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요한3-하나님과 사람의 유비-언어

새벽지기1 2015. 11. 25. 22:34

 

요한복음1:1-3

 

요즘 저의 화두는 요한복음1장 1절에서 3절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이라는 사실을 계속 묵상하며 지냅니다.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이 말씀으로 존재하시고 말씀으로 행하신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전지전능하시고, 영원불변하시고, 자존자시고, 공의로우시고, 창조자시고, 역사의 주관자이신 게 아니라 항상 말씀으로 존재하시고 말씀으로 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말을 하는 존재라는 사실도 훨씬 심층적으로 이해하게 됐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왜 말을 할까요? 모든 피조물 가운데 오직 사람만이 말과 글로 소통하는데 왜 사람은 말을 하며 살까요? 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 물음을 묻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왜 공기를 호흡하며 사는지를 묻지 않고 그냥 살아온 것처럼 사람이 왜 말을 하는지를 묻지 않고 그냥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묵상하면서 처음으로 사람이 말하며 산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왜 말을 하며 사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말을 하고 글을 쓰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이 말씀이기 때문이고, 이차적으로는 사람이 말씀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저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강조해왔습니다. 기회만 있으면 그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어리석게도 인간이 말을 하는 존재라는 사실과 하나님이 말씀이시라는 사실이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인간이 자유의 존재라는 것, 이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만 하나님의 형상과 연결시켰지 말을 하는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의 형상과 연결시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존재하시고 말씀으로 행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깊이 묵상하면서 사람이 말을 하는 존재인 것은 하나님이 말씀이시기 때문이고,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사실 이것은 그렇게 대단한 깨달음이 아닙니다. 특별한 사람이나 발견할 수 있는 심오한 진리가 아닙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것, 말씀으로 세상이 창조됐다는 것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아는 상식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언어적 존재라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는 사실과 사람이 언어적 존재라는 사실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온갖 말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이 사실을 발견하고 굉장히 놀랐습니다. 첫째로 지금까지 성경을 읽고 설교하면서도 이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에 놀랐고, 둘째로 사람이 말을 하고 글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에 놀랐고, 셋째로 사람이 말을 하고 글을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영광이요 축복인지를 깨닫고 놀랐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인간 세계에 언어가 있다는 게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가 말을 하며 산다는 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물론 곰곰이 생각해보면 신기하지 않은 게 하나도 없습니다. 태양이 쉼 없이 불타오르는 것도 신기하고, 지구가 허공에 떠 있는 것도 신기하고, 지구가 하루에 한 바퀴씩 도는 것도 신기하고, 공기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것도 신기합니다. 내가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다는 것도 사실은 무척 신기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말을 한다는 것도 무척 신기한 일입니다. 사람과 동물은 의외로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없는 건 아니지만 동물도 사람처럼 사회를 이루어 삽니다. 동물도 사람처럼 슬픔을 느끼기도 하고, 미미한 수준이지만 생각도 하고, 꼼짝 못하게 가두어 놓으면 풀어달라고 몸부림을 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공유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자유와 언어입니다. 자유와 언어는 인간에게만 있는 매우 독특한 현상입니다. 삼라만상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자유를 희구하고 언어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가진 하나님의 형상 중에서도 가장 고유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성도 하나님의 형상에 속하고, 자유도 하나님의 형상에 속하지만 언어 또한 고유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형상에 속한다는 걸 말해줍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사람이 말을 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가장 직접적이고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동안 말을 하면서도 그걸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았습니다. 말을 하는 내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을 생각지 않고 살았습니다. 아마 저뿐 아닐 겁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도 저처럼 말만 하며 살았지 말하는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인지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존재하시고 말씀으로 행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말하며 사는 것이로구나, 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사람과 언어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근원적으로 엮여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세상 만물이 존재하고 난 뒤 어느 때인가 언어가 생겼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지구에 출현하고서도 한참이 지난 후에 언어가 생겼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말만 해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함으로써 시작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피상적인 사실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은 훨씬 근원적인 진실을 말합니다. 성경은 언어가 만물보다 앞선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언어를 발명한 것이 아니라 언어가 인간보다 앞서며, 언어가 모든 존재를 불러온다고 말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요한의 선언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창세기의 선언이 바로 그렇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말은 말씀이 만물보다 앞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친지를 창조했다’는 말은 만물이 말씀으로 인해 존재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인간과 언어의 관계를 말해주는 유비이기도 합니다. 즉 말이 인간보다 앞서고, 말이 사물을 존재로 드러나게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유비이기도 합니다.

