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9-13
요한은 예수가 참 생명이고, 그 생명이 모든 사람에게 비추는 참 빛이라고 했습니다. 또 예수가 온 세상을 창조한 참 주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자기 땅에 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땅에 사는 자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습니까? 온 세상을 만드신 분이 자기 땅에 왔으면 기쁘게 맞이하는 게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한 기업의 오너가 나타나도 회사원들이 예의를 갖춰 영접하고, 대통령이 나타나도 대통령의 방문을 환영한다며 정중히 영접하고, 교황이 나타나도 사람들이 뜨겁게 영접하는데 온 세상의 왕이신 분이 세상에 오셨으면 정말 기쁘게 영접하는 게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유대 땅에 거하는 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빛으로 오신 분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종교의 잣대로 그를 거부하고, 율법의 잣대로 그를 정죄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먹보에 술꾼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정죄했습니다(마11:19). 어둠이 빛을 심판했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고, 오만도 이런 오만이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둠이 빛을 정죄하고 심판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피조물이 창조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다는 게 말이 됩니까? 기기묘묘한 세계를 보면서는 ‘브라보’를 연발하면서 그 세계를 창조하신 분은 영접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도무지 말이 안 되는 기이하고 모순되고 오만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기이하고 모순되고 오만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천 년 전에만 그러는 게 아니에요. 지금도 대다수 사람들은 예수를 영접하지 않습니다. 기업 회장, 유명한 연예인, 대통령, 교황은 뜨겁게 영접하지만 예수를 영접하지는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참 빛이신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걸까요? 왜 세상의 주인이신 분을 세상이 죽인 걸까요? 저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요한이 말한 대로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기 때문에 빛을 미워하는 것이고 빛을 멀리 하는 것입니다(요3:20). 자기 행위가 악하니까 자기의 악함이나 수치가 드러날까 봐 그걸 감추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빛 앞에 나아가면 자기 실체가 드러나니까 자신의 수치를 감추기 위해서 빛을 미워하는 것이고, 자신의 죄악을 방어하기 위해서 빛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모든 사람이 자기 스스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폭로하며 살고 있습니다. 다른 누가 폭로하는 게 아니에요. 일상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들을 통해서, 얼굴 표정이나 말이나 행동이나 반응이나 태도 등 생활의 모든 걸 통해서 자기 스스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폭로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모르고 자기를 감추겠다고, 자기를 방어하겠다고 빛을 차단하고 빛을 미워합니다. 사람이 한 번 거짓말을 하면 그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더 많은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처럼, 사람이 자기의 악함과 수치를 감추면 감출수록 그 안에서 더 푹푹 썩어 가는데 그걸 모르고 자기를 감추겠다고, 자기를 방어하겠다고 빛을 외면합니다. 참으로 가소로운 짓입니다.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예수의 빛이 찬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기업 회장이 갖고 있는 돈의 위력, 유명 연예인이 갖고 있는 인기, 대통령이 행사하는 권세, 교황이 누리는 종교적 권위를 생각해보십시오. 실로 휘황찬란합니다. 저들의 말 한 마디에 세계 증권 시장이 출렁이고, 저들의 선택 하나에 세상이 들썩거릴 만큼 위용이 대단합니다. 대통령 뒤에 사람들이 줄 서는 것도 다 그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서 예수의 위용은 어떻습니까? 예수의 말 한 마디에 세계 증권 시장이 출렁입니까? 예수의 선택 하나에 세상이 들썩입니까? NO~~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에게는 대기업 회장 같은 돈의 위력도 없고, 유명 연예인 같은 화려함도 없고, 대통령 같은 권세도 없고, 교황 같은 종교적 권위도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도 없습니다(사53:2). 정말 매력 포인트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영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영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열두 제자를 비롯해서 소수이지만 그분을 영접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그분,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매력 포인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분을 영접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정말 순전한 마음으로 그분께 몸과 영혼을 쏟아 붓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를 영접하는 것을 그 이름을 믿는 것이라고 했습니다(1:12). 여기서 예수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예수라는 이름을 믿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가 어떤 분인지를 믿는다는 말입니다. 즉 예수는 생명이시라는 것, 예수는 빛이라는 것, 예수는 태초부터 있었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는 것,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예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저들은 왜 예수를 믿었을까요?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분,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분을 왜 참 생명이요 참 빛이라고 믿었을까요?
