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감사는 믿음의 완성입니다(누가복음 17:11~19)

새벽지기1 2020. 10. 22. 16:50

“천국의 삶은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삶입니다.
엎드려 감사하는 것이 믿음의 완성입니다.”

 

우리는 코로나19 재난을 통해서 지극히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얼마나 감사한 것들이었는지를 깨닫고 있습니다. 추수감사주일의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추수감사절은 지극히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가장 큰 감사의 제목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절기입니다. 이 감사의 절기를 통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선물임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을 보면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그때 나타나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죄악의 모습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교만하며, 배반하며, 부모에게 반역하며…” 이러한 끔찍한 죄악의 모습들을 열거하는 한복판에 들어 있는 것이 ‘ 감사하지 않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감사하지 않는 것을 동일한 죄로 여기십니다. 로마서 1장에서는 감사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대표적인 문제로 열거합니다. 감사하지 않을 때 우리 영혼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생각이 허망해졌고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은 어두워졌습니다”(롬 1:21).

 

아담과 하와의 최초 타락 문제는 감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허망해지고 어두워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금하신 명령을 어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최초의 인간에게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실과 나무를 먹을 수 있고, 모든 것을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단 한 가지 금지명령만 주셨습니다. 만일 모든 것에 감사했
더라면 한 가지 금지명령을 쉽게 지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감사하지 않았을 때 생각이 허망해지고, 어두워짐으로 인해서 한 가지 금지명령이 불평의 내용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한 가지 명령에 대하여 불평과
불만을 가지고, 그것을 더 크게 여길 때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감사보다 불평과 불만이 더 빨리 나오고, 더 많이 나오는 것이 타락의 증거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분명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으면 더 구체적인 하나님
의 뜻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


오늘 본문은 큰 은혜를 입고 더 감사하지 않았던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마땅히 해야 할 감사를 행했던 한 사람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 지역을 지나시게 되었습니다. 그 지역에는 나병환자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에서도, 갈릴리에서도 버림받은 나병
환자들이었습니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갈릴리 사람들은 모여 살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양쪽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기에 그 사이 지역에서 함께 살았던 것입니다. ‘ 나병’ 이라는 공통분모가 그들을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지역을 지나셔야 했습니다. 꼭 가셔야 하는 길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좋은 길이 있었습니다. 그
지역은 사람들이 가고자 하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버려진 지역이고, 만나지 말아야 될 나병 환자들이 가득한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지역을 선택하셨고 지나가셨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이 들려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에서 놀라운기적을 일으키시고, 또 나병 환자도 나았다는 소문을 그들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때 열 명
의 나병 환자들이 예수님 앞에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놀라운 치유의 역사를 경험합니다. 예수님 안에는 놀라운 새 창조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분은 천지를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요, 성육신하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시는 재창조의 주님이십니다. 살아계신 주님께서 이 시대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들이 고침 받은 사건과 그 이후 일어난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믿음의 세 가지 단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첫째, 믿음은 문제와 필요 앞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나병 환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열 명만 살았던 지역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열 명만이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문을 듣고 예수님 앞에 나오면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다면 예수님 앞에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예수님께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간구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그들은 사람들을 가까이 접촉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문제는 매우 컸습니다. 그들의 삶은 위기였습니다. 완전히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상태가 아무리 심각해도 믿음의 소리는 하나님께서 들어 응답하십니다. 위
기 앞에서 우리는 더 크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재난의 기간은 도리어 하나님의 더 크신 능력을 체험하는 믿음의 기간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모이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기간이 될 수 있습니다. 경제적, 사회적으로 위기 가운데 있지만 참된 믿음,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는 믿음
을 체험하는 기간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함으로 기적을 체험하는 믿음

 

둘째, 말씀에 순종함으로 기적을 체험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 도와달라고 큰소리로 부르짖는 열 명의 나병 환자들에게 예수님이 “제사장들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
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지금 회복되는 것을 기대했는데 예수님은 왜 제사장들에게 가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율법에 의하면 나병 환자들이 치유되었을 때 사회로 복귀 여부를 제사장들이 결정했습니다. 당시에는 제사장들이 검진과 확인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미 “나았다”는 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너
희들은 나았으니 이제 제사장들에게 가서 몸을 확인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아직 회복의 징조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회복과 치유의 증조가 나타나지 않은 시점에 제사장들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할 때 그들이 무엇을 믿고 움직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
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약속하시고, 말씀하시고, 선포하신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제사장들에게 가는 도중에 나음을 입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들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 그러자 그들은 가는 도중에 몸이 깨끗해졌습니다“(14절). ‘ 가는 도중에’ 라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시점에는 낫지 않았지만 말씀에 순종해서 가는 도중에 그들이 깨끗해졌습니다. 증거를 먼저 보고 믿으려 하지 말고 말씀을 믿음으로 증거를 확인하라는 말씀입니다. 증거가 제시
되어야 믿는 것은 확인일 뿐입니다. 우리는 확인을 믿음으로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참된 믿음은 증거를 보고 믿는 확인이 아니라 믿음 그 자체가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믿음 자체가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입니다. 우리는 증거를 통해서 확인하고
나서 믿으려고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그 자체가 증거입니다. 믿음은 말씀에 순종함으로 말씀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엎드려 감사하는 믿음


셋째, 엎드려 감사하는 믿음입니다. 

