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5. 4. 06:03

그대는 우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중에서 어느 쪽이 더 현실적인지, 즉 더 확실한 것인지를 질문하고 싶소. 너무 초보적이거나 유치한 질문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소. 말처럼 보이시오? 그래도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야만 하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소. 첫째, 이 질문은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아주 오랜 전부터 인류가 가장 중요한 화두로 삼았던 것이라오. 인류의 오래된 전통을 우습게 보는 건 경솔한 태도요. 둘째, 오늘 우리는 보이는 것에만 과도하게 매달리며 살아가고 있소.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모두 유물론자들처럼 실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확실한 것으로 여기면서 살아간다오. 이럴 때는 그것이 정말 확실한 건가에 대해서 꾸준히 질문하는 게 필요한 일이 아니겠소?

 

보이는 것이 무엇이오? 여기 컴퓨터 본체가 있소. 확실하게 보이는 것이오. 책상과 필통이 있소. 집도 있고 산도 있고, 강도 있소. 나라도 있고, 지구도 있고, 태양도 있소.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도 있소. 분자와 원소와 더 작은 소립자들도 있소. 그 모든 것은 보이는 것이오. 물론 전자 현미경을 통해서만 확인이 가능한 것도 있소. 그 모든 것들이 우주의 토대들이오. 우리 생명의 토대이기도 하오. 그런데 말이오. 그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지오. 태양도 45억년 후에 사라질 텐데, 그 태양에 기대서만 지탱되는 모든 것들이야 오죽하겠소. 이렇게 사라지는 것들을 확실한 거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거요.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이오? 플라톤의 이데아(Idea), 노자의 도(道), 불교의 공(空), 하이데거의 존재(Sein), 화이트헤드의 과정(process)가 그것이오. 위 개념을 보이는 것과 대립적인 차원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오. 보이는 것까지를 포함한 개념이오. 다만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그렇게 도식화했을 뿐이오. 이런 개념들이야말로 궁극적인 현실성(reality)이라는 뜻이오.

 

철학적 개념을 빌려올 필요 없이 성서의 가르침만 생각해도 이건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이라오. 구약성서는 우상을 만들지도 말고 섬기지도 말라고 엄금했소. 우상숭배가 바로 삶의 토대를 보이는 것에서 찾으려는 노력이오. 바울의 말을 들어보시구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를 이렇게 생각해도 좋소. 보이는 것은 역사 안에서 자기 정체성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보이지 않는 것은 종말에 가서야 드러내는 것이오. 성서는 그 종말의 능력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말하오. 바로 그 하나님만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토대라 말하는 것이오. 그분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제 얼굴을 드러내시겠소? 그대는 그것이 궁금하고, 기대가 갈 거요. 그런 기대가 없다면 우리가 오늘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겠소.(2010년 2월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