 

상당히 생소하고 어려운 이야기인데 좀 쉽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세상 만물이 존재하는 것을 당연시하지 않고 기이하게 생각하면서 ‘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가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사람이 말을 한다는 것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이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온갖 생물을 보십시오. 제각각 기이하고 독특한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합니다. 어떤 놈은 냄새로, 어떤 놈은 소리로, 어떤 놈은 몸짓으로, 어떤 놈은 전파로, 어떤 놈은 파장으로, 어떤 놈은 더듬이로, 어떤 놈은 온도로, 어떤 놈은 감각으로 주변을 파악하고 종족끼리 의사소통을 합니다. 반면에 사람은 언어로 의사소통을 합니다. 유네스코 조사에 따르면 지구상에 약 6000개의 언어가 있다고 합니다. 깊은 원시림에서 현대 문명과 단절된 채 신석기 시대의 문명을 그대로 이어받아 사는 종족들도 다 말을 합니다. 문자가 없는 종족은 있어도 말이 없는 종족은 없습니다. 우리 선조들 또한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전에도 말을 했습니다.

 

하여, 다시 묻겠습니다. 인간은 왜 말을 할까요? 생물학적으로만 보면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가 98.4% 동일하다고 하는데 침팬지는 왜 말을 하지 않고 인간은 말을 할까요? 인간의 뇌가 특별히 진화해서일까요? 살다보니 말이 필요해서 발명한 것일까요? 성경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기 때문에 말을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뇌가 진화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 언어능력이 생긴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유전자 속에 언어 정보를 넣어주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를 보십시오. 다른 피조물은 다 말씀으로 창조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람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었다고 말합니다. 말씀으로 존재하시고 말씀으로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인간 속에 뭐가 있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말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었으니까 사람 속에는 당연히 말이 있어야 합니다. 말할 수 있는 능력, 즉 인간의 유전자 속에 언어 정보가 들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었다는 말이 참말이 됩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좀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셨습니다. 아담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아담이 각종 생물들을 뭐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아담에게 이끌어갔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이끌고 온 생물들을 보고 각각 뭐라고 불렀습니다. 그러자 그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습니다(2:19).

