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하나님 나라(2)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5. 5. 07:07

그대는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소? 사실 그 이름을 알면 어떻게 모르면 어떻겠소. 다만 생존해 있는 개신교 신학자들 중에서 거장에 속한 인물이니 그대 같은 지성적인 기독교인이라면 저 이름쯤 알아둬서 나쁠 건 없소. 독일 슈테틴에서 1928년에 태어났으니, 올해로 여든 두 살이 되는가 보오. 판넨베르크와 동시대를 살면서 쌍벽을 이룬 독일의 또 다른 개신교 조직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한국교회와 인연이 깊은데 반해서 판넨베르크는 그렇지 못한 게 좀 아쉽소. 몰트만이 진보 보수 막론하여 한국의 여러 교파의 신학교와 교회로부터 초청을 받아 열 번(?) 가까이 한국을 방문한데 비해서 그는 2001년 10월에 딱 한번 방문했소.

 

판넨베르크의 신학 개념에서 ‘미래성’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오. 이런 단어를 듣고 딱딱한 이야기가 나오려니 하고 미리 겁먹지 마시구려.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우리 신앙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개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 하나님 나라와 연관해서 그가 미래 문제를 어떻게 말하는지 들어보시오.

 

예수는 유대인들의 희망에 근거해서 하나님 나라가 먼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임박했다고 보았다. 그래서 현재는 저 미래로부터 분리되어 독립되어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미래가 현재를 향해서 명령하고 요구하며,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것이 긴급하고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각성시키고자 했다. 말씀이 선포되고 받아들여질 때 하나님의 통치가 현재하며 우리는 현재에도 하나님의 미래의 영광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과거와 현재가 미래의 원인이라고 하는 관습적인 억설과는 반대로 현재를 미래의 결과로 보는 것이다.(73)

 

딱딱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을 했는데, 인용해놓고 보니 좀 딱딱한 이야기 같소. 미안하오. 대신 조금만 풀이하리다. 유대인의 희망은 곧 묵시적 희망을 말하오. 묵시적 희망이란 지금 이 세계(에온)가 물러가고 새로운 세계가 온다는 믿음을 가리키오. 그들은 새로 오는 그 세계를 열망했소. 그런 열망이 고난의 역사를 견딘 밑거름이었소. 예수는 유대인의 이런 희망에 근거해서 하나님 나라가 현재에 임박했다는 사실을 확신했고, 거기에 자신의 운명을 걸은 것이오. 차이가 있다면 유대인들의 묵시사상은 현재가 실종된다면 예수에게는 현재가 미래와 긴밀히 연결되는 것이오.

 

여기서 누가 더 옳은가, 또는 예수도 역시 신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유대의 한 예언자나 사상가였다는 말이냐 하고 묻지는 마시오.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와 그 완성을 미래의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사실만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게 좋을 것 같소. 끝으로 이 한 마디만 하리다. 그대의 정체는 미래로부터 온 거요.(2010년 2월19일, 금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