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의 요청에 따라 왕의 조서는 전국에 보내졌습니다. 그러나 이미 도착한 조서에 따라서 유다인을 미워하였던 적들은 유다인 몰살계획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유다의 대적들이 유다인을 죽이려고 작정된 날이 도리어 대적들의 멸망의 날이 되었습니다. 역전의 날이 된 것입니다.
이때 각 사무를 보는 관료들이 모르드개를 두려워하여 유다인을 돕습니다. 모르드개의 소문이 각 도에 알려진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대적들을 멸절합니다. 왕의 명령을 받아서 자신들의 방법대로 대적을 물리칩니다. 그들이 수산에서 죽인 사람이 500명입니다. 하만의 열 아들도 죽입니다.
또한 에스더의 요청에 따라 300명이 더 죽고 열명의 시체가 나무에 달립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유다인을 죽이려고 잔인한 계획을 준비하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그 계획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아달월 12,13,14일에 유다인의 대적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127지방에서 유다인에 의하여 죽은 숫자가 7만5천명입니다.
이 장면은 유다인의 승리를 잘 보여줍니다. 16절의 말씀처럼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대적자들에게 벗어나려고 싸웠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왕의 조서에 힘을 얻어서 대적들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이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왕의 조서에는 처자를 죽이고 재산도 몰수하라고 하였습니다(8:11). 하지만 유다인은 무장한 대적자들만 처단하였고 처자를 죽이지 않았고 그들에게 재산을 모두 돌려주었습니다.
탐욕으로 뿌린 씨앗대로 사망에 이름을 봅니다. 자기 욕망이 가져온 슬픈 역사입니다. 동시에 유다인들의 자세는 절제되어 있음을 봅니다. 처자와 재산을 몰수하지 않았음에 최대한 공정한 태도를 가지려는 모습에서 추악한 자리로 떨어지지 않음을 봅니다.
믿음의 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면서 행하는 탐욕과의 전쟁입니다. 탐욕을 죽이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하만의 모습이 반면교사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또한 공의를 행하되 사랑이 항상 같이 가야 함을 다시금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탐욕의 노예가 됩니다. 재산에 손을 대지 않은 유다인의 모습이 반면교사로 많은 것을 가르칩니다.
자본주의 시대에 무서운 것은 나도 모르게 자본의 노예가 됩니다. 자본이 주는 탐욕과 잘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본을 다스리고 삶을 누릴 수 있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을 생각합니다. 탐욕이 아니라 지혜로운 청지기의 자세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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