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1-3
요한복음의 첫 문장인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은 창세기의 첫 문장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보다 훨씬 근원적이고 심오한 말씀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 가장 심오하고 가장 근원적이고 가장 풍부한 진실을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파고파도 끝없이 광맥이 뻗어있는 노다지와 같은 말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한 번 보고 지나칠 수는 없습니다. 좀 더 어슬렁거리면서 깊이 묵상하고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의 정체성과 관련해 살펴봤는데 오늘은 이 말씀 속에 담긴 심오하고 풍부한 진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물어야합니다. 요한은 왜 태초에 말씀이 있다고 했을까요? 왜 ‘로고스’(말씀)가 하나님이라고 했을까요?
‘로고스’는 요한이 살던 당시의 그리스 세계에서 누구나 들으면 아는 보편적인 단어입니다. ‘로고스’는 ‘말하다’의 명사형입니다. ‘로고스’는 일차적으로는 ‘말’을 뜻합니다. 그러나 ‘말’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우주 생성의 보편적 원리를 로고스라고 생각했습니다. 만물의 법칙, 우주적 질서, 신성 등을 다 로고스라는 개념으로 이해했습니다. 만물의 법칙을 이해하는 인간의 이성까지도 로고스라는 개념에 포함시켰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로고스가 곧 하나님이시라고 말했습니다. 꽤 많은 신학자들은 이 표현을 보고, 요한이 그리스의 영지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로고스를 하나님이시라고 말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피상적인 관찰일 뿐입니다. 지식의 차원에서 접근한 것일 뿐입니다. 요한이 로고스를 하나님이시라고 표현한 것은 그리스 사상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히브리 사상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꿰뚫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는 이 표현은 구약 전체를 한 마디로 축약한 것입니다.
창세기가 말하는 하나님, 이스라엘의 역사가 말하는 하나님을 보십시오. 6일 동안의 창조 이야기를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말씀의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창조가 이루어질 때마다 빼놓지 않고 “하나님이 이르시되”(창1:3,6,9,14,20,24,26,29)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아담이 언약을 맺은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습니다(2:16-17). 갈대아 우르에 살던 아브람을 부르신 사건도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로 시작됐습니다(12:1). 모세를 이스라엘의 해방자로 부르신 사건도 “하나님이 이르시되”로 시작됐습니다(출3:5). 모세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설교한 것도 오직 하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신4:2,6:17,27:10,30:9). 이집트에 열 가지 재앙이 일어난 것도 말씀에 의해 일어났고(출7:14, 8:1,20, 9:1,8,13, 10:1), 홍해가 갈라진 것도 말씀에 의해 일어났고(출14:15-16),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아이성을 점령한 것도 말씀에 의해 일어났고(수6:2-3, 8:1), 다윗이 왕이 된 것도 말씀에 의해 되었습니다(삼상16:1). 여러 선지자들에게 임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선지자들이 외친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복을 받은 것도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고, 이스라엘 백성이 망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정말입니다. 구약성경을 꼼꼼하게 읽으면 읽을수록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으로 존재하셨고, 말씀으로 행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 없이 존재하거나 말씀과 무관하게 행한 적이 한 번도 없으십니다. 하나님이 있는 곳에는 항상 말씀이 있었고, 말씀이 있는 곳에는 항상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일관된 모습입니다. 요한은 이 놀라운 진실을 꿰뚫어보았습니다. 말씀으로 존재하시고, 말씀으로 행하시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본질이요 특성이라는 것을 꿰뚫어보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담대하게 선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약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은 온통 말씀이십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말씀으로 존재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존재하시면서 동시에 말씀으로 행하셨습니다. 말씀 없이 창조가 이루어진 적이 없고, 말씀 없이 사건이 일어난 적이 없습니다. 모든 창조, 모든 사건은 반드시 말씀에 의해 일어났고, 말씀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구약을 잘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의 행위는 오직 말씀하시는 것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말씀으로만 행하시고, 말씀을 통해서만 행하십니다. 