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순결한 지혜가 교활한 음모를 이긴다(느헤미야 6:1~16)

새벽지기1 2020. 10. 28. 07:00

“하나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백성들이 승리합니다.
순결한 지혜가 교활한 음모를 반드시 이깁니다.”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대적하는 이들은 언제나 거짓을 사용합니다. 어떤 일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지 거짓이 밑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거짓으로 협박하고, 위협하고, 사람들을 매수하고, 교활한 음모를 꾸며서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거짓된 협박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떤 음모에도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순결한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지혜로 거짓을 분별하고, 교활한 음모를 이기며,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순결한 지혜가 사단이 뒤에서 조종하는 교활한 음모를 이기고 승리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느헤미야의 대적들이 지금까지 사용한 방법들은 전혀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조롱과 비웃음, 위협들이 도리어 유다 백성들을 하나되게 만들었습니다. 더 열심히 성벽 재건에 집중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제 문짝만 달면 될 정도로 완성에 가까운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대적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성벽 재건을 방해하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포기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공격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성벽 재건을 막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의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것이 목적이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대적들이 공격의 초점을 바꿉니다. 유다 백성 전체가 공격 대상이었다가 이제는 느헤미야에게로 초점을 맞춥니다. 영
향력이 큰 지도자 한 사람을 무너뜨리면 백성 전체를 무너뜨리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를 가장한 교활한 음모대적들이 교활하고 간교한 음모로 느헤미야를 공격합니다. 그들의 음모에는 거짓, 속임수, 교활함으로 가득합니다. 그들은 세 가지 교활한 음모를 사용했습니다. 첫째, 평화를 가장해서 느헤미야를 해치려 합니다. “내가 성벽을 다시 건축해 허물어진 부분들을 남김없이 다 메웠다는 것을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원수들
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나는 아직성문의 문짝을 달지 못했습니다. 그때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이런 전갈을 보냈습니다. ‘ 오시오. 우리가 오노 평지의 한 마을에서 만납시다.’ 그러나 사실은 나를 해치려는 수작이었습니다”(1~2절).
산발랏과 게셈이 느헤미야에게 평화회담을 제의했습니다.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기였기 때문에 방심하기 쉬웠습니다. 성공을 눈앞에 둔 때 마음이 들뜨고, 분별력이 사라지기 쉽습니다. 사탄과 악한 자들은 이때를 노리고, 놓치지 않습니다. 역사적으로 평화를 이용하는 거짓된 무리들이 많았습니다. 한국사회에 출연한 이단사이비들은 공통적으로 평화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진실을 외면하고 거짓을 이용하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평화를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0장 34절에서 예수님께서 “내가 이 땅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공의 앞에 대면하는 것은 칼처럼 우리를 날카롭게 파헤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진리 앞에 서는 일 없이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칼입니다. 세상을 심판하시고 동시에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칼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칼이요, 우리를 죄에서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수술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하나님의 칼이 임했고,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가 임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시니”라
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분이 하나님의 칼을 맞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몸으로 우리가 담당해야 될 심판을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죽음과 함께 하나님의 영적 수술을 받아 우리가 다시 살 수 있는 구원의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평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
님의 공의를 경험하지 않는 하나님의 평안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는 구약 시대에 살았지만 평화가 쉽게 오지 않는다는 것을 분별할 수 있었습니다. 조롱과 비웃음, 위협을 일삼는 자들이 갑자기 평화를 말한다고 해서 평화가 진정 찾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단호하게 그들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들은 네 번이나 제안을
했습니다. 계속 제안하면 진정성 있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사람을 보내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 내가 큰 공사를 하고 있으므로 내려갈 수가 없소. 어떻게 내가 자리를 비워 일을 중지시키고 당신들에게 내려가겠소?’”(3절). 이것이 지혜입니다.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들의 업무가 무엇인지 드러내는데 시간을 소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무엇을 어떻게 거절해야 하는지를 압니다. 위장된 평화에 속아 시간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순결한 지혜입니다. 순결한 지혜가 교활한 음모를 이깁니다.

