 이 처절한 절망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이 시작되고, 이 절망을 인식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정수입니다. 이 절망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 확신에 매달리는 것이거나, 자기 희망과 욕망을 투사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기독교 신앙의 언저리를 맴도는 것이거나 하는 정도에 불과하지 기독교 신앙의 정수에 눈떴다고 할 수는 없어요. 기독교 신앙의 정수에 눈뜬 자는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요한이 그랬습니다. 요한은 이 빛을 보았습니다. 이 빛을 보았기 때문에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빛을 본 자는 빛을 보지 못한다는 걸 인식합니다. 그러나 빛을 보지 못한 자는 빛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참 생명을 얻은 자는 자기 안에 참 생명이 없다는 걸 인식합니다. 그러나 참 생명을 얻지 못한 자는 자기 안에 참 생명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참으로 신비한 역설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와 같은 역설로 가득합니다. 역설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정수입니다.
에덴동산 이야기가 말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에덴동산 중앙에는 두 나무가 있었습니다.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창2:9). 자, 동산 중앙에 왜 두 나무가 있었을까요? 차분히 생각해봅시다.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가 말하는 것은 생명이 세계의 중심이요 삶의 중심이라는 메시지, 아담이 갖고 있는 생명은 근원 생명이 아니고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가 근원 생명이라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모든 생명이 자기 안에 갖고 있는 생명은 ‘비오스’에 불과하고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만이 근원 생명인 ‘조에’다, 그리고 모든 ‘비오스’는 그 생명나무로부터 ‘조에’를 공급받아야 한다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좀 독특합니다. 이 나무는 단지 나무로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나무에는 ‘이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안 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는다’(창2:17)는 하나님의 금령이 붙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금령을 말씀하셨을까요? 하나님이 금령을 말씀하신 것도 생명나무를 동산 중앙에 두신 것과 연결되어 있는데 이 금령이 말하는 바는 결국 이겁니다. ‘아담아, 네가 지금 갖고 있는 생명은 생명나무 열매를 먹어야 하는 생명이란다. 생명의 근원은 네가 아니고 저 생명나무야. 저기 생명나무가 보이지? 저 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참 생명을 살 수 있어. 그런데 말이다, 저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려면 내가 명령한 금령을 지켜야 돼. 다시 말하면 나와 함께 해야 돼. 만일 나와 함께 하지 않으면 너는 반드시 죽는다.’
예, 바로 이것이 생명의 근원 진실입니다. 아담의 생명은 근원 생명이 아니라는 것, 근원 생명은 아담 밖에 있다는 것, 그 근원 생명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만 누릴 수 있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절대로 참 생명을 살 수도 없고 누릴 수도 없다는 것이 생명의 근원 진실이요 삶의 근원 진실입니다. 성경은 이 근원 진실을 창세기 서두에 밝혔습니다.
요한도 예수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 근원 진실을 한 마디로 짧게 축약했습니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다.” 정말 촌철살인이라고 할 만한 축약인데 이 한 마디야 말로 100% 진실입니다. 생명은 사람 안에 있지 않습니다. 생명은 물, 공기, 불, 흙 속에 있지 않습니다. 생명은 영혼에 있지 않습니다. 생명은 도덕에 있지 않습니다. 생명은 종교에 있지 않습니다. 생명은 국가에 있지 않습니다. 생명은 말씀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아담이나 우리나 생명의 원칙은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만이 참 생명, 영원한 생명, 하나님의 생명을 사는 길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그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죽음에 떨어졌습니다. 근원 생명, 하나님의 생명을 살지 못하고 죽임살이를 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갇혔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100% 진실이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아담 안에는 생명이 없다는 것, 아담의 생명은 근원 생명이 아니라는 것, 아담의 생명은 죽음에 갇힌 생명이요 죽임살이를 할 수밖에 없는 생명이라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결국 아담의 불순종이 하나님 말씀의 진실성을 증명한 셈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진실성은 오늘도 유효합니다. 모든 사람은 오늘도 여전히 죽음에 갇혀 죽임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위대한 문명을 이룬 것도 사실이지만 죽음에 갇혀 죽임살이를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약간의 차이가 없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윤리적으로 죽임살이를 하고, 어떤 사람은 비윤리적으로 죽임살이를 한다는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동일합니다. 비윤리적이든 윤리적이든 결국은 죽임살이입니다. 도덕적인 잣대로 볼 때는 매우 훌륭해 보일 수도 있고, 반듯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의외로 숨 막히는 죽임살이가 자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주 포악하고 잔인한 윤리적 폭력이 자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윤리적 폭력’이라니 그게 말이 되느냐, 윤리를 그렇게 모독해도 되느냐고 이의를 제기하실 분도 있겠으나 인간 사회에는 언제나 윤리적 폭력이 자행되어왔습니다. 인간은 거의 언제나 신과 정의의 이름으로 전쟁을 했고, 진리의 이름으로 폭력을 자행했고, 도덕의 이름으로 억압을 일삼아왔습니다. 지극한 윤리를 내세워 사람의 영혼을 억압하고 질식시켜왔습니다. 윤리가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윤리가 필요 없다는 게 아닙니다. 윤리는 필요한데 필요한 윤리조차도 생명을 죽인다는 이야기입니다. 윤리가 ‘조에’를 사는 길이 되지는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는 것 외에는 그 무엇도 ‘조에’를 사는 길이 못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이 진실을 포도나무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고 했습니다(요15:5). 가지는 자기 스스로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가지가 생명을 사는 길은 오직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길 밖에 없습니다. 포도나무로부터 물과 양분을 공급받아야 살지 붙어 있지 않으면 곧바로 메말라 죽습니다. 사람이 바로 가지입니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을 살 수 없어요.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에게 달라붙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 ‘조에’이신 예수님 안에 거해야만 살 수 있습니다. 바울이 기회 있을 때마다 ‘그리스도 안에’를 반복해서 말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생명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만이 생명을 사는 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를 그토록 강조했던 것입니다.
