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묵상

기도를 쉴 때 찾아오는 불청객(1)

새벽지기1 2022. 8. 22. 21:21

기도를 쉴 때 찾아오는 불청객(1)

 

구약의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은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신약의 마지막 사도인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기도를 알려주셨습니다. 기도 없이 성경은 볼 수 없습니다. 이렇듯 기도의 당위성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기도를 쉬는 것은 죄짓는 일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일을 멈추는 것은 명령 불복종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도 없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마치 산소 없이는 살 수 없는 피조물처럼 기도 없이 그리스도인이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사람의 몸에는 산소포화도가 있습니다. 90% 이상은 아직 폐가 망가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90% 이하로 내려가면 폐가 힘들어집니다. 더 내려가면 폐 섬유화가 시작합니다. 폐가 단단하게 굳어지기 시작합니다. 폐가 더는 작동하지 않으면 죽음에 이릅니다. 그래서 산소포화도를 유지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대표적으로 물을 많이 먹으라고 합니다. 유산소 운동을 통하여 산소를 채우라고 합니다. 좋은 공기를 많이 마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폐를 죽이는 썩은 것은 멀리하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것은 술과 담배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몸을 망가뜨리려고 작정한다면 술과 담배를 먹으면 됩니다. 그러나 건강한 몸을 유지하려면 물과 산소를 많이 먹으면 됩니다. 그런데 교만하거나 무지하면 자신 뜻대로 합니다. 내 몸은 내가 가장 잘 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건강검진은 제일 무서워합니다.

 

그런데 영적인 원리도 육체의 원리와 같습니다. 영적인 건강이 유지되려면 건강을 이끄는 영적인 습관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건강에도 영적 포화도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가 영적인 삶에 있어서 90% 이하면 영적 섬유화가 시작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적 섬유화에 빠진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이 있습니다. 아주 기분 나쁜 불청객입니다.

 

기도를 멈출 때 찾아오는 우선순위 불청객은 게으름입니다. 게으름의 다른 말은 귀찮음입니다. 삶이 귀찮아집니다. 그래서 기대하지 않습니다. 기대가 없으니까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니까 영적 섬유화가 지속됩니다. 섬유화가 일어난다고 당장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멈추지 않으면 반드시 죽습니다.

 

기도가 멈추면 삶이 활력이 사라지고 게으름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옵니다. 그러면 예배도 귀찮아지고, 말씀도 귀찮아지고, 찬양도 귀찮아집니다. 어디서 이러한 모습이 나타났는지 답답해하지도 않습니다. 자기 내면이 굳어가고 있음에도 당장은 문제가 없으니까 지나쳐 버립니다. 폐 섬유화의 무서움은 멈출 때까지 진행됩니다. 그러나 강력한 바이러스가 찾아오면 바로 중증으로 진행됩니다. 신앙의 영역도 같은 순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장 기도하지 않는다고 신앙이 파탄 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 일 년 안 했다고 죽음에 이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영적 위기가 오면 저항과 회복 능력이 상실되어 중증에 이릅니다. 헤어 나오지 못하는 시험에 빠지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기도가 게을러지고, 기도를 멈추면 영적인 내면이 망가집니다. 그러므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영적 포화도는 매일 매일 채워져야 합니다. 매일 매일 산소와 물을 먹듯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힘이 없을 때는 주님의 기도라도 진중히 묵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내버려 두면 회복 불가능이 찾아옵니다.

 

둘째는 세상의 유혹입니다. 이 유혹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받은 것과 같습니다. 세상의 유혹은 자주자가 되려는 유혹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유혹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고자 합니다. 기도할 때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멈추면 잠시 불안이 옵니다. 그러나 시간이 좀 더 지나면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영적 섬유화가 심각하게 진행 중임을 보여주는 현상입니다. 기도가 멈추면 세상이 춤을 춥니다. 드디어 친구 하나가 생겼다고 좋아합니다. 함께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는 존재가 생겼습니다. 함께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는 존재가 생겼습니다. 자신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사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님을 조롱할 수 있는 동지가 생겼으니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그러나 가출한 자녀를 보는 부모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가슴이 아프고 찢어지겠습니까? 반드시 후회하고 슬퍼할 터인데 세상의 유혹에 빠져서 기뻐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도가 멈추면 세상은 다양하게 유혹하여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원한 지옥에 이르게 합니다. 지옥은 하나님이 거하지 않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내버려 두심입니다. 더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자기 뜻대로 살게 내버려 둠이 지옥입니다.

 

세상의 유혹은 하나님보다 더 큰 힘이 있고, 능력이 있고, 재미가 있다고 거짓을 말합니다.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예전에는 예배에 참여하기 위하여 일찍부터 준비를 하였는데 이제는 예배 20분 전에 일어나서 좋다고 합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 세상은 더 큰 유혹으로 다가옵니다. 예배뿐 아니라 이제 하나님과의 교제도 가볍게 여깁니다. 기도 없이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예배 없이도 사는데 기도 없이 사는 것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예배도 기도 없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고, 재미있게 살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허상이고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유혹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하여 사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오직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말합니다. 이제 주일에 보이는 즐거움을 위하여 떠나자고 유혹합니다. 그러니 기도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만약 있다고 한다면 주문이 될 것입니다. 점쟁이에게 빌듯이 단지 비는 요식행위로 전락할 뿐입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이 교제하기 위하여 사람을 인격적으로 만들고, 말을 주셨습니다. 기도는 이러한 인격적인 교제의 현장입니다. 그러나 기도가 멈춥니다.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만드신 본분에서 떠나가는 것입니다. 폐 섬유화가 20% 남으면 죽음을 준비합니다. 영적 섬유화도 같습니다. 20%에서 다시 살아나는 길은 기도를 부어 넣는 일입니다.

 

신동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