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59장은 세 가지 내용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판을 받게 되었을 때 그들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핑계를 대며 죄를 부인했습니다. 어떤 일이 생기면 사람은 자기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자꾸 주변 환경을 탓하고 상대방을 비난하고 핑계 대는 경우가 많은데 이스라엘 백성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적나라하게 지적하십니다. 둘째, 이렇게 죄를 지적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지적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잘못했습니다’라고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죄를 지은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죄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적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합니다. 셋째, 이렇게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고 받아들이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구원을 약속하는 축복의 말씀을 주십니다. 이것이 이사야서 59장에 나타나는 내용입니다. 오늘은 첫 번째 부분의 내용을 이야기 하겠습니다.
죄를 지적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 민족이 이렇게 고통당할 때 하소연하고 처절하게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하나님께 대듭니다. 이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보지 못한 내면의 죄를 지적하십니다. 모든 인간에게는 죄를 위장하는 기술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를 것이다’라며 자기를 위장하고 떳떳하게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적하신 죄는 우리가 생각하는 개인적, 도덕적인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신랄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묻고 있는 것은 공동체적, 사회적인 죄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너무 개인주의적이고 너무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부흥했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전혀 영향력을 주지 못합니다. 지금은 거꾸로 “도대체 너희들이 한 것이 무엇이냐? 몸집만 컸지 실제로 우리들에게 감동도 주지 못하고 우리를 변화시키지도 못하지 않느냐?”하고 사회가 우리에게 계속 질문합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할 문제가 있습니다. 이 세상이 가지고 있는 모든 사회악에 대해서 기독교인이 침묵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와 상관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 상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죄를 물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적하시는 사회악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공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사회 도처에서 불의한 일들이 일어나는 데 침묵하는 것입니다. 둘째 재판입니다. 잘못된 기소를 하고 잘못된 재판을 하는 것입니다. 잘못 기소하고 잘못 재판하면 사회가 기준을 잃어버립니다. 당시에도 억울한 재판이 많았습니다. 셋째 만연한 죄의 문화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지적하십니다. 이제 하나씩 찾아보겠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
“보라. 여호와의 손이 너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다. 귀가 너무 어두워서 듣지 못하시는 것이 아니다. 다만 너희의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을 뿐이다. 너희의 잘못이 하나님의 얼굴을 가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희의 말을 듣지 않으실 뿐이다.” (사 59:1~2)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논쟁은 이것입니다. “그렇게 울며 통곡하며 처절하게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돌보지 않았다. 우리가 어렵고 힘들 때 외면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이 섭섭했습니다. 하나님께 상처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불평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귀가 어두워서 아무리 기도해도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상황이 이해는 됩니다. 외세에 침입을 받아 나라를 빼앗기고, 가장 비참한 삶을 살게 되면 사람들은 원인을 찾을 여유를 잃어버립니다. 내가 죽게 되었고 배고프고 병들었고 망하게 되었다는 현상을 심각하게 생각할 뿐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오해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손이 짧으신 하나님, 귀가 둔하신 하나님으로 오해하고 하나님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현상이 아니라 원인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만 너희의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을 뿐이다. 너희의 잘못이 하나님의 얼굴을 가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희의 말을 듣지 않으실 뿐이다.” (사 59:2)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귀가 어두워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 보고, 다 듣고 계십니다. 그런데 접근을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죄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은 “너희의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다”고 합니다. ‘갈라놓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분리를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떠난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열쇠는 죄를 고백하는 것
여기서 중요한 영적원리 하나를 발견합니다. 우리 안에 죄가 숨어 있다면 아무리 소리쳐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발광을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내 안에 숨어있는 죄를 고백하고 인정하고 드러내면 축복이 강물처럼 흘러넘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축복이 강물처럼 흘러넘치기를 바랍니다. 생각의 틀을 바꾸십시오. 문제의 원인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지은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은 상상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나에게 오십니다. 그렇게 멀리 있던 하나님께서 나를 어루만지시고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시고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 (시 32:5, 66:18)
여러분, 그릇을 깨끗이 닦아야 그 안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깨끗한 그릇입니다. 화려한 그릇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죄가 있다면 우리가 금식을 해도, 방언을 해도 하나님은 듣지 않으십니다. 다른 것으로 하나님 마음을 사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마음에 들려면 깨끗해야 합니다. 순결해야 합니다. 거룩해야 합니다. 진실해야 합니다. 자기 죄를 감추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해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죄를 고백하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지 잘 됩니다. 축복이 흘러넘칩니다. (잠 28: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허물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온누리교회는 온누리교회 대로 허물이 많습니다. 이것을 다 하나님 앞에 드러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개인적인 삶이나 공동체적인 삶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나만 깨끗하고 잘난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깨끗해지고 의로워지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지금 우리에게 원하십니다. 우리 사회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회, 우리 국가를 기뻐하시는 국가로 만들 책임이 있습니다. 살인, 거짓말, 억울한 재판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적하신 죄악들은 무엇입니까.