솔직히 그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을 갖고 난 후에 지금 왜 예수를 믿는지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왜 믿게 되었는지를 설명할 방법은 없습니다. 바람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왜 예수를 믿은 것인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것인지도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고 난 후에는 지금 왜 예수를 믿는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주 단순합니다. 그분이 진실로 참 생명이요 참 빛이시며, 태초부터 있었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그분이 그런 분이라는 걸 분석하거나 추론할 수도 없고 증명할 수도 없지만 그분 안에서 참 생명을 얻고, 참 빛을 보았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고, 그분을 통해 내 존재의 근원을 보았고, 그분을 통해 세상의 영광과 절망을 보았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결정적으로는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믿음 안에서 경험한 사건이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믿으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믿음이 마술도 아니고, 최면도 아니고, 도깨비 방망이도 아니지만 예수의 이름을 믿으면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 세 가지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의 이름을 믿으면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선물로 변화합니다. 저는 스무 살에 예수를 만났습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 산은 그저 산이었습니다. 물은 그저 물이었습니다. 태양은 그저 태양이었습니다. 사람은 그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나니까 산이 그저 산이 아니었습니다. 태양이 그저 태양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그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태양과 달과 별들이, 새와 꽃과 온갖 생명들이, 모래알 하나까지도 다 하나님의 선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이 가득 담긴 최고의 걸작일 뿐만 아니라 나를 위해 베푼 선물로 바뀌었습니다.
둘째, 예수의 이름을 믿으면 삶의 의미가 고양되고 삶의 방향타가 분명해집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내가 어디서 왔는지,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내가 몸담고 있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믿고 나니까 놀랍게도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떤 존재인지,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가 깨달아졌습니다. 내가 뭘 위해 살아야 하는지도 감이 잡혔습니다.
저뿐 아닙니다. 인격적으로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같은 변화를 경험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세상의 시류에 우왕좌왕하지 않게 됩니다. 가치관이 분명해지고, 세상을 위해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들이 눈에 보이고, 세월을 아끼게 되고, 힘써 노력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관행이나 가르침에서 조금씩 해방되기 시작하고, 허무하고 사악한 죽임살이에서 벗어나 생명살이, 살림살이에 투신하게 됩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한계를 알고 겸손하게 됩니다. 상대를 존중하게 되고, 주체적인 지체로서 자기 몫을 감당하게 됩니다. 나를 위한 삶에서 세상을 위한 삶으로 삶의 지평이 확장됩니다. 자유의 지평이 확장되고, 능동적인 순종을 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먹고사는 일 이상의 숭고한 가치, 즉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게 됩니다. 놀랍게도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런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람의 의지로도 되지 않고, 사람의 능력으로도 되지 않고, 교육으로도 되지 않는 변화들이 예수를 믿으면 일어납니다. 삶의 의미가 고양되고 삶의 방향타가 분명해집니다.
