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하용조목사

예수님과 삭개오

새벽지기1 2018. 12. 12. 08:00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찾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만약 이 내용으로 연극을 한다면 놓쳐서는 안될 중요한 두 가지 포인트가 있는데 그것은 ‘만남’과 ‘변화’입니다. 여리고는 그 당시 큰 상업 중심 도시였습니다. 그곳에 세리장 삭개오가 살고 있었고, 예수님께서 그 여리고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키가 작은 삭개오는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뽕나무 위로 올라갑니다.(1~4절)  


삭개오의 중심을 보신 예수님 


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하신 두 가지 행동이 나옵니다. 그것은 ‘올려다보다’와 ‘말씀하시다’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먼저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신 것은 무엇일까요? 삭개오가 부자인 것을 보았을까요? 작은 키를 보았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열정을 보셨습니다. 사람들은 부자인 세리장 삭개오의 겉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삭개오를 미워하기도 하고 배척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겉모습이 아니라 뽕나무에까지 올라간 삭개오의 삶에 있는 열정을 보셨습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에는 ‘깨끗함’, ‘무죄함’이란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름과는 달리 삭개오는 자신이 깨끗하지 않고 무죄하지 않았기에 고민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을 보면 이처럼 겉보기에 되는 대로 막 사는 것 같지만 누구나 마음 가운데에는 ‘이렇게 살다가 이것으로 끝나면 어떻게 하지?’라는 고민과 갈등이 있습니다.


전도서 3장 11절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그분의 때에 아름답게 만드시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 속에는 주머니가 있는데 그 주머니는 돈, 건강으로도 만족시킬 수 없고 오직 영원한 생명, 양심적인 삶으로만 채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차지 않으면 평생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을 보신 것입니다. 삭개오의 이야기 바로 전인 누가복음 18장 35~43절에 소경 바디매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람들은 바디매오를 소경, 거지라며 무시했지만 예수님은 바디메오의 마음속에 한번 제대로 살고 싶은 열정이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영성이란 사람들의 껍데기를 뚫고 속에 있는 열정을 보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왜 뽕나무에 올라갔을까요? 다른 것은 모르지만 그 마음 가운데 인간답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왜 오늘 교회에 오셨습니까?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녔는지, 얼마나 많은 헌금을 했는지보다 뽕나무에 올라가서라도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보십니다.   


죄인에게 말을 거는 메시아 


둘째,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스쳐 지나가실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삭개오에게 말을 거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에게 말을 걸어오는 역사입니다. 뽕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처럼 민망해서 스스로 내려올 수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은 기적의 사건을 보여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말을 거십니다. 때때로 인간이 엉뚱한 길로 가면 징계와 심판을 내리면서까지 ‘나에게 돌아오라’고 말을 거십니다.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세상에게 말을 거는 공동체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거부하더라도 교회는 계속해서 세상에게 말을 걸어야합니다. 복음, 천국, 영원한 생명을 주제로 말을 걸어야합니다. 과학, 방송, 예술, 문화를 통해 세상에 복음, 천국, 영원한 생명을 주제로 말을 걸어야합니다. 교회가 잠잠하고 말을 하지 않으니까 거꾸로 세상이 교회에게 시비를 겁니다. 하지만 교회를 향해 시비를 걸고 있다는 것은 아직도 세상이 교회를 향해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러브 소나타’는 하나님께서 온누리교회를 통해 일본의 불신자들에게 말을 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비가 아니라 말을 거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삭개오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처음 교회에 나오셨거나 아직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오늘 이 시간 예수님께서 당신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냥 교회만 나오지 말고 나를 너의 구주로 영접하지 않을래?”라고 말을 걸고 계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한 가지입니다. 뽕나무에서 내려와서 예수님을 만나면 됩니다. 내 인생만을 위해 살아가는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오늘 나를 위해서 사역하지 않을래? 선교사로 나가지 않을래? 나를 따라 복음 전도자로 살아가지 않을래?”라고 말씀하십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  


뽕나무에서 내려온 삭개오에게 예수님은 “네 집에서 머물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들어갔을 때 삭개오는 자기 삶의 변화를 선포합니다.(6~10절)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주고, 훔친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구원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7절을 다시 보십시오.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보고 “저가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며 수군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따라 행동하시지 않고 목적을 따라 행동하셨습니다. “인자는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10절) 할렐루야! 사람들이 수군거려도, 사람들이 욕을 해도 예수님은 이 목적을 위해 행동하셨습니다. 죄인의 집에 들어가서 밥을 먹으면 밥을 먹은 사람도 공범으로 여겼던 사회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세리의 집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자신을 죄인처럼 여겨도 좋다고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결정을 하셨습니다. 얼마나 담대하고 놀랍고 용기있는 결정입니까. 분명한 목적을 기억하십시오. 수군거리는 소리는 당신이 용기있게 발을 내딛을 때 안개처럼 다 사라질 것입니다.

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왜 존재합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사랑하며 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하라고 예수님은 우리를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지금이 예수님을 만날 만한 때 


오늘 이 자리에 뽕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처럼 한번 제대로 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오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믿으렴”하고 초청할 때 속에서 나오는 수군거림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잘 살다가 이제 와서 믿으면 그게 뭐니! 기왕 믿을 거면 잘나갈 때 믿어야지. 기왕 믿을 거면 젊어서 믿어야지 60세가 넘어서 지금 믿겠다니 꼴 좋다’하는 귀신들의 수군거림이 있습니다. 이 수군거림을 따라 행동하지 마십시오. 영원히 살고 싶은 마음을 찾아 결정하고 목적을 향해 걸어가십시오. 그러면 삭개오가 구원받은 것과 같은 놀라운 사건이 일어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처럼 사는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을 볼 때 사람속에 있는 열정을 볼 수 있는 영성이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세상을 향해 복음으로 말을 거는 놀라운 능력이 있을지어다. 남들이 수군거리고 비웃을 지라도 믿음의 길을 담대히 가는 놀라운 역사기 있을지어다. 아울러 뽕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처럼 한쪽 구석에는 영원히 살고 싶은 마음, 제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스스로 내려올 수 없는 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지금 이 시간 초청하십니다. 사람들이 당신의 인생을 보고 수군거려도 예수님은 당신이 겁먹지 않고 예수님을 영원히 주님으로 맞이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누가 비난하고 그 누가 수군거려도 당신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선택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오늘 당신을 부르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