이 단계의 믿음에서 아홉 명이 탈락합니다. 열 명이 동일하게 고침을 받았지만 단 한 명만 예수님께 돌아와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나머지 9명의 나병 환자들은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자기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왔습니다. 그는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15~16절).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 열 명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 명은 어디에 있느냐? 이 이방 사람 말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되돌아온 사람이 없단 말이냐?’”(17~18절).
마지막에 감사하지 않았던 9명이 믿음 없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들도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믿었기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 지역에 있던 많은 나병 환자 가운데 예수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긴청했습니다. 기도했습니다. 열 명 모두가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함으로 제사장에게로 가는 도중에 고침을 받았습니다. 문제와 필요를 가지고 간절히 나왔습니다.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응답도 경험했습니다. 지금까지의 발걸음이 모두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세 번째 믿음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엎드려 감사하는 믿음은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엎드렸다는 것은 경배를 의미합니다. 경배는 최고의 감사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의 절정, 예배의 완성은 감사입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온전히 영화롭게 하는 예배입니다. 믿음의 완성은 하나님의 응답에 대하여
경배하며 감사로 영광을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엎드려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것입니다. 참된
감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 문제와 필요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성도는 많습니다. 그것도 믿음입니다. 어떤 필요가 있어도 하나님께 구하지 않는다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시간이 없고 바빠서가 아니라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의 필요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왔을 때 응답받는 이는 적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그 크신 뜻에 따라 즉각적인 응답을 받는 이 또한 적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믿음에서 나아가 믿음으로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 영광을 올려 드리는 이는 더욱 적습니다. 때로 내가 원하는 응답이 없이도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는 것이 세 번째 단계 믿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경배와 감사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믿음은 응답받는 믿음으로, 응답받는 믿음은 감사하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감사가 믿음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인사이더는
믿음으로 감사하는 사람


예수님께 감사하지 않은 아홉 명은 틀림없이 제사장에게 확인받고 가족이나 친구에게 가서 자기 몸이 나았음을 함께
기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행동을 정죄하신 것이 아닙니다. 당연한 일이고 있어야 할 모습입니다. 우선순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느 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기적의 아이러니컬한 결과는 나병 환자들이 고침 받은 이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갔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자 그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되었다.” 도움이 필요할 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와 부르짖던 믿음의 사람들이 그 필요가 사라지면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적만을 바라는 믿음은 기적이 끝나면 감사도 끝납니다. 그러나 기적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면 기적은 계속 될 것입니다. 나머지 아홉 명은 고침은 받았지만 고쳐주시는 분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기적은 경험했지만 기적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은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유일하게 감사한 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웃사이더였습
니다. 그는 또 다른 의미에서 아웃사이더였습니다. 그는 나병 환자로, 또 사마리아인으로 그 시대의 아웃사이더였습니
다. 바로 그 한 사람이 진정한 인사이더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인사이더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어떤 공
동체, 어떤 사회, 교회이든 국가이든 사람들은 중심부에 있기를 원합니다. 본능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권력에 대한 욕
구든, 자신의 야망이든 간에 주변인으로 있는 것을 별로 원하지 않습니다. 중심에 있기를 원합니다. 인사이더가 되기
를 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인사이더는 믿음으로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주목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나병 환자는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감사를 했습니다. 그는 90%가 가는
길을 걷지 않았습니다. 이 시대에 감사하는 사람이 10%가 되겠습니까? 더 적을 것입니다. 많이 잡아야 10%입니다.
90%의 사람은 감사하는 인생보다 불평과 불만의 인생을 살 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시간 10분의 1을 감사의 시간으로 드
려질까요? 우리 언어 속에 감사의 언어가 10분의 1이 될까요? 우리 물질생활 속에 10분의 1이 감사의 드림이 될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 속에 과연 10분의 1만이라도 감사가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 아니라 좁은 길을 가는 것이 바로 감사의 삶입니다. 죄를 지을 때는 무리지어 함께 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 받고 주님 앞에 나올 때는 그 무리와 다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좁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감사도 마
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내는 불평불만과 함께 가는 길이 아니라 다른 선택을 해야 감사의 삶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그 한 명의 나병 환자는 즉시 감사하며 돌아갔습니다. 감사를 미루면 사단이 그 틈을 탑니다. 은혜를 잊어버리게 하고, 자신의 능력이라고 착각하게 하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게 합니다. 아무리 미뤄도 답이 없는 것이 감사입니다. 모든 것은 서두르면 사고가 납니다. 그러나 감사는 서둘러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서둘러야 하
고, 즉시로 해야 합니다. 그 한 명의 나병 환자는 겸손하게 감사했습니다.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고
개를 숙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엎드리는 것은 참된 경배 모습입니다. 예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은 굴
욕이 아니라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요, 참된 가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한 명의 나병 환자는 감사함으로 온전한 구
원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19절).

 

진정한 치유가 무엇입니까? 감사하지 아니하는 타락한 심성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병은 고침 받았지만 여
전히 타락한 심성이 있다면 온전한 구원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한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말씀
하시는 것은 감사하는 믿음을 통하여 감사를 잃어버린 인간의 죄가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감사
가 믿음의 완성입니다. 그 나병 환자는 단지 고침을 받는 믿음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는 믿음으
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나
오는 믿음도 중요합니다. 또 살아계신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믿음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믿음은 엎드려 감
사하는 것입니다. 내가 구하는 것을 받았든지 못 받았든지 감사하는 믿음이 있다면 우리의 믿음은 완성되는 믿음, 하
나님께 영광 올려 드리는 믿음, 영원한 천국에서 누릴 감사를 미리 체험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에서 우리의 언어
는 불평과 불만이 아닙니다. 원통함이 아닙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이 아닙니다. 영원한 천국의 삶은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하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삶입니다. 그 영원을 유한한 인생에서 연습하는 것
입니다. 엎드려 감사하는 것이 믿음의 완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