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요한1. 태초에 있는 말씀

새벽지기1 2015. 11. 25. 22:31

 

요한복음1:1-3,14

 

오늘부터 함께 묵상할 말씀은 요한복음입니다. 요한복음은 매우 심오하고 근원적이고 영적인 책입니다. 성경 전체가 그렇긴 합니다만 요한복음은 특히 그렇습니다. 물론 요한복음도 공관복음서와 같이 예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위기와 관점이 사뭇 다릅니다. 공관복음서는 다분히 역사적인 관점에서 예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비해 요한복음은 영적인 관점에서 예수 이야기를 합니다. 시작부터가 그렇습니다. 마태는 아브라함부터 족보를 쭉 나열하면서 예수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소개합니다. 예수의 탄생에 대해서도 비교적 상세하게 말합니다. 마가는 세례 요한을 통해 예수를 소개하고, 누가는 요셉부터 아담까지 족보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처럼 공관복음은 예수의 탄생과 혈통과 역사적 배경을 말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런 이야기를 다 생략합니다. 혈통이나 탄생 비화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곧바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1)라고 거창한 말을 합니다. 창세기하고 비슷합니다. 창세기가 밑도 끝도 없이 “태초에 하나님이 찬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선언으로 시작하는 것처럼 요한복음도 논리적인 배경 설명이나 어떤 인과적 과정 없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뭐 주저하거나 머뭇거리는 게 없어요. 처음부터 심오하고 근원적인 진실을 향해 돌진합니다. 무시간적인 세계, 세계 이전의 세계로 돌진해버립니다.

 

현대인은 요한처럼 심오하거나 근원적이거나 영적이지 않습니다. 현대인은 지극히 피상적이고 세속적이고 즉물적이고 근시안적입니다. 현대인은 물질적인 세계가 실재의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돈이나 땅이나 집이나 명품 등등 물질을 소유하고 소비하는 것(부자)에서 삶의 희열을 느끼고, 사회적인 지위나 명예를 얻는데서 존재의미와 자부심을 느낍니다. 이런 게 다 유물론적 현상인데 현대인은 철저하게 유물론적이고 세계내적입니다. 지금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사상은 유물론입니다. 과학주의도 유물론이고, 자본주의도 유물론이고, 실증주의도 유물론입니다. 세계내적인 사고는 다 유물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 면에서 현대인은 몽땅 유물론의 세례를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의 세례를 받기는 했지만 태어나자말자 유물론의 세례를 이미 받았고, 유물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날마다 유물론을 호흡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모든 관심사가 유물론적입니다. 주일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구원을 말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이나 구원에는 큰 관심이 없어요. 대부분 뭘 먹을까, 뭘 입을까, 뭘 마실까, 어떻게 살아남을까에 관심이 있습니다. 대학입시, 취업, 돈벌이, 사회적인 성공 등등 세계내적인 것에 골몰합니다. 여러분의 내면도 잘 살펴보십시오. 뭐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솔직히 그렇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원하든 원치 않던 유물론의 세례를 받은 자들이고, 사실상 유물론자라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그런 면에서 요한복음은 오늘 이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책입니다. 요한복음은 지나치게 심오하고 영적이고 근원적인 책이라서 이 시대의 유물론적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지극히 피상적이고 세속적이고 즉물적이고 근시안적이고 세계내적인 현대인의 구미에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이번에 요한복음을 강해하기로 맘먹었습니다.

최근에 책을 읽다가 시인 엘리엇이 ‘바위’라는 시에서 외쳤던 한 구절을 접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잃어버린 삶은 어디 있는가?

지식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지혜는 어디 있는가?

정보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지식은 어디 있는가?”

 

