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리민수목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롬7:14-25 그리스도인의 내적 갈등)

새벽지기1 2019. 2. 23. 07:43

6

7

8

세례와 성화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해방!

6:1-11 세례-그리스도와 연합

6:12-23 성화의 자세

-자신을 의의 무기로 드리라!(6:13)

7:1-6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

7:7-13 죄를 깨닫게 하는 율법

7:14-25 그리스도인의 내적 갈등

두 법 사이에 낀 성도의 삶-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7:24)

내가 확신하노니...(아무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8:38-39)

성도여,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의의 확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7:14-25 그리스도인의 내적 갈등)

 

본문


14.우리가 율법은 신령한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15.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16.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7.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8.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20.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해석과 설명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율법이 일러준 대로 법죄 하지 않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고자 할 때에도,

성도들은 여전히 부패한 속성을 갖고 있는 육신에 속하여 있는 고로 어쩔 수 없이 자주 실패를 경험하게 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그러한 갈등 중에도 끝까지 죄와 싸워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줄 알거니와

여기서 신령한(헬 프뉴마티코스)’육체적이 아닌 영적인이란 뜻이다. 율법은 인간 모세가 제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를 통해 인간들에게 주신 것이므로 신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나는 신령하지 않아라는 의미다.

여기서 육신에 속하다는 말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육신, 즉 죄의 성향을 지닌 인간임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울이 자신을 가리켜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라고 고백한 것과 롬6:6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라고 언급한 내용과 상치 되는 듯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는 죄의 노예 된 상황에서 헤어 나올 수 없으니, 죄에서 벗어나게 해 주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25)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양자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15)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이는 바울이 무의식 중에 무슨 일을 행한다거나 또는 맹목적으로 행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엇이 행하는 죄악이 자신이 보기에도 생소하고 이상하게 보인다는 뜻이다.(렌스키)

바로 여기에 성도가 느끼는 갈등이 있는데 이는 실상 성도만이 느끼는 갈등이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거듭나지 않은 자에게는 하나님 앞에서의 죄의식이 없으니 원치 아니하는 죄를 행하는데 따르는 갈등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원하는 것이란 선을 행하는 것’(19)이다.

이처럼 인간이 원하는 선은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하게 되는 까닭은 아담 이래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 본성이 죄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즉 법적으로는 예수의 피 공로로 인해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었으나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의 성향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므로 이것이 기회 있을 때마다 충동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8:12-13)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16)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본문은 이처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행할진대로 번역함이 전후 문맥으로 보아 보다 적합하다.

즉 율법은 엄연히 악을 행지 말고 선을 행하라고 명하며 또한 성령으로 거듭난 속 사람역시 선을 행하기를 즐거워하되(22), 그것과 관계없이 여전히 살아 꿈틀대는 죄의 성향은 우리로 하여금 넘어지고 또한 낙담하게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여기서 선한(칼로스)’12절에 나오는 선한(아가도스)’과는 다른 말이다.

왜냐하면 아가도스는 본질적인 선을 말하는 반면, ‘칼로스도덕적 고귀성을 뜻하기 때문이다.(휘트머

 내가 율법을 범하여 죄를 짓든, 안 짓든 율법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선할 뿐 아니라 의로운 것이라는 것이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7)

여기서 이제는은 시간적 차원에서의 전환이 아니라 논리적 차원에서의 전환을 의미한다.

따라는 이 단어는 그런즉또는 그렇다면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이처럼 바울이 자신과 자신 속에 거하는 죄를 구분 짓는 것은 결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법적, 신분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은 자라고 할지라도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 본성, 죄의 성향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고백하는 말이다.

성도는 때때로 범죄치 않는 것은 아니지만 날마다 상습적으로 범죄 하지는 않는다.


<참고>“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일3:6)”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요일5:18) 이는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을 주장하셔서 육식의 소욕을 제어하도록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5:17)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14)과 같은 말이다.

내 속’, ‘내 육신은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 본성 곧 죄의 성향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런 성품 가운데 악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을 뿐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는 없다는 것이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예수 믿고 의롭다 함을 얻었으며 성령으로 거듭난 우리의 속사람은 선, 즉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고자 하되 우리의 부패한 인간 본성이 자꾸만 이를 가로막고 범죄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육신의 연약성또는 육신의 한계라 할 수 있다.

예컨대 돌아오사 제자들의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시몬아 자느냐 네가 한시 동안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14:37)” 이런 상태를 말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19)

본 절은 15-18절 내용을 요약하고 있는 부분이다.

