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영봉목사

서울 유감

새벽지기1 2022. 11. 6. 07:41

저는 서울에서 이 글을 씁니다. Ad Fontes(본질로!)라는 이름의 목회자 연구 모임에서 강의하기 위해 잠시 방문 했습니다.

    이번 방문은 두 가지 점에서 특별합니다. 첫째는 개인적인 이유로서,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나서의 첫 번째 방문이기 때문입니다. 우애 좋은 세 형제가 살고 있기는 하지만, 부모님이 안 계신 조국은 조금 낯설고 꽤 허전합니다. 강의가 끝나면 고향에 하루 다녀 올 생각인데, 비어 있는 고향 집을 보는 마음이 참 이상할 것 같습니다. 집에 간다는 소식을 들으시면 마당 입구의 ‘사형제 나무’(나무 줄기가 네 개의 가지를 뻗어 자라서 그렇게 별명을 지었습니다) 밑에 앉아 고개를 빼시고 기다리셨는데, 이제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도 생전에 인사 드리듯 집에도 가 보고, 부모님 모신 납골묘에도 가 볼 생각입니다.

    둘째는 국가적인 이유로서, 이태원 참사로 인한 충격 때문입니다. 강의 준비 때문에 아직 현장에도 가 보지 못했습니다. 강의가 끝나면 잠시 다녀 올 생각입니다. 하루 저녁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싶었던 것이 전부였던 젊은이들의 희생 그리고 그들을 마음에 묻고 살아야 할 가족을 생각하며 잠시라도 아픔에 동참할 것입니다.

    이번 참사가 미칠 사회적 충격이 세월호 참사의 그것을 능가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번 참사가 대비 소홀로 인해 일어난 인재라는 사실 그리고 책임 있는 당국자들의 언행이 국민의 아픔을 다독이지 못하고 오히려 분노를 키우고 있다는 사실이 참 안타깝습니다. 아마도 오랜 기간 동안 이 문제로 조국이 어려움을 겪을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북한은 연일 강도를 높여가며 미사일을 쏘아 대고 있습니다. 세계 여러 국가의 정상들이 위로의 말을 전하고 도움을 주려고 하는 상황에서 위로의 말 한 마디 없이 도발을 계속하고 있으니, 과연 저들이 우리의 동족이 맞는지 의문이 듭니다.

    이번 사태를 아픈 마음으로 지켜 보면서 ‘공감의 미덕’을 깊이 생각 하게 됩니다. ‘동정’(sympathy)와 ‘공감’(empathy)는 같아 보이지만 미세한 차이가 있습니다. ‘동정’은 다른 사람이 겪는 아픔을 바라보며 “참, 아프겠구나!” 하고 알아주는 것이고, ‘공감’은 그 아픔을 나의 것으로 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동정한다고 느끼면 아픔을 느끼는 사람은 비참함을 더 크게 느낍니다. 반면 누군가가 자신의 아픔에 진실하게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 큰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이번 참사에 대해 정부 당국자들의 언행을 보아도, SNS와 방송에서 들리는 수 많은 말들을 보아도, 희생 당한 사람들의 아픔을 진실하게 공감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아픔을 대상화 하여 분석하고 평가하고 비판하기에 바쁘고, 혹시 불똥이 자신에게 튀지 않을까 싶은 지 변명을 일삼습니다. 그로 인해 희생 당한 사람들은 두 번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찬양 곡 중에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아버지, 당신의 눈물이 있는 곳에 나의 눈물이 있기를 원해요”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떠나는 날까지 할 수 있는 대로 아버지의 마음으로 지내다가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