말씀하는 것이 하나님의 행위의 전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행위이고, 하나님의 행위는 곧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존재와 행위가 하나인 분입니다. 사람은 존재와 행위가 분열되어 있는데 하나님은 존재와 행위가 분열되어 있지 않습니다. 존재가 곧 행위이고, 행위가 곧 존재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아주 담대하게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이 말씀(로고스)은 곧 하나님이시다.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존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하나님은 말씀으로 존재하시고 말씀으로 행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구약 전체의 요약이고, 하나님과 세상의 근원 진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근원 진실에서 뭘 깨달아야 할까요? 이 근원 진실이 우리에게 말하는 메시지는 뭘까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세상 만물은 물질 덩어리가 아니라 말씀 덩어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은 물질 덩어리로서의 세계가 아니라 말씀 덩어리로서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세상 만물은 근원을 알 수 없는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신들의 장난으로 생겨난 것도 아닙니다.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한 말씀의 피조물입니다. 태양도, 달도, 지구도 말씀의 피조물이고, 태양과 지구와 달의 거리와 위치도 말씀의 디자인입니다. 지구가 날마다 자전을 하고, 지축이 23.5도 기울어져 있는 것도 우연히 그렇게 된 게 아니고 그렇게 돼야만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되기 때문에 말씀으로 그렇게 디자인한 것입니다. 물론 생명은 닫힌 시스템이 아니라 열린 시스템입니다. 환경에 따라 생명이 변화하고 적응해나가는 열린 시스템입니다. 하지만 말씀에 의해 기획되고 만들어졌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근원 진실입니다.
그러니까 만물은 물질 덩어리가 아니라 말씀 덩어리인 셈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알고 나서 제일 먼저 발견한 것도 이거였습니다. 만물이 말씀 덩어리더라는 것. 저는 하나님을 알기 전까지 태양을 보고 산을 보았지만 태양이나 산을 보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꽃과 풀을 보았지만 꽃과 풀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냥 스쳐 지나갔을 뿐이지 보지는 않았어요. 하나님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보았습니다. 눈을 뜨고 주시하며 관심을 갖고 제대로 보았습니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았고, 길가에 피어있는 코스모스를 보았고, 봄을 알리는 개나리의 노란 꽃봉오리를 보았고, 길가에 넘쳐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때 제 눈에 들어온 것들은 이전의 코스모스가 아니었습니다. 이전의 태양이 아니었습니다. 이전의 개나리가 아니었습니다. 이전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작품으로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가 듬뿍 담긴 위대한 작품으로 다가왔습니다. 말씀 덩어리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니 제 마음이 얼마나 기쁘고 경이로웠겠습니까? 다윗이 고백한 대로 내게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세상과 만물이 다 하나님의 위대한 작품으로 보이고, 말씀 덩어리로 보이고, 그분이 베푸신 선물로 보이는데 뭐가 부족하겠습니까. 그저 감사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감격, 감격, 감격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하나님으로 인해 20대를 감격시대로 살았습니다. 물론 계속해서 감격시대만을 산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성경을 알아가면서, 또 한국교회의 비루한 현실에 눈을 떠가면서 30대는 한국교회를 갱신해야 한다는 열정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40대는 무너져가는 한국교회를 붙잡고 씨름하는 절규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50대는 저의 연약함과 한국교회의 연약함을 탄식하며 아파하는 연민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그랬습니다. 삶의 연륜이 쌓이고 신앙이 깊어지면서 점차 감격은 작아지고 아픔과 탄식은 커져갔습니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기대는 점차 작아지고 연민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그렇다고 20대의 감사와 감격이 영영 사라졌다고 말씀드리는 건 아닙니다. 감격보다는 아픔과 탄식, 연민이 커져가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제 삶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소리 없는 감사의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살다 보면 마음이 상할 때도 있고, 절망에 휩싸일 때도 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항상 세상 만물이 물질 덩어리가 아니라 말씀 덩어리라는 것, 하나님의 위대한 작품이요 선물이라는 근원 진실을 잊지 않고 삽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감사의 강이 쉬지 않고 흘러가기를 바랍니다.