첫째, 공동체적 살인죄입니다.
“너희의 손바닥은 피로 더럽혀졌고 너희의 손가락은 죄악으로 물들었구나. 너희의 입술은 거짓말을 하고 너희의 혀는 못된 말을 주절거리는구나.” (사 59:3) ‘손바닥은 피로 더럽혀졌다’, ‘손가락은 죄악으로 물들었다’는 것은 ‘살인, 폭력, 전쟁으로 네 손이 피로 더럽혀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한 집단이 한 사회의 문제입니다. 최근 미얀마 사태를 보면 군부가 국민들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나라 전체가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하나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죄 없는 이웃을 돌로 쳤습니다. 자기 자녀들을 몰렉이라는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 죽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을 기억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억울한 일, 불평등한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피를 흘리게 하면 안 됩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십니다.
둘째, 거짓말과 악한 언어입니다.
3절 뒷부분을 보면 “너희의 입술은 거짓말을 하고 너희의 혀는 못된 말을 주절거리는구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거짓말이 통념화된 것입니다. 이런 사회를 ‘신용이 없는 사회’라 합니다. 거짓말이 하나의 문화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말이 사납습니다. 악한 말, 독한 말, 못된 말로 상처를 주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도 한 개인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회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짓말 하는 사회는 마치 지옥과 같습니다. 서로 의심하고, 과장하고, 거부하고, 위선과 허위로 위장하고, 악한 말 독한 말 저주의 말을 쉽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결백한 사람을 변호해 주지 않고 아무도 진실하게 판결을 내리지 않는구나. 하풍을 믿고 거짓말만 해대는구나. 고통을 잉태했으니 슬픔을 낳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 (사 59:4)
셋째, 억울한 재판입니다.
