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어진 가슴에 불을 붙여라!
(렘20:7-9)
◆본문
7.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8.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9.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서론
먼저 지난 3일간의 금식 사경회 승리를 축하합니다.
우리는 지난 3일간 예레미야서를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헌신을 결단하는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공부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순종과 헌신을 결단할 시간입니다.
오늘 메시지 제목이 ‘식어진 가슴에 불을 붙여라!’입니다.
여기서 ‘불’은 성경에서 통상 ‘성령’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2:49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이 뜻은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의 말씀이 이 땅 가운데 온전히 전파 되지 못함을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 될 때 이 땅 가운데 회개가 일어나고 교회가 부흥 되는 것을 기대하신 예수님의 한탄입니다. 하지만 그 불이 일어난 것은 사도행전2장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은 후부터 였습니다.
1.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2.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여기서 ‘불의 혀같이’라는 말은 세상의 물질을 태우는 불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태워 사하시는 ‘성령’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 될 때 우리의 심령이 뜨거워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누가복음24장에 보면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바로 그런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31.저희 눈이 밝아져 그 인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그렇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이렇게 성도의 가슴을 뜨겁게합니다.
예레미야가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다’고 한 것도 성령의 내주 역사하심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본론
그러면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일까요?
▶첫째, 우리 자신의 식어진 가슴에 ‘성령의 불’을 붙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역 중에 겪었던 박해와 고난을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사역자의 고난은 어쩌면 필수 일지도 모릅니다.
교회사에 있어서 그 어디에도 평탄 대로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선교현장은 언제나 고난과 핍박과 박해의 연속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이 그 증거입니다.
본문 말씀은 예레미야가 선지자직을 수행하는 데서 오는 고충을 탄식적으로 토로한 내용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이는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서 오는 곤고한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예레미야 자신이 기대했던 결과와는 상반된 결과, 즉 백성들이 회개는커녕 더욱 완악해진 것을 체험한 결과에 대한 낙담과 절규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렘1:7-10)에 순종했으나,
끝내는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소명과 현실사이에서의 갈등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서는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우상을 음란하게 섬기는 패역한 남유다에 대한 심판과 회복의 예언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는 책입니다.
예레미야는 선지자 중에 가장 불행한 선지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조국이 멸망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백성들이 우상을 섬겨 여호와를 배반하고 끊임없는 악행을 보고 통분하여 백성들을 크게 책망했지만,
목이 굳은 백성은 듣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예레미야를 옥에 가두고, 심지어 죽이려고 까지 했습니다(렘36:19).
이에 예레미야는 사역 중에 모든 에너지가 고갈되었고, 심신이 지처서 사역을 포기하려고 까지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영적 슬럼프 즉 영적 침체를 겪습니다. 하지만 그 침체의 원인은 여러 가지입니다.
다윗은 치열한 영적 전투 후에 안주한 나머지 영적 침체에 빠져서 범죄했습니다.
엘리야는 열정적인 사역과 승리에도 불구하고 파도처럼 몰려오는 대적의 공격에 무너져 호렙산에서 넘어져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오늘 예레미야 역시 성실한 사명 완수에도 불구하고 대적의 집요한 공격 앞에서 넘어졌습니다.
이런 상태를 영적 침체 또는 영적 고갈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오늘 날에는 무엇이 우리의 영적 슬럼프를 오게 할까요?
그중 하나는 비전(확신)없는 사역입니다.
즉 정체성과 사명감이 없이 의무감으로 할 때 무기력해집니다.
구원의 확신, 부르심에 대한 확신,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과의 교제 없는 분주함입니다.
신학자 A. W. 토우저박사는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보편적인 과오는 하나님의 일에 너무 바빠 하나님과의 교제를 게을리 하는 일이다. 이런 사람들은 조만간 하나님의 일에 대한 의욕조차 잃어버리고 시험에 들 가능성이 아주 많다. 교제를 게을리 하면, 그 교제에서 얻어지는 평안, 기쁨, 충만함, 안식 없이는 하나님의 일을 오래 지속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역자의 체력 소진이 사역자를 지치게합니다.