 

거짓 소문으로 무너뜨리려 하다


둘째, 거짓 소문을 통해 느헤미야의 지도력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첫 번째 음모가 실패로 돌아가자 산발랏이 다섯 번째 거짓된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 당신과 유다 사람들이 반역을 꾀하고 있고 그래서 성벽
도 건축하는 것이라는 소문이 여러 나라에 돌고 있으며 게셈도 그 말이 맞다고 했소. 게다가 이 소문에 따르면 당신이 그들의 왕이 되려고 하며 심지어 예언자를 세우고 예루살렘에서 당신에 대해 ‘ 유다에 왕이 있다!’ 라고 선포하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소. 이제 이 소문이 왕께도 보고될 것이오. 그러니 이제 우리가 만나서 함께 의논합시다’”(6~7절). 이 편지 내용은 거짓이었습니다. 느헤미야와 백성들이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의 신임을 받고, 친서까지 받으면서 일을 추진하고 있는데, 성벽이 재건되면 유다 백성들이 돌변해서 반역을 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빠져나갈 구멍을 여기에 마련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자신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만든 것처럼 거짓을 꾸민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편지를 봉하지 않은 채 사마리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보
냈습니다.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 언제든지 읽어볼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관리들이 보내는 편지는 보지 못하도록 인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장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보라는 것입니다. 그 소문이 사마리아에 서 예루살렘으로 오는 곳까지 나도록 만든 것입니다. 거짓된 소문이 왕에게 전해진다면 느헤미야는 당장 처형당할 수도 있습니다. 성벽
재건이 완성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이 소문을 해명하려고 페르시아에 다녀오는 동안 성벽 재건이 어떻게 될지도 모릅니다. 느헤미야가 거짓 예언자를 세워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한다는 것을 백성들이 알게 되면 리더십에 큰 문제가 생깁니다. 아주 교묘하고 교활하고 비열한 방법입니다. 잠언 6장 16절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7가지가 있는데 거만한 눈, 거짓말하는 혀, 죄 없는 피를 흘리는 손, 악한 계략을 꾸미는 마음, 악한 일을 하려는 데 빠른 발, 거짓말을 쏟아 붓는 거짓 증인, 형제들 사이에 불화를 심는 사람입니다. 이 중에서 세 가지가 거짓 소문과 관
련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단호하게 거짓이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가 더 간절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이런 회답을 보냈습니다. ‘ 당신이 한 말은 모두 거짓이오. 당신이 꾸며 낸 것일 뿐 실제로 그런 일은 없소.’ 그들은 우리에게 겁주려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낙심해 공사를 끝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여, 이제 제 손을 강하게 하소서”(8~9절).
느헤미야는 거짓 소문을 해명하는 일에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단호하게 거짓을 알리고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더욱 일에 집중했습니다.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염려와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집중할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해명은 간단하게, 그러나 기도는 깊이, 더 많이 하는 것이 순결한 지혜입니다. 순결한 지혜가 교활한 음모를 이깁니다.

 