아무도 결백한 사람을 변호해 주지 않는다는 것은 억울하게 기소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도처에 있는 것입니다. 잘못한 사람을 검찰이 잡아다가 기소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죄 없는 사람을 정치적인 이유로 죄를 만들어서 기소하는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기소가 되면 재판을 받게 되는데 재판장도 공의롭게 재판하지 않고 엉뚱한 판결을 내리는 것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기 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거짓 증언, 죄가 만연한 사회
넷째, 거짓 증언과 거짓 여론입니다. 4절 후반부를 보면 잘못되고 거짓된 증언이 자꾸 생깁니다. 거짓된 여론이 자꾸 만들어집니다. 거짓말을 진실처럼 위장합니다. 인권이 무시되는 나라에서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사람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회는 고통을 잉태하고 슬픔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독사의 알을 품고 거미줄을 친다. 그 알 가운데 하나만 먹어도 죽을 것이고 알이 밟혀서 깨지면 독사가 나올 것이다.” (사 59:5) 다섯째, 죄의 전파력과 영향력입니다. 끊임없이 주변에 죄를 파급시키는 죄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벌레를 잡아먹기 위해 치는 거미줄과 같습니다. 이 사회 곳곳에 거미줄이 있어서 거기에 걸려들기만 하면 여지없이 잡아먹히는 것입니다. 독사의 알을 품은 사회는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릅니다. 그 사회가 죄악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영향력으로 끊임없이 죄가 죄를 낳는 살벌한 사회가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들이 짠 거미줄로는 옷도 만들 수 없고 그들이 만든 것으로는 몸을 가릴 수도 없다. 그들이 하는 짓이란 사악한 행동뿐이고 손으로 저지르는 짓이란 폭행뿐이다.” (사 9:6) 여섯째, 죄가 만연한 사회입니다. 거미줄로는 옷을 만들 수도 없고 몸을 가릴 수도 없습니다. 수치를 가릴 수도 없습니다. 그들이 하는 짓은 사악한 행동뿐이요, 손으로 저지르는 짓은 폭행뿐입니다. 이런 일들이 옛날에는 일부에서 일어났는데 지금은 사회적인 현상이 되었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사회전체가 악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것을 보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사명 “그들의 발은 나쁜 일을 하려고 뛰어다니고 무고한 사람을 죽이려고 빨리 다닌다. 그들의 생각은 못된 궁리뿐이고 그들이 가는 길에는 폐허와 파멸만 깔려 있다.” (사 59:7) 일곱째, 죄를 짓기 위해 바쁜 사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그런 사회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굉장히 마음이 아팠습니다. 마치 우리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크고, 예수 믿는 사람도 많고, 기독교 행사도 많은데 그것과는 상관없이 국민의 윤리, 도덕, 정신적 상태가 어느 누구도 손댈 수 없을 만큼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관공서, 권력기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반 국민들도 똑같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어떻게 이 세상을 구원하겠습니까. 어떻게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회로 만들겠습니까. 교회가 가야하는 길은 분명합니다. 정치적인 투쟁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십시오. 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주체가 되십시오. 사랑, 희생, 헌신으로 세상 곳곳으로 들어가서 쓰레기를 치우고 변화시키고 독한 사람들을 착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런 일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이것이 있어야 통일이 옵니다. 이것이 있어야 세상이 변화됩니다. 올해 우리는 ‘세상에 희망을 주는 교회’를 목표로 삼았는데 내년에는 ‘세상에 평화를 심는 교회’로 하려고 합니다. 거짓 평화, 잘못된 평화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 평화를 세상에 선포하고 이 땅에 심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가는 길에는 공의가 없다. 그들이 스스로 길을 굽혀 놓았으니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은 모두 평화를 모를 수밖에 없다.” (사 59: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평화가 없을 때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이 가짜 평화입니다. 지금 남북한에 평화시대가 왔다고 하지만 그것은 가짜 평화입니다. 평화는 그렇게 오지 않습니다. 정상회담을 했다고 평화가 오지 않습니다. 국민의 도덕적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한, 영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참 평화는 오지 않습니다. 정치적 협상은 아무런 평화를 만들지 못합니다. 속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희생을 하셨습니다. 오늘 교회에 그 희생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십자가를 지는 희생, 헌신을 해야 세상이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희망을 가지십시오. 교회는 그 역할을 하기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아름답고 깨끗하고 의롭고 정직하고 공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책임이 주어졌습니다. 이것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것이 메시아가 도래하는 이상적 사회입니다. 오늘 여러분 안에도 하나님의 비전이 평화가 흘러넘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당신이 사랑하는 종들에게 하늘의 평화를 주옵소서. 이 사회는 평화를 잃었습니다. 기쁨도 잃었습니다. 무섭습니다. 잔인합니다. 집단적으로 죄를 짓습니다. 오 주여, 저희들로 하여금 세상에 들어가서 밀알이 되게 하옵시고, 소금과 빛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