사역자의 자기 관리는 그래서 중요합니다.
그러면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은 그 영적 슬럼프를 어떻게 극복했을까요?
그리고 영적 침체 또는 영적 고갈이 ‘영적 가슴이 식어진 상태’라면, 어떻게 그 ‘식어진 가슴에 불을 붙일 수 있을까요?
오늘 밤 영적 엘리야에게서 그 답을 찾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는 ‘영적 갈멜산’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열왕기상18-19장에는 엘레야의 갈멜산 영적 전투 이야기가 나옵니다.
갈멜산은 이미 불신앙의 원흉이 되어버린 북이스라엘 백성들과 바알 선지자 850을 엘리야 홀로 상대해야 하는 영적 전투가 벌어진 곳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마침내 영적 전투는 엘리야는 대승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우리의 ‘영적 갈멜산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밤에 성령 충만을 뜨겁게, 그리고 간절히 구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명’을 회복해야 합니다.
엘리야에게 갈멜산은 ‘승리의 고지’였으며, 호렙산은 ‘슬럼프의 계곡’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갈멜산의 승리’와 ‘호렙산의 슬럼프’을 체험합니다.
왕상19: 9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0.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하지만 엘리야는 이 슬럼프에서 대탈출을 하게 됩니다.
어떻게 엘리야가 이 영적 극한 슬럼프에서 어떻게 대탈출하게 될까요?
그것은 바로 ‘새로운 사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왕하15-16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①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②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③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엘리야는 하나님께 세 가지 새로운 임무를 부여 받았습니다.
첫째는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왕으로 세우고,
둘째는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북이스라엘 왕으로 세우고,
셋째는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후계자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야를 이르켜 세운 것은 이 ‘새로운 사명’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 전파의 이중적 결과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즉, 복음 전파는 분명 구원 받기로 택정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기회가 되지만, 완고한 죄인들에게는 그들의 죄성이 더욱 드러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며, 오히려 죄인들의 핍박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입니다.
엘리야가 그랬고, 예레미야가 그랬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20:9)” 아멘!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오늘 우리가 금식을 하고 성령 충만의 은혜를 체험하고 말씀으로 무장해서 재충전을 하고 힘차게 세상(캠퍼스)로 나간다 해도, 상황은 여전히 바뀐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영적 침체의 수렁으로 들어가야 할까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는 이후 대적의 박해가 있었지만 예레미야는 더욱 가열차게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그렇습니다. 예레미야의 상황은 바뀌지 않았지만, 이제 예레미야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적 내공이 더 커진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식었던 가슴에 다시 불이 붙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식어진 심장에 불을 붙이라!’
이 밤에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첫 번째 명령입니다.
그러면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일까요?
▶둘째, 우리가 캠퍼스 부흥의 ‘불씨’가 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메시지의 키워드는 ‘캠퍼스’와 ‘불씨’입니다.
그러면 왜 캠퍼스 사역이 중요할까요?
첫째는 수원지 선교의 중요성때문입니다.
12개 선교단체 네트워크인 ‘학원복음화 협의회’의 ‘물근원 운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물을 가정으로 송수하기 전에 수원지에서 일괄 소독하여 가정으로 송수하는 것과 같이 학생들이 사회에 진출하기 전에 말씀 사상에 의 식 화되도록 하여 새로운 인생 철학과 가치관을 가지고 사회의 각 분야로 나가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대학을 졸업하는 이들이 마음속에 복음에 대한 열정과 민족의 장래에 대한 꿈과 이상을 말씀 안에서 확고부동하게 품고 준비된 가운데 사회의 지도자로서 임하도록 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만일 학생들이 인생 수원지인 학원에 몸담고 있을 동안에 말씀을 접하지 못하여, 인생관과 가치관 그리고 세계관에 대한 말씀의 소독을 받지 못하고 그대로 사회에 배출 된다면 그 만큼 사회는 탁해질 것이며, 복음을 접할 기회는 점차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캠퍼스 선교 운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수원지 선교의 중요성’입니다.