둘째, 만물은 마땅히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속 말씀드린 것처럼 말씀으로 인해 만물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존재의 뿌리요 토대입니다. 그러니 만물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말씀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들어야만 존재가 존재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사람은 말씀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기 때문에 사람은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도 말씀이 존재의 뿌리이고, 말씀이 존재의 토대인 피조물입니다. 말씀에 귀 기울여야만 하는 피조물입니다. 말씀을 듣지 않으면 비존재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이 첫 사람 아담에게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겁니다. ‘너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선악을 아는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는 말씀을 들음으로만 너는 존재일 수 있다. 말씀을 듣지 않고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너는 정녕 죽는다. 너는 비존재로 추락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신 첫 번째 말씀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말씀하신 죽음은 육체의 소멸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존재가 비존재로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본래적 실존에서 비본래적 실존으로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아주 쉽게 말하면, 삶이 헝클어지고 망가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짐승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교양, 지식, 재산, 지위, 권세가 너의 존재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듣지 않으면 바로 죽습니다. 존재가 망가지고 삶이 헝클어집니다. 짐승이 됩니다. 아무리 교양이 있고, 지식이 있고, 재산이 많고, 지위가 높고, 권세가 하늘을 찌른다 해도 말씀을 듣지 않으면 언제든 짐승이 됩니다. 적절한 상황만 조성되면 언제든 우리 속에 웅크리고 있던 짐승이 튀어나옵니다. 용빼는 재주가 없어요. 말씀을 듣지 않으면 누구나 비존재로 추락합니다. 그리스도인도 말씀을 듣고 말씀과 함께 살지 않으면 언제든 비존재로 추락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말했습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119:11). 예, 정직한 고백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들어야 사는 존재입니다.
존재의 의미, 삶의 의미도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때로 내 집을 마련했다든지, 작은 선행을 했다든지, 상을 탔다든지, 위기를 극복했다든지, 소원하는 일이 이루어졌을 때 뿌듯함도 느끼고 작은 보람 같은 걸 느낍니다. 이런 일들이 살아가는데 위로도 되고 힘도 됩니다. 인생에 활력을 불어넣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로 존재와 삶의 의미가 채워지지는 않습니다. 존재와 삶의 의미가 온전히 채워지기 위해서는 존재와 삶이 말씀에 가 닿아야 합니다.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고, 내가 말씀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벌어져야 합니다. 내 존재가 말씀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내 존재의 근원이 말씀이기 때문에 내 존재와 삶이 말씀에 가 닿아야만 내 존재와 삶의 의미가 온전히 채워질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배 자체가 의미를 발생시키지 않습니다. 예배자의 마음이 말씀에 가 닿아야 의미가 발생합니다. 사랑도 사랑 자체가 의미를 발생시키지 않습니다. 사랑이 말씀에 가 닿아야 의미가 발생합니다. 공부도 그렇고, 목회와 선교도 그렇습니다. 말씀에 가 닿아야 비로소 의미가 발생합니다. 말씀에 가 닿지 않으면 예배는 종교적인 의무를 수행한 것에 지나지 않고, 사랑은 이기적인 욕정이나 열정의 분출에 지나지 않고, 공부는 지적 욕망이나 성공 욕망을 추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목회와 선교도 종교적인 사업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씀에 가닿지 않는 모든 존재와 행위는 허무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음을 벗어나지 못하고, 욕망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솔로몬이 고백한 대로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도 말씀을 들음으로 발생합니다. 바울이 믿음은 들음으로 난다(롬10:17)고 말한 대로 믿음은 개인적으로 말씀을 듣는 사건으로부터 발생합니다. 개인적으로 말씀을 듣는 사건이 없으면 그 사람의 믿음은 아무리 신앙생활을 성실히 한다 해도 자기 신념을 따르는 것이거나, 어려서부터 몸에 밴 종교적 습관을 행하는 것이거나, 문화적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이지 믿음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은 오직 개인적으로 말씀을 듣는 사건을 통해서만 발생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듣는다는 게 뭘까요? 성경을 읽는 것이 말씀을 듣는 것일까요? 설교를 듣는 것이 말씀을 듣는 것일까요? 환상을 보거나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것이 말씀을 듣는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유롭게 말씀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실제로 성경을 100번 읽고 성경 지식이 뇌에 가득한데도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성경을 전혀 모르는데도 말씀을 듣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것이 말씀 듣는 것이다’라고 딱 집어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는 어느 정도 분별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말씀을 듣는 자를 가만히 놔두지 않기 때문에 - 말씀이 사람 속에 들어가서 그 사람의 가치관을 뒤집어엎고, 감겼던 눈을 뜨게 하고, 삶을 대하는 태도를 변화시키는 등 존재와 삶 전체를 뒤흔드는 대지진을 일으키기 들기 때문에 - 말씀을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를 어느 정도 분별할 수는 있습니다.