여기서 아담은 처음부터 이름 짓는 자로 나옵니다. 그리고 아담이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아담이 처음부터 언어적 존재였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언어가 창조 이후의 어느 때에 발명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언어를 가진 존재로 출발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아담이 명한 것이 이름이 됐다는 것은 단지 이름을 붙여주었다는 기능을 설명한 게 아닙니다. 아담이 명한 것이 ‘이름이 됐다’는 것은 아담이 이름을 부름으로써 ‘존재가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는 그저 물질덩어리에 불과했는데 이름을 부름으로써 비로소 의미를 가진 존재로 드러나게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름을 부름으로써 비로소 존재로 인식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지금 오른 손을 올렸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순간 제가 오른 손을 올렸다는 것을 인식하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인식하지 못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제가 오른손을 올렸다고 인식하셨습니까? ‘손’이라는 언어가 있고, ‘오른쪽 왼쪽’이라는 언어가 있고, ‘올리고 내리고’라는 언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런 언어가 없다면 제가 오른 손을 올려도 오른손을 올렸다는 인식을 하지 못합니다. 개나 고양이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개나 고양이가 사람처럼 사물을 인식할까요? 제가 오른손을 올렸다고 인식할까요? ‘어라, 저 털보가 오른손을 번쩍 들었네.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그러는 거 아냐?’라고 인식할까요? 결코 못합니다. 기껏해야 제 몸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날쌔게 도망칠 뿐입니다. 오른손이냐 왼손이냐, 손이냐 발이냐, 그런 것에는 애당초 관심도 없고 인식하지도 못해요. 꽃도 꽃이라고 인식하지 않습니다. 개나 고양이에게는 꽃이 특별하지 않아요. ‘어? 저기 꽃이 있네?’하고 다가가지 않습니다. 꽃이든 돌이든 쇠막대기든 다 똑같아요. 그냥 뭐가 있을 뿐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개나 고양이는 사람처럼 인식하지 못할까요? 지능이 낮아서일까요? 눈이 침침해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언어가 없기 때문입니다. ‘손’이라는 언어가 없고, ‘오른쪽 왼쪽’이라는 언어가 없고, ‘올리고 내리고’라는 언어가 없기 때문에 오른손을 올렸다는 인식을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도 언어가 없으면 개나 고양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개나 고양이처럼 어떤 움직임을 포착할 뿐이지 오른손을 올렸다는 인식은 못합니다. 우리가 꽃을 꽃으로 인식하는 것도 꽃이라는 식물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꽃이라는 언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에서 이런 언어의 신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여기서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내가 이름을 불러줄 때 꽃은 비로소 나에게 꽃이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언어학자 소쉬르나 철학자 하이데거도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소쉬르는 “이름을 갖지 못한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습니다. 창세기 2장 19절이 말하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각종 생물들이 아담에게 이름을 얻음으로써 살아있는 ‘무엇’에서 고유한 ‘존재’로 존재성을 획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든 만물도 그렇습니다. 꽃도 꽃이라는 이름이 없으면 꽃으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꽃이라는 언어를 통해서만 꽃이 꽃으로 자기 존재를 드러냅니다. 그런 면에서 하이데거가 말한 대로 ‘언어는 존재의 집’입니다. 적어도 인간에게는 그렇습니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것은 이겁니다. 하나님이 말씀의 존재이듯 사람은 언어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옳습니다. 사람은 언어적 존재입니다. 사람은 오직 언어를 통해서만 존재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언어적 존재입니다. 다른 피조물은 사물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지만 사람은 사물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지 않고 언어를 통해 인식합니다. 사물이 있기 때문에 사물을 인식하는 게 아니라 언어가 있기 때문에 사물을 인식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이 언어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언어가 인간을 지배합니다. 인간의 삶은 철저하게 말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철저하게 언어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사람의 됨됨이도 언어에 의해 결정됩니다. 어떤 언어를 듣고 사느냐, 어떤 언어를 사용하며 사느냐가 그 사람의 됨됨이를 결정합니다.

또 언어는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무기이기도 하고 문명을 건설하는 망치이기도 합니다. 만일 언어가 없었다면 인간은 아주 오래 전에 멸망했을 것입니다. 수천 번, 아니 수만 번 멸망했을 것입니다. 인간이 지금까지 멸망하지 않고 생존하는 것은 언어라는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고, 인간이 지금과 같은 놀라운 과학기술 문명을 성취한 것도 언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인간의 언어적 존재입니다. 신체의 외형이 인간처럼 생겼다고 해서 인간이 아닙니다. 언어가 있기 때문에 인간입니다. 언어가 없으면 인간이 아닌 동물입니다. 침팬지보다 조금 나은 동물, 인간의 외형을 닮은 동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이 언어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엄청난 착각입니다. 인간이 언어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언어가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언어가 인간에게서 비롯되지 않고 하나님에게서 비롯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언어의 씨앗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사람과 언어와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존재라는 사실이야말로 하나님의 형상 중 가장 빛나는 형상이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말을 하는 가장 일상적인 행위야말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최고의 절정이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언어생활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