예, 현대인의 어리석음과 모순을 기막히게 포착했다고 생각됩니다. 엘리엇이 포착한 대로 현대인은 풍요 속에서 삶을 잃었고, 지식 속에서 지혜를 잃었고,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지식을 잃었고, 세속에 파묻혀 말씀을 잃었고, 외적인 화려함 속에서 근원을 잃었고, 유물론 속에서 영적 세계를 잃었고, 도시 속에서 인간을 잃었습니다. 저는 이런 현대인에게 가장 필요한 말씀이 요한복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물론의 세례를 받고 세계내적인 것에 몰입하는 현대인, 피상적이고 세속적이고 즉물적이고 근시안적인 현대인에게 정말 필요한 말씀이 요한복음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구미에는 맞지 않지만 요한복음을 강해하기로 맘먹었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요한복음 속으로 함께 들어가 봅시다. 1:1-18은 요한복음의 프롤로그입니다. 요한복음 전체 내용을 축약해서 압축적으로 묘사한 프롤로그입니다. 요한은 프롤로그에서 성경 전체의 핵심 인물인 예수가 누구인지를 말합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핵심 인물은 예수입니다. 복음의 핵심 인물도 예수이고, 온 세상이 알아야 할 핵심 인물도 예수입니다. 예수를 아는 것이 나를 알고, 너를 알고, 온 세상을 알고, 삶을 알고, 지혜를 알고, 진리를 아는 길입니다. 요한이 예수 이야기를 기록한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예수를 아는 것만이 진실로 나를 알고, 너를 알고, 온 세상을 알고, 삶을 알고, 지혜를 알고, 진리를 아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예수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1:14). 예, 요한이 제대로 소개했습니다.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예수의 정체성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데 있지 않습니다.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다는데 있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데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었다는데 있지 않습니다. 부활했다는데 있지 않습니다. 예수의 정체성은 예수가 말씀이라는데 있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말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는 말씀이라는데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는 요한의 증언은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는 최고의 증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예수의 정체성의 뿌리인 말씀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의 정체성의 뿌리인 말씀이 태초부터 있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라고 했습니다(v.1). 여기서 요한이 말한 두 명제를 잘 살펴봅시다. 요한은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명제는 모순입니다. 이 명제를 일반적인 것으로 바꾸면 ‘병선이는 다운이와 함께 있었다. 병선이는 곧 다운이다’가 되는데 이게 말이 됩니까? ‘병선이는 다운이와 함께 있었다’는 명제가 옳다면 ‘병선이는 곧 다운이다’라는 명제는 성립되지 않고, 거꾸로 ‘병선이는 다운이다’라는 명제가 옳다면 ‘병선이는 다운이와 함께 있었다’는 명제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요한이 말한 두 명제는 도무지 병립할 수 없는 모순입니다. 그런데도 요한은 모순된 두 명제를 나란히 병립시켰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정말 말이 안 되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성경의 독특함입니다. 인간의 이성에 의하면 분명히 말이 안 되는 모순인데 성경은 이 모순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이 모순을 없애려고 하지도 않고 해명하려고 하지도 않아요. ‘태초부터 있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요, 이 예수는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며 또한 하나님’이시라고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말을 합니다. 어느 누구도 공감하거나 동의할 수 없는 모순을 당당하게 이야기합니다.

왜 그럴까요? 무식해서일까요? 자기 확신에 사로잡혀서일까요? 환청을 들어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모순이긴 하나 그래도 이 모순이 바로 예수의 진실이고 근원 진실이기 때문에 요한은 모순된 두 명제를 나란히 병렬시킨 것입니다. 요한이 지금 정신없는 이야기를 한 게 아니에요. 아주 또렷한 정신으로 예수의 진실-근원 진실은 이성의 체계 안에 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예수의 진실-근원 진실은 이성의 체계보다 훨씬 광대하고 심오해서 이성의 레이더망으로는 포착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요한이 말하는 예수의 진실은 세 가지입니다.

1)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는 자존자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두 번 말함으로써 ‘태초에 있었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태초에 있었다는 것은 만물이 존재하기 이전의 무시간적 세계, 세계 이전의 세계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창조 이전의 존재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 존재하는 자존자라는 뜻입니다. 물론 예수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라는 유대인의 혈통에서 났고, 헤롯 왕 때에 마리아의 자궁에서 잉태되어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핏덩이로 태어났습니다. 엄마의 젖을 빨며 자랐고, 동네 아이들과 어른들의 틈바구니에서 자랐습니다. 형제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요한도 이 모든 걸 부정하지 않습니다. 예수와 관련된 모든 객관적 사실을 다 인정합니다. 하지만 요한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이 진실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런 것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근원 진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근원 진실이 뭐냐?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분은 자존자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피조물로 우리와 함께 있지만 단지 피조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있는 자존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스스로 계신 자존자(I am that I am)이듯 예수도 스스로 계신 자존자라는 것입니다.

마르틴 부버는 ‘자존자’를 “언제나 존재하고자 하는 대로 존재하는 분”이라고 풀었습니다. 옳습니다. 하나님은 특정한 출현 형태에 자신을 고정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든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존재하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나님 얼굴을 보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출33:20)도 하나님이 특정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든 존재하고자 하는 대로 존재하시기 때문에 얼굴이 있을 수 없고, 얼굴이 있을 수 없으니 얼굴을 보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존재하고자 하는 대로 존재할 수 있는 자존자이시기 때문에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예수는 자존자입니다.