즉 이미 법적으로 구원 받은 성도라 할지라도 연약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이상, 완전히 죄의 성향을 죽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끊임없이 죄와 싸워야 한다는 것(5:8-14)을 강조하는 말이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는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16절 내용의 반복 표현이다.

하지만 강조점은 서로 다르다. 16절에서는 율법은 선한 것이며, 오히려 자신의 타락한 본성이 자꾸만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이라면, 본 절은 내가 자꾸만 원치 않는 악을 행하게 되는 이유가 나의 타락하고 부파한 인간 본성 때문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이는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17절의 반복이다.

이 역시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강조한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21)

여기서 한 법 보통 말하는 한 원리를 깨달았다는 말이다.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에게서도 똑같이 일어나는 한 가지 철칙을 깨달은 것이다.

그것은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자신에게 악 또한 함께 있다는 사실이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22)

내 속 사람

여기서 속 사람이란 5절의 육신과 대조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자아를 가리킨다.

바울은 이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4:24)라고 표현했다.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여기서 하나님의 법율법을 포함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의미한다.

예수를 주로 고백한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즐거워하고 깊이 사모하게 된다.

하지만 안타까운 현실은 이러한 기쁨을 계속해서 누리지 못하게 하고 끊임없이 방해하는 세력이 바로 사단의 세력이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여기서 지체5절과 마찬 가지로 쉽게 죄의 도구로 전락하는 연약한 신체 각 부위를 가리킨다.

또한 한 다른 법이란 21-22절에서 언급한 내용으로 바울이 깨달은 한 법즉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속사람과 대비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죄를 짓고자 하는 육신의 죄 성을 가리킨다.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여기서 마음의 법이란 성령께서 하나님의 법을 기뻐하며 준행하도록 우리의 마음속에서 역사하는 것을 말한다. 즉 성도 안에서 늘 마음의 법죄의 법이 싸우는데 종종 죄의 법이 마음의 법을 꺾고 나를 죄의 법아래로 이끈다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사로잡아 오다는 말은 군사 용어로 포로로 삶다’ ‘포로로 데려가다는 뜻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여기서 곤고한 사람고난을 많이 겪은 사람을 의미한다.

공동 번역은 이를 비참한 사람이라고 했다.

이처럼 바울이 자신을 가리켜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하고 있음은 자신에게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라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바 악을 행하는 죄 성이 여전히 살아있음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19)

그리하여 자신이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었음에도 북구하고 시시때때로 살아 역사하는 죄의 성향을 어떻게 하지 못하는데 대하여 스스로 절망했기 때문이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여기서 사망의 몸이란 죄와 사망의 권세에 속박 당하여 벗어나지 못하는 비참한 인간의 처지를 가리킨다.

사실 아담의 범죄아래 모든 인간은 죄 아래 있음으로 사망의 올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5:12)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사망의 권세를 능히 깨뜨리고 자신을 구원해 줄 구원자가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다.

여기서 건져 내다(뤼오마이)’구출하다는 뜻으로 적군의 손에 생포된 전우를 적진에 뛰어드는 병사를 상기시켜 주는 단어.(가뎃)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는 곧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24)고 한 질문에 대한 답이다.

바울은 인간 스스로는 결국 사망에 처할 수 밖에 없으나 그러한 처지에서 자신을 구원해 준 이가 그리스도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은 이처럼 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관해 얘기하면서 다시금 하나님의 법을 기뻐하는 속사람과 죄의 정욕을 좇는 육신의 대립, 갈등에 관해 언급하는 이유는 성도가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중에 끝까지 인내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올무에서 해방된 자다.

 

교훈과 적용


그리스도인의 내적 갈등과 해결!

앞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그 자체가 선한 것이며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증거 했다.

하지만 율법의 역할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후에도 그 역할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이 구원 받는 것과는 전혀 무관할지라도,

구원 받은 성도의 성화(sanctification)의 삶을 위해 절대적 필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바울은 율법의 조항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자신의 뜻과는 다르게 율법의 요구와 반대되는 악을 계속 행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크게 탄식한다.(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바울은 앞서 14절에서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고 했다.

여기서 육신에 속하다는 말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육신,

즉 죄의 성향을 지닌 인간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바울이 깨달은 것은 21절이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결국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

성도의 내적 갈등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며

성도는 그 갈등 중에도 끝까지 죄와 싸워 이겨야 한다는 것이.

, 인간 스스로는 죄의 노예 된 상황에서 헤어 나올 수 없으니,

죄에서 벗어나게 해 주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 필요(25)하다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7:2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