말씀을 들었는데 아무런 내적 변화가 없다, 존재와 삶에 지진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상상하지 못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누구도 제어하지 못하는 내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내면에 기쁨이 생기고, 새로운 결단을 하게 되고, 무한히 겸손해지고, 삶의 근본을 돌이키는 회개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비나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 다시 하늘로 되돌아가지 않고 땅을 적셔서 싹이 나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듯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어 내게 돌아가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을 성취한다.”(사55:10-11). 바울도 “성경은 능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진리를 보여주고, 우리의 반역을 드러내며, 우리의 실수를 바로잡아 주고, 우리를 훈련시켜 하나님이 방식대로 살게 한다.”(딤후3:15-16. 우진 피터슨의 메시지),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말씀의 검인데 말씀은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한다.”(고후10:4-5)라고 말했습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자를 있는 그대로 방치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로 바꾸어 놓습니다. 비본래적 실존에서 본래적 실존으로 변화시키고 갱신시킵니다. 상처와 아픔은 싸매주고, 모든 얽매인 것에서는 해방시킵니다.
그러므로 만물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특히 사람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사람은 말씀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기 때문에,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먹어야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더더욱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들어야 비존재에서 존재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들어야 비본래적 실존에서 본래적 실존으로 회귀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들어야 자기 안에 웅크리고 있는 짐승을 가두어놓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들어야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습니다.
물론 말씀을 듣기란 쉽지 않습니다. 바쁘기 그지없고 팍팍하기 이를 데 없는 세상을 살면서 날마다 말씀을 듣는다는 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아무리 바쁘고 팍팍한 인생살이라 해도 밥을 먹어야 살듯이 말씀도 먹어야 삽니다. 말씀을 먹지 않으면 도무지 살지 못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말씀을 먹지 못하면 호흡 곤란이 오는 사람, 굶주림을 느끼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존재와 삶이 말씀에 가 닿아야만 비로소 삶의 의미가 생기고, 안식과 평안이 오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앞에 굴복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밥은 못 먹어도 말씀은 먹어야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말씀을 먹지 않는데도 멀쩡하게 살아간다, 호흡 곤란도 오지 않고 굶주림도 못 느낀다, 그런 사람은 자기가 그리스도인인지 고민해봐야 합니다. 말씀을 먹고자 하는 내적 욕구가 없는 사람은 병든 그리스도인이든지 죽은 그리스도인이든지 아니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든지 셋 중 하나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은 그럴 수 없어요. 말씀을 먹지 않으면 배고파서 미칩니다. 영적 허기에 지쳐 정신줄이 오락가락합니다. 무엇을 해도 삶에 생기가 돌지 않습니다. 오직 말씀을 들어야 삶에 생기가 돕니다. 오직 말씀에 가 닿아야 기쁨의 샘이 터집니다. 오직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굴복해야 평안이 옵니다.
여러분, 날마다 밥을 먹듯이 말씀을 먹기를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일상 속으로 들어가고, 일상이 말씀에 가 닿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듣는 일에 여러분의 존재와 삶을 몰입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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