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율법사의 질문에 대답하시는 주님을 봅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는지 질문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율법이 무엇이라 말하는지 묻습니다. 율법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 대답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네 대답이 옳다"고 하시면서 이를 행하면 살 것이라 말씀합니다.
정직한 질문에 정직한 답을 얻은 율법사입니다. 이제 정직한 답으로 살면 됩니다. 답을 알고도 살지 못함이 아쉬움이고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율법사는 묻습니다. 누가 내 이웃인지 묻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강도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풀어준 사마리아 사람을 비유합니다. 제사장, 레위인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입니다. 혈통적으로 정치적으로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율법사의 입에서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라는 대답을 듣습니다.
누가 내 이웃인가? 자비가 필요한 모든 사람이 내 이웃입니다. 이것을 깨닫기가 쉽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자를 이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비가 필요한 사람이 이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한 후에 예수님은 마르다의 집에 이르게 됩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즐거움에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아마도 음식을 대접하고자 흥분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많을 일을 하므로 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 마리아가 자신을 도울 수 있도록 말해 달라고 질문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정직한 답을 주십니다.
마르다를 향하여 많은 일로 근심하지 말고 일을 줄이든지 한 가지만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음식을 만들라고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분주함은 전적으로 마르다의 선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는 좋은 면을 선택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을 위한 길에는 우선순위가 잘 세워져야 합니다. 더구나 자기 욕망에 따른 신앙은 곧 지칠 수 있습니다. 신앙의 길에 지치면 시험이 듭니다. 그러면 바른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말씀과 교욱과 교제가 균형이 잘 잡힐 때 비로소 봉사의 즐거움을 누립니다. 봉사는 즐거움과 감사와 행복입니다. 짐이 되는 순간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없어서는 안되는 일에 지치는 일이 생기는 것은 큰 불행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받은 우리들이 이제 믿음의 가정과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이 자비는 항상 공의가 기반이 되는 자비입니다. 교회는 자비의 공동체입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교회는 어려워집니다. 주님의 말씀에 답을 얻은대로 오늘도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를 기도합니다.
'좋은 말씀 >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눅 11:1-13) / 신동식 목사 (0) | 2025.03.13 |
---|---|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눅 9:37-50) / 신동식 목사 (0) | 2025.03.09 |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모르더라.(눅 9:28-36) / 신동식 목사 (0) | 2025.03.08 |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눅 9:18-27) / 신동식 목사 (0) | 2025.03.07 |
능력과 권위의 주권자 (눅 9:1-17) / 신동식 목사 (0) | 2025.0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