셋째, 예수의 이름을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납니다. 하나님에 의해 다시 태어나는 놀라운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일은 요한이 말한 대로 혈통으로나 육체의 정욕으로나 사람의 의지로 되지 않습니다. 돈으로 되지 않습니다. 능력으로 되지 않습니다. 지식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에 의해 다시 태어나야만 가능한 일입니다(1:13). 물론 이 일은 신비입니다. 세상이 알아보지 못하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는 것보다 더 신비롭고, 더 은혜롭고, 더 복되고, 더 완전한 출생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마지막 창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믿으면 이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선물로 변화되고, 삶의 의미가 고양되고 삶의 방향타가 분명해지는 내적인 격변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자녀로 출생하는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의 이름을 믿지 않으면 이런 일들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데 믿으면 신비하게도 상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잠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지에 대해서만 한 걸음 더 들어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속에는 크게 세 가지 복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복이 담겨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듯이 하나님의 자녀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을 닮게 됩니다. 예수를 믿자마자 하루아침에 닮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복이 담겨 있습니다. 지금은 아버지 것은 아버지 것이고 자식 것은 자식 것인 세상입니다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식은 부모의 많은 것을 상속받습니다. 요즘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 논란이 뜨거운 것에서도 확인 되듯이 자식은 부모의 재산을 비롯해서 가정의 문화나 인적 네트워크까지 실로 많은 것을 상속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로 하나님나라에 속한 모든 것을 상속받습니다.
셋째, 하나님 아버지의 세계 경영에 참여하는 복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계를 다스리는 왕 중의 왕이시고, 온 세상을 경영하는 CEO 중의 CEO이신데요 당신 홀로 세상을 다스리고 경영하는 단독 플레이어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과 함께 세상을 다스리고 경영하시는 가족 경영체계를 즐거워하십니다. 태초에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세계 경영에 참여시키려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거였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등을 돌리는 바람에 가족 경영 체계가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출생시켜서 하나님의 세계 경영에 참여시키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 복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실로 어마어마한 복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예수 믿는 것을 신앙 하나 갖는 것쯤으로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예수의 이름을 믿으면 상상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복을 받습니다. 금수저 물고 태어나는 것이나, 진시황이 그렇게 소원했던 불로초를 얻는 것이나, 영국이나 스페인의 왕족으로 태어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복을 받습니다. 요한은 그 복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 것’이라고 짧게 표현했습니다만, 이 짧은 한 마디 속에는 실로 어마어마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최고 성능의 컴퓨터로도 계산이 불가능할 만큼 많고 근본적인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의 이름을 믿음으로써 이미 이런 복을 받았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출생했고, 이미 하나님나라의 상속자가 되었고, 이미 하나님의 세계 경영에 참여한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절대 받을 수 없는 복을 받았습니다. 물론 세상이 알아주지는 않습니다. 개뿔도 내놓을 게 없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재창조하신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주만물을 선물로 주신 것도 사실이고, 하나님의 세계 경영에 참여시키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니 영국의 왕족을 부러워하면 되겠습니까? 금수저 물고 태어나지 못했다고 한탄하면 되겠습니까? 저울 눈금을 속이고, 돈을 벌어서 움켜쥐기만 하고, 성질을 부리고, 화를 내고, 악의를 품고, 이간질하고, 거짓말하고, 세상의 눈치를 보고 두려워하면 되겠습니까? 역사 교과서에 기독교 분량을 많이 넣기 위해 국정화하자고 하면 되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서로 싸우고 고소하면 되겠습니까? 소가 웃을 일입니다. 너무너무 쪽팔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은 자답게, 하나님의 세계 경영에 참여한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쪼잔하고 야비하고 저열하게 살면 안 돼요. 개뿔도 내놓을 게 없지만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당당하되 겸손해야 하고, 겸손하되 당당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긍지와 품격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요한은 말했습니다. “참 빛이신 분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2). 예, 이것은 단지 교리가 아닙니다. 단지 주장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건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는 누구나 경험하는 사건입니다. 여러분도 경험하고 저도 경험한 사건입니다. 물론 지금 이 자리에 이 사건을 경험하지 못한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분에게는 지금 하는 모든 이야기가 성경이 말하는 교리로밖에는 들리지 않을 겁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사실로 다가오지 않고 긴가민가할 겁니다. 그러나 사건으로 경험한 자들은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출생했다는 것,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았다는 것, 하나님의 세계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은 자답게, 하나님의 세계 경영에 참여한 자답게 살아갑니다. 받은 복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헤아리고 크게 감사하면서 광야 같은 인생길을 힘차게 걸어갑니다. 여러분께서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긍지와 품격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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