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월 25일
일상 생활에서 일반적으로 뇌가 예상하는 질서를 갑자기 깨고 그럴 듯한 질서를 야기하는 말의 표현이나 행동 표현에서 생기는 웃음이 오늘날 건강을 위해서 웰빙 문화의 하나가 되고 있다. 설교 상에서도 듣는 사람들로 지루하지 않도록 종종 번역된 성경의 우리 말 어감을 가지고 웃기는 경우도 있다.
성경 언어 유희도 주의해야
물론 성경의 언어를 사용할 때 성경에서 침묵하는 것을 호기심을 갖고 마음대로 표상하지 않고 성경으로부터 분명히 말씀하신 것을 침묵하여 지나가지 않도록 하는 적정과 절도의 원리(regula modestiae et sobrietatis)가 필요하다. 그 원리는 모세에게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지 말라하신 말씀이나, 욥기의 주제 및 직접적으로 로마서 12장 3절에 근거고 있다. 적어도 일명 아레오파고의 디오니시우스, 예루살렘 시릴, 크리소스토무스 등 교회 교부들에 의해서 주장된 ‘오직 성경’의 정신이 오래된 해석 원리로 남아 있다. 그것은 말의 원리일 뿐만 아니라 생각의 원리요 표상의 원리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5장 40절의 속옷의 개념을 가슴과 하체만을 가린 방식으로 디자인된 로마시대의 여성 비키니 속옷처럼 표상하여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들이 농담에 빠지는 경우이다. 그러나 겨울용 외투(paenula)나 겉옷(toga, stola, pallium)과 다른 그 옷(tunica)은 요한복음 19장 23절에 잘 표상 된 대로 위로부터 전체로 이음새가 없이 통으로 짠 옷도 있지만, 대부분 두 개의 천(plagula)으로 이어서 만든 옷으로서 비싼 것은 그 당시 일상의 임금보다 거의 75배나 비싼 옷도 있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이 걸치고 있는 옷 중에서 유일하게 전당잡힐 수 있는 품목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그 말씀으로부터 질감이나 재질 및 디자인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이 때의 어감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마 19:24)고 했을 때의 우리말들의 바늘귀와 원문상의 바늘구멍 사이의 어감 상 차이와 비슷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바늘의 용도와 사용하는 시기,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어감들이 또한 다를 수 있다.
티베리우스 황제, 클라디우스 황제, 네로 황제 시대에 걸친 아주 드문 가족 파피루스들에 의하면, 같은 사람에 의해서 쓴 같은 단어일지라도 미묘한 필체는 물론 단어 표기들까지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다. 자신의 언어 감각과 지식 및 기억력, 및 외형적인 쓰는 행위들에 따라서 그 때 그 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한 사람의 필체일지라도 개인의 필체에 따라 변화하는 모양이 있고 장기간 혹은 어느 사람, 어느 시대에도 변화하지 않은 필체들의 특별성과 늘 변할 수 있는 개별성에 의해서 좁게 혹은 길게 시기와 시대가 구별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 언어들의 역사적 의미로 정확하게 돌아갈 때, 웃을만한 어감까지 돌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고 대부분 성경을 통해서 시대의 언어들과 만나는 특별성과 겨우 만나 우리의 어감으로 느끼는 정도에 의해서 농담이 가능하다. 대부분 농담으로 즐길 때, 읽는 자 자신의 독백으로 어감을 느낀다고 해야 더 맞을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말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보는 것조차도 보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서로 독백하고 서로 다르게 표상하는 과정에서 농담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농담이외에 시나 다른 예술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어린아이에게 어느 시기에서 같은 것을 같은 것으로 느끼고 또는 같은 것을 다르게 느끼며 그 느낌으로 웃기 시작한지는 정확하게 증명된 것은 없다.
뇌 세포들의 수상돌기와 그 연접부들의 유연성에 있어서의 차이까지 유전정보에 의존한다면, 유전정보들의 차이에서부터 그 특별성과 개별성이 나타나는 최종적인 발현 내용에 이르기까지 그 유전정보들이 환경과 대화하는 개방성과 자유성 및 예외성도 대뇌피질로 향하는 정보들의 비가역적 방향들을 거시적으로 조절하는 크고 작은 자아 세계들에 의존하고 있다. 이런 자아 세계들에서의 변화가 조금 더 큰 거시 세계의 자아 세계에 나타난 웃음이 곧 농담으로 느끼고 있다면, 대뇌피질들의 조밀한 뇌 세포들 상에 뿌려진 정보들은 시간과 공간의 구별이 없는 정보들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외부 정보들의 흐름들이 우리 안에서 그런 정보들로 뿌려져서 웃는지는 아주 신비한 것이다.
병원의 환자들이 표현하는 고통의 소리나 뇌 손상으로나 웃음의 전염병으로 인한 깔깔대는 행동들이나 같은 뇌 손상으로 인한 반 고흐의 그림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정보들이 흐르도록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처음의 것과 마지막의 것으로 보존시키시고 흩으시며 다시 모으시는 하나님의 모든 역사들이 전부 이해될 때, 성경에서 기록된 사실들의 무오한 성격이 인간 앞에서 가치화 될 것이다.
성경 무오는 하나님의 역사
우리가 모든 현상들을 하나님 앞에서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작업은 우리에게 가장 어려운 작업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무오한 성격은 그 어려운 작업 속에서 더 크게 증명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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