그리고 캠퍼스 사역이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인적 자원 공급원으로서의 중요성’때문입니다.
국내 선교든 해외 선교든 교회 목회든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자질을 갖춘 일꾼이 필요합니다.
한국교회의 제2의 부흥을 이끈 것은 캠퍼스 선교단체 출신 목회자들의 등장으로 시작됩니다.
또한 오늘 날 우리 대한민국이 선교사 배출 제2위국이 된 이유도 바로 캠퍼스 학생 운동입니다.
캠퍼스 선교단체에 의해 배출된 ‘복음에 대한 사명’이 충만한 졸업생들은 각계 각층 핵심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캠퍼스 선교 운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인적자원 공급원으로서의 중요성’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 물근원이 고갈되어 가는 안타까운 현실에 처해 있습니다.
저명한 미래 학자이며 목사인께서 최윤식 박사는 ‘한국교회의 미래지도-2028년도의 위기’라는 책에서 한국교회를 이렇게 예측했습니다.
<2050년까지 한국교회 성도 800만에서 300-400만으로 50% 줄 것이다.
그리고 우리 민족 교회의 심각한 문제는 앞으로 10년 내 발생할 것이다!
(성도 감소, 헌금감소가 원인)
교회가 어려워지고 고령화가 되면 가장 먼저 줄이는 것이 선교비다.
앞으로 한국교회 모든 선교 동력은 서서히 상실될 것이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이제 한국교회 역선교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이것을 속히 대비해야 한다.>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 캠퍼스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우리의 캠퍼스 사역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부터 270년 전 일입니다.
일본 요네자와번에 심각한 경제 파탄으로 중앙 막부에 번(우리의 도보다 작고 군보다 큰 행정단위)을 반환해야 할 상황. 이때 우에스기 요잔이라는 젊은 번주가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때는 한 겨울! 부임하는 길에 하루를 유숙할 곳을 물색하는데 모든 번민들이 집을 버리고 떠나버리고 텅 빈 집들만 남아 있었습니다. 가마에 타고 있던 번주 우에스기 요잔은 할 수 없이 노숙하게 됩니다. 우에스기 요잔이 다꺼진 화로를 저으면서 문뜩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번이 이렇게 불꺼진 화로 같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화저로 화로를 졌던 요잔은 ‘작은 불씨 하나’를 발견하고 '후후'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불씨가 꺼졌던 재에 붙기 시작하고 온기가 살아났습니다.
요잔의 머리 속에 번뜩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렇다. 이 번이 지금은 이처럼 꺼진 화로 같지만 누군가 불씨만 있다면 다시 일을킬 수 있다. 그래 내가 이 번을 살리는 희망의 불씨가 되자!'
요잔은 즉시 참모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방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여러분! 나와 더불어 우리 번의 희망의 불씨가 됩시다'
그러자 참모들이 나섰습니다.
'그 화로를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제가 그 불씨를 계속 살려서 이 성에 누구든지 성주의 뜻을 따라 개혁에 동참하는 자들에게 하나씩 나눠주겠습니다. 이 불씨가 꺼지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저항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하지 않고 개혁을 추진 한 결과 경제가 살아나기 시작했고 번민들이 서로 믿고 사는 신뢰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2000년대 초반에 출간 된 도몬 후유지가 지은 '불씨'라는 책의 줄거리입니다. 1
700년대 후반 약 260개의 번으로 구성된 막부체제의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으로, 한 사람의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제가 지난 날 사역초기 어려운 캠퍼스 사역현장에서 나에게 큰 도전을 주었던 책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지금 우리시대는 영적으로 그 어떤 엄동설한보다도 춥고 어둡습니다.
이제 누군가 캠퍼스에 불을 붙일 ‘불씨’가 필요합니다.