 

2)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 개역개정판은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번역했지만 좀 더 정확한 뜻은 ‘하나님을 향하여 계셨다’입니다. 말씀이 하나님을 향해 계셨다는 것은 태초부터 말씀이 하나님과 교제했다, 하나님을 향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말씀과 하나님이 서로에게 파트너였다는 뜻입니다. 말씀이 하나님과 결합해 있었다고 말하는 게 아니고 상호적이고 의식적인 교제를 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능동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곧이어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말씀과 하나님이 본질상 하나라는 뜻입니다. 말씀과 하나님이 동일 본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앞의 말씀과 통합하면, 말씀과 하나님은 서로 구별되면서도 하나이고, 하나이면서도 서로 구별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나중에 성령도 나오는데 성령까지 합하면 하나님은 태초부터 유일자로 존재하지 않으시고 성부 ‧ 성자 ‧ 성령으로 존재하신다, 셋이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셋으로 존재하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것은 사랑과도 연결됩니다. 요한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말합니다(요일4:8,16). 예,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한 순간도 사랑으로 존재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랑이셨고 영원히 사랑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은 하나님이 유일자가 아니라 삼위일체로 존재한다는 걸 내포합니다. 또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걸 내포합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사랑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삼위일체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이 삼위일체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예수 이야기를 하면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이 삼위일체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것은 모순입니다. 말씀이신 예수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모순입니다. 그러나 이 모순이 예수의 진실입니다. 이성으로는 도무지 해명되지 않지만 도무지 해명되지 않는 이 모순이 예수의 진실입니다.

 

3)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는 만물의 창조자라는 것입니다(v.3). 요한의 이 증언은 창세기하고 약간 다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했다’고 말하는데 요한복음은 ‘말씀이 만물을 창조했다’고 말합니다. 창세기는 말씀이 창조의 수단이었다고 말하는데 요한복음은 말씀이 창조의 주체라고 말합니다. 예, 둘 다 옳습니다. 말씀이신 하나님은 창조의 주체이기도 하시고 또한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기도 하셨습니다. 만물이 이 사실을 증거합니다. 만물을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만물 속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명철이 깃들어 있습니다. 깊고 숭고한 하나님의 말씀이 숨 쉬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만물은 말씀의 형상(form)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구체적인 형태를 띤 것이 만물입니다. 솔로몬은 이 사실을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지혜로 땅에 터를 놓으셨으며 당신의 명철로 하늘을 견고히 세우셨다”고 표현했고(잠3:19),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다”고 표현했습니다(롬1:20).

여기까지가 요한이 증언하는 예수의 근원 진실입니다. 예수는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것은 100%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근원 진실은 아닙니다. 예수의 근원 진실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또한 하나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데 있습니다. 만물을 창조한 주체라는데 있습니다. 예, 이성의 잣대로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들리고, 앞뒤 맥락도 없는 엉터리로 들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들리지만 이것이 가장 중요한 근원 진실입니다.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할 삶의 근원 진실이요 존재의 근원 진실입니다. 이 진실을 모르는 것은 근본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형편없는 사람, 싸가지 없는 사람을 가리켜 ‘근본이 없는 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진짜 근본이 없는 놈은 싸가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요한이 말한 진실을 모르고 사는 사람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를 모르고 사는 사람, 만물을 창조한 창조자를 모르고 사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근본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면에서 현대사회는 근본이 없는 사회이고, 현대인은 근본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현대사회는 유사 이래 최고로 발전한 사회입니다. 현대인은 나름대로 교양도 있고, 지식도 있고, 갖출 것 갖추고 삽니다. 그러나 깊이의 차원에서 보면 현대인은 근본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들 교양도 있고, 지식도 있고, 갖출 것을 갖추었지만 하나 같이 피상적이고 세속적이고 즉물적이고 근시안적입니다. 아무리 교양이 있고 지위가 높다 해도 유물론적인 한계, 세계내적인 한계 안에서 삽니다. 풍요 속에서 삶을 잃고, 지식 속에서 지혜를 잃고,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지식을 잃고, 세속에 파묻혀 말씀을 잃고, 외적인 화려함 속에서 근원을 잃고, 유물론 속에서 영적 세계를 잃고, 군중 속에서 인간을 잃고 방황하며 쓸쓸하게 삽니다. 이게 다 근본이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재앙입니다. 이처럼 근본을 잃어버리고 근본 없이 사는 것이 가장 고질적이고 치명적인 인간의 질병입니다. 이 질병은 좋은 정부가 들어서고 좋은 정책을 시행한다고 해서 치유되지 않습니다. 철저한 사회변혁을 꾀하고 섬세한 복지를 시행한다고 해서 극복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근본, 우리가 떠나온 근본으로 돌아가야만 치유되고 극복됩니다.

 

세상의 근본은 예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