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권혁승교수

예레미야의 70년 예언과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새벽지기1 2017. 12. 28. 07:1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렘 29:10)  

 

예레미야는 베냐민 땅 아나돗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로 태어났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제16대 왕이었던 요시야 재위 13년(기원전 627년)에 예언자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배반하며 율법을 저버린 이스라엘이 장차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예레미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은 이스라엘은 그의 예언대로 바벨론에게 점령당하였고 지도층들은 모두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은 예레미야가 유대에 머물러 지낼 수 있도록 선대하였지만, 유다 총독으로 임명된 그다랴가 암살당하면서 그는 이집트로 내려가 거기서 일생을 보냈다. 일설에 의하면, 예레미야는 이집트로 내려가는 도중 돌에 맞아 죽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예레미야는 유다 왕국 말기로부터 바벨론 포로가 시작될 무렵까지 무려 40년 동안 예언활동을 하였다. 만족의 타락과 임박한 비극을 눈앞에 두고 활동하였던 그는 ‘눈물의 예언자’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예언 활동기간 동안 시종일관 유다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당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성전의 불멸성을 강조하는 거짓 예언자들에게 현혹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는 잘못을 범하고 있었다.

 

비록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멸망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갈 것을 예언하였지만, 미래의 희망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미래 희망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은 예레미야의 ‘새 언약’ 예언이다(렘 31:33).비록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함으로 시내산의 ‘옛 언약’은 파기가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새롭게 갱신하여 영원히 지속될 ‘새 언약’을 세우신다는 것이다. 민족적 비극이기도 한 바벨론 포로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언약관계 정립을 위하여 반드시 거쳐야 할 필수과정이라는 것이 ‘새 언약’ 의 핵심 요지이다.

 

예레미야가 ‘새 언약’ 예언에 앞서 먼저 제시한 것이 ‘70년 예언’이다. ‘새 언약’은 바벨론 포로라는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주어진 결실이라면, ‘70년 예언’은 바벨론 포로가 영원한 형벌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예레미야의 70년 예언 역시  거짓 예언자들과 밀접히 관련된다. 그들은 얼마 있지 않으면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벨론에서 해방시킬 것이라고 백성들을 현혹시켰다(렘 29:8-9). 거짓 예언자들의 그런 주장과는 정반대로 예레미야는 바벨론 포로가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라고 백성들을 설득하였다. 그러면서 예레미야는 그들이 바벨론에 정착하여 정상적인 생활기반을 마련할 것과 대를 이어 자녀를 낳아 민족적으로 크게 번성할 것을 권면하였다(렘 29:5-6). 그 기간이 ‘예레미야의 70년'이다.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엄청난 비극을 경험하였지만, 그 기간이 70년으로 제한된다는 것은 절망 속에서 찾은 희망이 아닐 수 없다(렘 25:11-13; 29:10). 때로 하나님께서는 잘못한 것에 대하여 진노하시지만,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정하신 기간이 지나면 본래의 상태로 회복시켜주시는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이 ‘노역'의 때가 끝났기 때문이라고 선언했다(사 40:2). 여기에서 ‘노역’은 강제로 동원된 병역 기간을 의미한다. 바벨론 포로기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부여한 복역의 때이다. 그 기한이 끝나면 모든 억압에서 자동적으로 풀려난다. 그런 의미에서 예레미야가 강조한 70년은 인내로 기다려야 하는 희망이었다.

