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이 시편은 형식적으로는 25편이나 34편처럼 히브리어의 알파벳을 초성으로 삼아 순서대로 쓰여졌습니다. 내용으로 볼 때는 34편부터 이어지는 ‘악에 대한 묵상’의 연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34편은 악인의 위협에서 구원 받은 기쁨을 노래했고, 35편은 악한 자를 징벌해 달라는 기도이며, 36편은 악인의 세력과 하나님의 권능을 대조 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37편은 악인에 대한 경험에 근거한 지혜시라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악한 자들이 잘 된다고 해서 속상해하지 말며, 불의한 자들이 잘 산다고 해서 시새워하지 말아라”(1절)는 말로 시작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현실은 동일합니다. 현세에서 악한 자들이 징벌을 받고 의로운 사람들이 보상을 받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언제나 악인이 이기는 것 같고 의인은 손해를 보는 것 같습니다. 악인들은 “가는 길이 언제나 평탄하다고 자랑”하고 “악한 계획도 언제나 이룰 수 있다”(7절)고 자랑합니다.
반면, 하나님을 믿고 거룩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은 현세에서 손해 보고 고난 당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악인들의 번영을 보고 “마음 상해”(7절) 합니다. “노여움”과 “격분”과 “불평”(8절)이 솟아 나옵니다. 그런 감정을 그대로 방치하면 “악으로 기울어질”(8절) 뿐입니다.
다윗은 이 시편에서 의로운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그는 “의인”에 대한 동의어로 “겸손한 사람들”(11절),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들”(14절), “흠 없는 사람들”(18절), “정직한 사람”(37절),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37절) 등의 표현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겸손하고 흠 없이 정직하게 살기를 힘쓰면서 평화를 도모합니다. 그들은 때로 악한 사람들로 인해 가난하게 되고 세상에서 비천하게 여김을 받습니다. 다윗은 그들에게 악인들의 번영과 형통을 보고 분노하거나 실망하거나 유혹받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악한 사람들이 결국은 그들이 행한 악에 대한 보응을 받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시각으로 볼 때는 그 보응이 너무 늦어지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조금만 더 참아라”(10절)고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손을 들어 징벌하실 날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악인의 큰 세력을 내가 보니, 본고장에서 자란 나무가 그 무성한 잎을 뽐내듯 하지만, 한 순간이 지나고 나서 다시 보니, 흔적조차 사라져, 아무리 찾아도 그 모습 찾아볼 길 없더라”(35-36절)고 말합니다. 때로 악인의 번영이 오래 지속되는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이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바로 잡으신다는 뜻입니다.
다른 하나는 의인들이 결국 하나님께로부터 보상을 받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나는 젊어서나 늙어서나, 의인이 버림받는 것과 그의 자손이 구걸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25절)고 말합니다. “의인의 구원은 주님께로부터 오며, 재난을 받을 때에, 주님은 그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기”(39절)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인들의 번영을 시샘하지도 말고 그것에 대해 분노하지도 말 일입니다. 오직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을 의지할”(5절) 일입니다. “잠잠히 주님을 바라고 주님만을 애타게 찾을”(7절) 일입니다. 그리고 “악한 일을 피하고 선한 일을 힘쓰면”(27절) 주님께서 미래를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묵상:
이 시편은 예수님의 팔복의 말씀 중 세 번째 복에 대한 말씀(마 5:5,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께서 시편 37편 11절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 시편의 맥락에서 “온유한 사람”(혹은 “겸손한 사람”)은 악인들이 승승장구하는 것 같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거룩하고 의롭고 진실하고 정직하게 살기 위해 힘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악다구니로 싸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을 알기에 양보할 줄도 알고 손해 볼 줄도 압니다. 때로는 무력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진실로 강한 사람들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37편에서 다윗은 “땅을 차지하다”라는 말을 다섯 번 사용합니다(9절, 11절, 22절, 29절, 34절). “땅을 차지하다”라는 말은 토지를 소유하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토대 위에 서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그가 땅을 차지할 것이다”라는 말은 “결국 그가 이길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 자신의 힘이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온유함(혹은 겸손함)의 근거는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믿음입니다. 겉으로 유연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신다는 믿음 위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두 가지 악을 모두 경험했습니다. 자신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악의 힘에 무너지기도 했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의 악행으로 인해 고난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경험에 근거하여 그는 이와 같은 통찰과 지혜를 얻었습니다. 이 아침, 그를 통해 울리는 지혜의 말씀에 “아멘!” 하고 응답 하면서 진실한 믿음을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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