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컬럼3

새 달이 우리를 삼키다니요.

새벽지기1 2021. 5. 27. 06:16

호세아서 4장부터는 더 이상 고멜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고,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와 심판 및 회복에 대해서 길게 이어집니다. 호세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가장 먼저 우상숭배를 언급하십니다. “제사장들아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 대하여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 친 그물이 됨이라”(호 5:1). 이게 대체 무슨 말씀일까요?

당대 종교 지도자인 제사장들과 정치 지도자인 왕들이 북왕국 이스라엘을 우상숭배로 이끌었습니다. 북왕국은 대대로 이 정책을 고수하고 백성들을 우상숭배로 몰아갔습니다. 금송아지 숭배의 뿌리는 대단히 깊습니다. 우리는 출애굽 당시 아론에 의해 세워진 금송아지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금송아지는 풍요의 신입니다. 오늘로 말하면 배금주의(拜金主義)입니다. 그런데 금송아지가 없더라도 하나님의 성전이나, 나아가서 십자가 아래에서도 배금주의가 팽배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복신앙입니다. 기복신앙은 겉은 하나님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알맹이는 ‘금송아지 숭배’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왕과 제사장들이 앞장서 조장하였습니다. 그를 보다 못하신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불러 책망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배금주의에 물든 백성들의 제사를 거부하셨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그들에게서 떠나셨음이라”(호 5:6). 부귀영화와 무병장수, 만사형통을 위해서는 바알에게 절하고, 신앙의 완성을 위해서는 여호와께 제사 드리는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꿩도 먹고 알도 먹자는 것입니다. 바알로부터 오는 복도,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도 얻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복신앙 자체를 거부하신 것입니다.

사무엘이 말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삼상 15:22-23)는 것의 진의가 무엇입니까? 제사와 수양의 기름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드려 복 받기 위한 복채입니다. 순종이 무엇이며 듣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십니다. 겉으로 거룩한 척 하여도 그저 복 받으려는 마음을 숨기고 있어도 하나님의 눈을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에브라임은 내가 알고 이스라엘은 내게 숨기지 못하였나니 에브라임아 이제 네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이 더러워졌느니라”(호 5:3).

‘미스바에 대하여 올무가 되고 다볼 위에 친 그물이 됨이라’(호 5:1)는 표현은 이스라엘 전역이 우상숭배로 가득하였고, 바알을 찾아가는 백성들은 끝내 올무와 그물에 걸려 파멸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특히 다볼산은 그물을 쳐서 많은 새들을 잡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에도 바알 신전을 지어 참배케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갈 때에 내가 나의 그물을 그 위에 쳐서 공중의 새처럼 떨어뜨리고 전에 그 회중에 들려 준 대로 그들을 징계하리라”(호 7:12).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와 그에 따르는 심판은 호세아서 곳곳에서 절규처럼 울려 퍼집니다. 이 외침을 들으며 오늘 우리들의 실상을 보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두 가지를 담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인간으로서의 예수와 구원자로서의 신적인 그리스도입니다. 2,000년 전 이 땅에 오셔서 실제로 인간과 더불어 사신 예수님은 베들레헴 냄새나는 소 여물통에서 태어나신 ‘베들레헴 예수’, 천대받는 땅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살려내신 ‘나사렛 예수’와 인간의 저주를 지고 십자가에 달리신 ‘갈보리 예수’이십니다. 왕들과 제사장들이 살고 있는 예루살렘에서는 오히려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 예수’로 불리지 않으셨습니다. 모두 다 차별과 소외와 슬픔의 장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한사코 베들레헴 예수, 나사렛 예수, 갈보리 예수는 거부합니다. 도무지 닮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도성에 화려하게 등극하는 예루살렘 예수만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예수님은 없습니다.

“그들이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아를 낳았으니 그러므로 새 달이 그들과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호 5:7). 하나님께서 새 날과 새 달과 새해를 주셨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과 그 기업은 흥할까요, 아니면 더 쇠퇴할까요? 오늘의 교회는 예수님의 뜻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이 그저 복만을 바라는 ‘기복신앙의 사생아’가 아닐까요?

“너희 중에 있는 양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 5:2-4)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제사장들입니다. 더러운 이득을 취하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맡은 일들을 수행합시다. 그리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시들지 않은 영광의 면류관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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