 

예레미야의 70년은 다니엘과 스가랴의 예언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다니엘은 말씀 속에서 예레미야의 70년 예언을 깨우치고 난 뒤 민족을 위하여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그 결과로 다니엘은 가브리엘을 통하여 종말과 관련된 70이레의 비밀을 전달받았다(단 9:24). 스가랴의 첫 번째 환상에서 여호와의 천사는 70년 동안 폐허가 되었된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이 언제까지 방치되어야 하는지를 여호와께 묻고 있다(슥 1:12). 스가랴 역시 이사야처럼 70년 바벨론 포로생활을 노역의 기간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런 입장은 스가랴서의 나머지 예언들을 해석하고 이해하는데에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예레미야가 제시한 70년의 시간적 제한을 남북분단이라는 우리 민족의 비극에도 적용시킬 수 있을까? 2500여년전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와 관련된 예레미야의 70년을 오늘에 그대로 적용한다는 것은 해석상 무리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하며 소망해 본다. 아니 그렇게 되기를 우리 모두가 힘써 한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그것은 결코 엉뚱한 발상이 아니다. 엄연히 성경에 제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에게 적용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기준을 초과하는 무리는 아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의 70년이 적용될 우리 역사의 출발점은 어디일까? 민족적 비극인 남북분단의 기점은 두 가지로 설정할 수 있다. 하나는 해방을 맞이하였던 1945년이고, 다른 하나는 남북한이 단독으로 정부를 수립하였던 1948년이다. 그 중에서 1948년은 보다 더 타당성과 설득력을 지닌다. 그것은 1948년 남북한이 모두 군정이라는 과도기 과정을 거쳐 본격적으로 두 국가 체제를 정착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보 보면 예레미야의 70년 예언이 성취되는 시점이 앞으로 7년이 남은 2018년이다.

 

우리나라가 맞이할 2018년은 특별한 일이 벌어질 해이다. 그 해 2월 강원도 평창에서 제23회 동계올림픽이 개최되기 때문이다. 지난 2011년 7월 6일 남아공 더반에서 평창은 95명의 IOC 위원 가운데 65명의 지지를 얻은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확정되었다. 세 번째 도전 끝에 얻은 결과이어서 그 기쁨은 더욱 컸었고, 온 국민도 한마음으로 크게 축하하였다. 

 

평창은 앞 선 두 번의 유치경쟁에서 아쉬운 패배를 맛보았다. 그것은 1차 경선에서 두 번 모두 평창이 1위를 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반을 얻어야 한다는 올림픽위원회의 규정에 따라 2차 경선을 하였고, 그때마다 1차의 2위 도시에게 뒤져 패배의 쓴 잔을 마셨다. 이번에도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 모두가 내심으로 노심초사 하였던 것 같다. 그렇지만 평창은 예상을 깨고 1차 경선에서 2/3 이상의 득표를 얻어 당당하게 개최지로 선정되었다.

 

평창이 경험한 두 번의 실패는 나름대로 패인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하는 일이 같지만, 그 뒤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작용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역사를 바르게 보는 신앙적 관점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두 번씩이나 1차 경선에서 1위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실패를 경험케 하신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남북분단 70년이 되는 2018년에 동계올림픽이 한국에서 개최되도록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결과일 것이다. 더구나 평창이 위치하고 있는 강원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있는 도이기도 하다. 그곳은 금강산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길목이기도 하다. 분단의 경계선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세계인들이 함께 모여 겨울 스포츠 축제를 개최한다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닐 수 있다. 그것도 예레미야의 70년과 관련된 2018년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예레미야의 70년 예언과 평창의 2018년 동계올림픽을 연관시키는 것은 논리의 미약처럼 보일 수 있다. 신앙적 관점을 떠나면, 그 둘 사이에 어떤 공유점이나 상관성이 없기도 하다. 그러나 남북분단의 아픔을 70년으로 한정시킨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면, 평창의 동계올림픽 개최는 한반도의 평화 정착을 위한 거룩한 하나님 역사의 중요한 모멘텀이 될 수 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은 주변의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를 잠재우고 통일로 가는 길목을 새롭게 비추어주는 밝은 이정표가 되기를 소원해 본다. 

 

오늘의 주제는 학문적으로 심도 있게 다룰 신학적 주제는 아니다. 다만 개인적인 묵상을 통해 함께 나누고 싶은 기도제목을 제안한 것 뿐이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70년 예언이 우리 민족 역사에도 적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너무도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