저는 그 ‘불씨’가 바로 저와 여러분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 힘든 캠퍼스 사역 많이 지쳤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도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를 강하게 붙잡는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이런 영적 암흑기는 교회사에 ‘주기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때마다 ‘그 시대의 남은 자’가 있어 다시 불을 지폈습니다.
오늘도 우리 중에 누군가는 이 시대의 ‘남은 자’로 ‘불씨’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레미야처럼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시대의 남은자’로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은 무엇일까요?
▶셋째, 캠퍼스의 부흥이 지속되도록 ‘기름을 부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캠퍼스의 ‘불씨’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불씨를 살려 ‘큰 부흥의 불길’로 번지도록 기름 붙는 일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부르심은 ‘불씨’로 살면서, ‘기름 붓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BC536년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고레스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귀환시켜 50년 전 불타버린 성전을 재건하도록 스룹바벨을 총독으로 4만여명을 귀환시켰습니다.
그리고 2년간은 성전 재건이 순조로운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성전건축을 허락하고 추진한 왕은 교체되었고, 지역 방백들의 방해는 극에 달했습니다. 결국 2년만에 성전 건축이 중단 됩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성전 재건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마침내 성전 중단 14년 후 BC520년!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깨우셨습니다.
바로 ‘학개선지자’입니다.
학1:3.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4.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
5.그러므로 이제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는 너희의 행위를 살필지니라
8.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하나님은 학개 선지자를 성전 재건의 ‘불씨’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 재건의 기름을 부은 자가 바로 스가랴입니다.
스가랴 4:6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벽돌과 나무로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지어지는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캠퍼스 사역은 우리가 하지만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확신입니다.
저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 한 가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한국 초기 선교 역사에서 27세의 나이로 박춘권의 칼에 죽임을 당하여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가 된 토마스 선교사님이 있습니다. 그는 영국 웨일스 출신으로 조선선교를 위하여 미국의 '제네럴 셔먼'호를 타고 왔습니다. (원래는 중국선교사로 중국에 와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통역자로서 셔먼호에 탑승했습니다.) 하지만 조선 땅을 밟지도 못하고 당시 박춘권이라는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이 때 토마스 선교사는 박춘권에게 성경책 3권을 건네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 당시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 최치량이라는 13세살 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토마스 선교사가 흘린 성경 3권을 주워 집으로 가져 왔습니다. 그리고 성경책을 평양성의 대동문을 지키던 박영식에게 줍니다. 박영식은 이 성경을 집으로 가져와 벽지로 요긴하게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벽지에 붙은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 후 최치량이 성인이 되어 박영식의 집을 구입하여 여관겸 주막으로 사용합니다.
그리고 이때 조선에 온 '사무엘 마펫' 선교사가 평양에 복음을 전하러 갔다가 이집에서 하루를 묵게 됩니다. 선교사는 최치량의 주막이 성경으로 벽지가 도배 되어있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그 후 놀랍게도 최치량도 예수님을 믿게 되고 그 최치량의 주막이 평양 최초의 널다리골 교회입니다. 이곳이 바로 1907년 평양대부흥 운동의 중심에 있던 장대현 교회의 전신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어느 날 널다리골 예배당 근처에 살고 있던 노인이 마펫 선교사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울면서 이렇게 죄를 고백했습니다.
‘제가 바로 30년 전에 토마스 선교사를 칼로 죽인 박춘권입니다. 저는 예배당에서 주일마다 울리는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박춘권은 그 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우리 나라에 복음의 불씨는 이렇게 붙여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한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캠퍼스 부흥을 위해 기름을 붓는 일일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캠퍼스에 ‘복음 전하는 일’입니다.
한 영혼이 돌아오는 것보다 큰 부흥은 없습니다.
참고로 학생선교운동의 시초는 17세기 독일의 할레(Halle)대학에서 일어난 기독 학생들의 경건주의 운동입니다.