두려움을 이용해서
율법을 범하게 만드는 음모


셋째, 두려움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게 만드는 음모입니다. 거짓된 무리들은 반드시 매수해서 사람들을 확보합니다. 거짓된 일에 기쁘게 참여할 이는 없습니다. 모두 보상과 대가를 줘야 참여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매수된 사람들이 나옵니다. 느헤미야를 넘어뜨리려는 세 번째 음모는 느헤미야와 가까운 사람을 매수해서 거짓으로 두려움을
갖게 한 다음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어느 날 므헤다벨의 손자이며 들라야의 아들 스마야가 두문불출하므로 내가 그 집에 갔더니 그가 말했습니다. ‘ 사람들이 당신을 죽이러 올 것이니 우리가 성전 안 하나님의 집
에서 만나 성전 문을 닫읍시다. 그들이 밤에 당신을 죽이러 올 것입니다’”(10절) 스마야는 느헤미야와 잘 알고, 가까운 사람입니다. 스마야가 두문불출하자 느헤미야가 심방을 했습니다. 스마야는 느헤미야의 호기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두문불출했습니다.연락할 방법이 없으니 집으로 찾아간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큰 도시가 아니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찾아가 볼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집에 갔더니 자기가 엄청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것처럼 심각한 얼굴을 하고 느헤미야의 편인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는 느헤미야의 편인 것처럼 거짓으로 느헤미야를 두렵게 해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는 것만이 사는 길이라고 제안했습니다. 만일 느헤미야가 두려움 때문에 ‘ 그래야 되겠다’ 고 생각하는 순간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든지 제사장 외에는 들어가서는 안 되는 영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했습니다. ‘ 나 같은 사람이 도망가야 되겠소? 나 같은 사람이 성전 안으로 들어가 목숨이나 구하
겠소? 나는 가지 않겠소!’ 그 순간 나는 하나님이 그를 보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도비야와 산발랏이 그를
매수해 그가 나에 대해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 그들이 나를 협박하려고 그를 매수해 내가 두려움에 휩싸인 나머지 그
렇게 하다가 죄를 짓게 하며 오명을 쓰게 해 결국 나를 비방하려는 것이었습니다”(11~13절).
느헤미야가 교활한 음모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의 말에 답이 있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도
망가야 되겠소? 나 같은 사람이 성전 안으로 들어가 목숨이나 구하겠소? 나는 가지 않겠소!” 이 말은 그것이 사실이
라고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지 않겠다는 대답입니다. 11절 시점까지는 느헤미야가 스마야의 말을 믿
었습니다. 그런데 스마야의 말이 거짓인 것을 안 것은 12절‘ 그 순간’ 입니다. 그 순간 그가 하나님이 보내시지 않았다
는 것과 그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평소 아주 가까운, 신뢰했던 사람이 말하면 사실인 것처럼 느낍니
다. 그의 제안이 나를 위한 것처럼, 내 편인 것처럼 할 때 쉽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위
배되는 것이라면 아무리 가까운 사람, 내 편에서 말하는 것이라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믿음이 순결한 지혜입니다.
느헤미야는 바로 그 순간 스마야가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분별력이 임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을 걸고 순종하려고 할 때는 세상의 그 어떤 거짓과 음모도 분별할 수 있습니다. 분별력을
하나님께서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느헤미야처럼 생명을 내걸고 지키려고 할 때 분별력이 임합니다.
순결한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에게 아무리 이득이 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멈춰야 합니
다. 자신에게 아무리 손해가 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을 포기하면 영적 지도력
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구약의 여러 왕이 그랬습니다. 웃시야 왕도 강성해지니까 교만해져서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
는 곳에 들어가 분향을 했습니다. 사울 왕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위기에 부딪히고 백성들이 흩어지니까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제사장처럼 집행을 하다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런 사례들이 우리에게 보여주
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주시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는 통로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때 우리에게 순결한 지혜를 주시고, 영적 분별력을 주심으로 교활한 음모를 간파하고,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순결한 지혜가 교활한 음모를 이겼다


느헤미야가 “내 목숨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겠느냐? 나는 차라리 율법을 지키며 내 생명을 내 놓겠다”
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담대한 믿음이 있다면 세상의 그 어떤 거짓도 이길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세상에 속습
니까? 왜 거짓에 넘어갑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생명처럼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반드시 지켜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지혜입니다. 순
결한 지혜입니다. 모든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느헤미야가 마지막 단계에서 교활한 음모 세 가지를 넘어
설 수 있었던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는 신앙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순결한 지혜가 필요합니다.
드디어 승리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순결한 지혜가 교활한 음모를 이겼습니다. 52일 만에 성벽이 완공되
었습니다. 그때 모든 것이 반전되었습니다. “이렇게 해 성벽 건축이 52일 만인 엘룰 월 25일에 끝났습니다. 우리 원수들이 모두 이 소식을 듣고 주변 나라들이 보고 모두 두려워하고 절망감에 휩싸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그들도 알게 됐습니다”(15~16절).


느헤미야와 백성들을 두렵게 하고 절망하게 했던 모든 이들이 도리어 두려워하고 절망하게 됐습니다. 그들이 하나
님께서 하신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한 역사의 목적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처한 상황을 보면 교
회를 악한 집단처럼 매도하고, 뭐라고 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교회를 나쁘게 보려는 흐름이 있습니다. 일부 교회에 문
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더 큰 영역을 보면 교회가 사회에 미치는 선한 영향력, 세상을 향한 섬김, 나눔, 봉
사를 모두 매도해 버리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달라고 하소연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한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면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비방하려고 했던 이들이 과연 교회 안에 임하신 하나님을 보고 두려
워하며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왜곡되게 세상에 소문을 냈던 이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
것이 하나님의 선한 역사라고 믿습니다.


교회는 더욱 순결한 지혜로 가득해야 합니다. 세상적인 방법으로 세상과 싸워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는 온갖 거짓
과 음모와 탐욕이 가득하지만, 세상에 없는 것이 순결한 지혜입니다. 생명을 내걸고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선한 백성들은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순결한 지혜가 교활한 음모를 반드시 이긴다는 증거를 이 말씀
을 통해 주셨습니다. 승리를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때로 삶에서 거짓과 음모와 교활함으로 우리
를 무너뜨리려는 사람들을 만난다 할지라도 반드시 승리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고, 그들이 하나님을 두
려워하는 선한 백성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