생명의 특성은 주체적이거나 객체적이지 않습니다. 생명의 특성은 관계적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만 해도 관계를 통해 살아갑니다. 부모가 있고, 이웃이 있고, 산천초목이 있고, 태양이 있고, 달이 있고, 공기가 있고, 온갖 생명들이 있기에 내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뿐 아닙니다. 모든 생명은 관계적입니다. 관계가 막히면 어떤 생명이라도 다 죽습니다. ‘조에’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면 ‘조에’가 죽습니다. 말씀과 내가 통하고, 예수와 내가 통하고, 하나님과 내가 통해야 ‘조에’가 살지 그러지 않으면 ‘조에’는 죽습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는 예수님의 비유는 생명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탁월한 비유입니다.
한 걸음 더 깊이 추적해볼까요? 사실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생명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십니다. 하나님은 왜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걸까요? 그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삼위일체가 아니었을 때를 생각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이 만일 삼위일체가 아니시고 단독자라로 존재하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이 과연 생명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과연 사랑일 수 있을까요? 전혀 불가능합니다. 생명이란 본질적으로 관계적인 것이고, 사랑 또한 생명처럼 관계적인 것인데 단독자가 어떻게 생명일 수 있겠습니까? 단독자가 어떻게 사랑일 수 있겠습니까? 전혀 불가능합니다. 적어도 둘이라야 가능한데 사실 둘로는 부족합니다. 둘로는 사랑의 풍성함도 살아날 수 없고, 생명의 풍성함도 살아날 수 없습니다. 최소한 셋으로 존재하셔야만 사랑이 풍성한 사랑일 수 있고, 생명이 풍성한 생명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생명이시오 사랑이시니까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것이고, 또 삼위일체이시니까 생명이실 수 있고 사랑이실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는 것은 하나님조차도 단독자로서는 생명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생명은 결코 주체이거나 개체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생명은 오직 관계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에덴동산 이야기도 그것을 말하고 있고, 예수님도 그것을 말하고 있고, 요한도 그것을 말하고 있고, 바울도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존재가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서두에 말한 대로 생명은 사람의 이성으로 분석하거나 해체하거나 조작하거나 소유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닙니다. 생명은 신비입니다. 결코 규명되지 않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는 있습니다. 생명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생명은 멈추어 있지 않습니다. 생명은 개체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내 안에 있거나 너 안에 있지 않습니다. 생명은 나와 하나님 사이에 있고, 나와 너 사이에 있습니다. 생명은 수많은 관계, 수많은 만남을 타고 흐릅니다. 바람처럼 강물처럼 끝없이 움직이고 흐릅니다.
이 생명이 창조의 핵심입니다. 삶의 핵심입니다. 역사의 핵심입니다. 구원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이 가장 찬란한 빛입니다. 모든 사람이 보고 따라야 할 참 빛입니다. 그러니 삶의 초점을 어디에 맞춰야 하겠습니까? 재산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지식에 맞추면 되겠습니까? 지난 설교에서도 말했습니다만, 인생살이에서 진짜 소중한 것은 사회적으로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가 아닙니다. 많은 것을 성취했느냐 성취하지 못했느냐가 아닙니다. 인생살이에서 진짜 소중한 것은 생명을 살았느냐 죽음을 살았느냐 입니다. ‘조에’를 살았느냐 ‘비오스’를 살았느냐입니다. 그리고 ‘조에’를 사는 것이 진짜 풍성한 인생을 사는 것이고, 진짜 복을 받는 것이고, 알짜배기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련되고 윤리적인 방식으로 죽임살이를 하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거칠고 비윤리적인 방식으로 죽임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도 신앙으로 죽임살이를 하는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쩌면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으로 죽임살이를 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에 눈뜨지 못하고 자기 안에 갇혀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다 죽임살이를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러분, 신앙이 뭡니까? 신앙은 죽임살이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죽임살이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죽임살이를 회개하고 살림살이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사는 일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것입니다. 생명을 사는 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요 말씀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사는 일이 내 힘으로 되지 않고, 내 지혜로 되지 않고, 내 성실함으로 되지 않고, 내 신앙의 뜨거움으로 되지 않는다는 걸 인식하고 최대한 하나님 안에 거하고 말씀 안에 거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이고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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