독일 교회가 생명럭을 상실하고 있을 때 할레대학 기독 청년들을 중심으로 기도 운동을 시작했고,
독일 교회의 생명력을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이 경건 운동은 ‘전도의 열정’을 불러 일르켰고 독일 교회의 부흥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런 캠퍼스 경건 운동은 18세기 영국 캠브리지(Cambridge)대학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소위 ‘캠브리지 7인(캠대생 6명, 프린스톤 1명)’이라 불리는 학생들에 의해 시작된 경건운동은 1885년 캠브리지 7인 모두 중국 내지 선교회 선교사 파송됨으로서 세계 선교에 불을 붙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19세기 초 미국에서 소위 ‘헤이스텍(the haystec movement) 운동’이 일어나는데,
1806년 8월 메사추세츠 어느 건초더미에서 폭풍우를 피하던 대학생 중 누군가 기도제안으로 일어난 이 경건 운동은, 4년 만에 북미선교회를 결성하는 계기다 되었고, 1810년부터 60년간 527명의 학생들이 가입. 이중 50%가 선교사로 헌신하게 됩니다. 이 모두가 캠퍼스에서 시작된 불씨가 세계 선교를 주도하는 불길로 번진 것입니다.
부흥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 나라도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된 캠퍼스 선교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역시 서구 유럽과 미국 학생들에 의해 시작된 캠퍼스 운동의 연장선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이 대부분 그 기독대학생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캠퍼스 선교 운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역사가 보여주는 중요성’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이제 우리의 차례입니다.
내년 우리 캠퍼스 상황은 더욱 좋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성령의 역사는 그 어떤 장애물도 뚫고 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모쪼록 대망의 2019년 우리가 캠퍼스 부흥의 불씨가 되고, 부흥의 기름 붓는 제자로 살기를 결단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이제 우리가 지금 이 시간 여기서 결단해야 합니다.
첫째, 경건의 삶을 결단해야 합니다.
경건의 삶의 핵심은 ‘말씀과 기도’의 삶입니다.
바로 내일부터 말씀 나눔 방이 뜨겁게 달궈졌으면 좋겠습니다.
둘째, 충성된 제자로 살 것을 결단해야 합니다.
캠퍼스 현실은 암담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보다 더 뜨거우면 됩니다.
‘부러우면 지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캠퍼스 사역에서 ‘두려우면 지는 것’입니다.
셋째,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5)”
할 수 있는 한 ‘채플’ ‘아침 경건 모임’ ‘캠퍼스 모임’에 모이기를 힘쓰는 제자가 되기 바랍니다.
끝으로, 내가 감동받은 드라마 대사 한 부분을 소개하겠습니다.
(미스터 선샤인 드라마2018)
-유진초이(최유진) ‘그거 왜하는 거요? 조선을 구하는 거(독립운동을 말함)’
-고애신 ‘꼴은 이래도 500년을 이어져 온 나라요.
그 500년 동안 호란, 왜란 많이도 겪었소.
그럴 때마다 누군가는 목숨을 걸고 지켜내지 않았겠소?
그런 조선이 평화롭게 찢겨지고 있소.
처음에는 청이, 다음에는 아라사(러시아)가, 지금은 일본이,
이젠 미국군대까지 들어 왔소.
나라꼴이 이런데 누군가는 싸워야 하지 않겠오?‘
-유진초이 ‘그게 왜 당신인지 묻는 거요?’
-고애신 ‘왜 나면 안되는 거요. 죽는 것은 두려우나 난 그것을 선택했소.‘
나는 이 부분에서 온 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 민족을 구한 것은 이런 희생을 각오한 선조들의 희생의 댓가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 교회가 세워진 것은 이런 희생을 각오한 선교사들의 희생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이번 금식사경회를 마치면 ‘선교사 묘역 양화진’을 순례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대학생 때 하나님 앞에 했던 그 다짐을 다시 결단할 것입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아멘!
이 밤에 여러분의 결단은 무엇입니까?
이제 여러분이 반응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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