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신앙과 행위 (야고보서2:14-26)

새벽지기1 2017. 10. 26. 06:49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

지난주일「신앙의 정로(正路)」라고 하는 문제로 우리가 신앙 생활을 바르게 하려면 신앙의 바른 노선을 찾아야 된다고 하는 점을 생각했습니다. 그 말이 다 사실이지마는 오늘 아침 계속해서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신앙의 노선을 찾는 것만은 부족합니다. 행함이 따르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기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또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우리에게 경고를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얼핏 들으면,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가르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것과 오직 믿음으로만 외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이신득의(以信得義)의 그 진리와 모순되는 듯 들리는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신학적 견지에서, 이 세상에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자기의 행위 곧 자기의 있는 의(義)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唯一)의 길은 오직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주로 믿고 십자가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의를 믿음으로 받아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진리를 확실히 가르친 것이며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인 것입니다.
야고보는 여기에 대해서 절대로 반대하는 말은 아닙니다. 이 진리가 꼭 사실입니다. 그런데 실제 견지에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믿음은 어떤 믿음이냐? 이 믿음은 참 믿음이어야 되겠고, 이 믿음은 산 믿음이어야 되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참 믿음은 무엇으로 알 수 있느냐? 반드시 행함이 따르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머리로써 믿을뿐더러 입으로써 믿는다고 말만 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실지로 행위에 나타날 수 있는 그런 믿음을 가져야 우리가 구원을 얻는다는 그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권면은 옛날도 필요해서 이와 같이 야고보 장로가 말씀하신 줄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권면은 언제나 필요하고 오늘날도 우리에게도 또한 필요한 줄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은 믿음과 행위, 이 문제를 가지고 성신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잠깐 생각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행위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진리는 뿌리요 행위는 열매입니다. 참 믿음은 반드시 행위로 나타납니다. 나무가 있으면 반드시 열매가 열립니다. 나무와 열매는 나누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정치 6대 원리(政治六大原理)가운데 진리와 행위에 대한 원리가 그 원리입니다. 나무와 열매는 나누일 수 없습니다. 진리와 행위는 나눌 수 없습니다. 세례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외치기를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요구했습니다. 참 믿음과 회개가 있습니까? 그러면 반드시 열매로 나타날 것입니다. 삭개오가 과연 예수를 믿고 회개하였습니까? 무엇을 보고 압니까? 열매로 나타났습니다. 토색(討索) 하였던 것을 네 배나 도로 갚아 주었습니다. 있는 것의 절반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게 되었습니다.
옛날 제가 신의주에 있을 때에, 어떤 청년이 예수를 믿고 회개한 후, 몇 해 전에 가져갔던 자기가 가져서는 안 될 재봉틀을 돌려보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 믿음이 있습니까? 반드시 열매도 따를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참 믿음으로 인정합니까? 어째서 인정합니까? 행위도 따랐습니다. 고향과 친척을 다 이별하고 알지 못하는, 하나님이 보이시는 나라로 가라고 할 때에, 순복해서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간 곳마다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심지어 모리야산에서 자기의 독생자까지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렸습니다. 마음으로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기생 나합이 과연 믿음을 가진 것으로 인정합니까? 왜 인정합니까?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정탐 군들을 잘 숨겨주고 피할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반드시 행위가 따를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내 주로 믿고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주로 믿을진대, 우리가 과연 살아 계신 하나님이 계신 것을 분명히 알진대, 이와 같은 믿음이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성품과 우리의 생활에 반드시 열매로 나타날 것입니다.
우선 온유와 겸손과 사랑의 생활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인격과 예수 님의 성품과 예수님의 생활의 특징이올시다. 그런데 그렇지 아니하고 그와 반대로 믿기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을수록 마음은 더 교만해지고, 욕심은 더 많아지고, 돈을 더 사랑만 하게 된다고 한다면, 아무래도 그 믿음이 우리 생활에 있어서 성결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니 우리도 거룩 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이와 같은 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마음이 불결하고 깨끗하지 아니한, 죄를 죄인 줄 알면서도 끊어버리지 아니하고 그냥 계속한다고 한다면, 그것이 참 믿음입니까? 믿음은 열매로 나타납니다.


예수는 진리이십니다. 예수에게 허위가 없습니다. 우리가 과연 이와 같은 주를 내 주로 섬기면 아무래도 우리 생활과 우리의 성격 가운데도 이 진실이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거짓 증거를 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성경이 그르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믿기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거짓말인 줄 뻔히 알면서, 그냥 거짓말을 반복하면서 허위를 선전하고 모략을 하고, 죄 없는 사람을 중상하면, 이것이 믿음입니까? 믿음은 반드시 행위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대체로 우리 그리스도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 생활에 있어서 양심적인 생활로 반드시 나타나야 될 것입니다. 사업을 할 때에든지, 금전거래를 할 때에든지, 사교적 생활을 할 때에든지 모든 방면에 다른 사람보다 양심적인 방면으로 반드시 우리의 생활이 나타나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믿기는 믿는다고 입으로 말하지만, 오래 믿었다고 하며 햇수도 길었다고 하면서, 비양심적인 태도와 비양심적인 생활을 그냥 계속해 한다고 한다면 그것이 참된 믿음입니까? 행위는 믿음의 필수적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분명히 마음 가운데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둘째로, 행위는 믿음의 시금석입니다. 그것은 첫 대지에 따르는 진리입니다. 행위가 믿음의 열매인 까닭으로 우리는 그 반대로 행위를 보아서 믿음을 판단할 수가 있습니다. 행위는 결국 믿음의 진가를 판단하는 표준이 됩니다. 참 믿음이냐? 거짓 믿음이냐? 바른 믿음이냐? 그릇된 믿음이냐? 결국은 무엇으로 판단하겠느냐? 예수 님의 말씀과 같이 나무는 열매를 보아서 알게 됩니다. 열매인 행위를 보아서 우리가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산상보훈을 여러분은 아십니다.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행위를 보고 열매를 보아서 판단하라고 몇 번이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경고를 했습니다. 나무는 종류를 따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그 열매가 사과면 그 나무는 사과나무요, 열매가 배면 그 나무는 배나무요, 은행이 열리면 그 나무는 은행나무입니다. 열매를 보아서 나무를 압니다. 마찬가지로 행위를 보아서 믿음을 판단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줄 생각합니다.
혹 어떤 이가 말하기를 아무개는 신앙은 정통인데 행위는 이단이더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전연 모순되는 말입니다. 신앙이 사실 정통이면, 참 신앙이면, 그 행위도 정통입니다. 사실 그 행위가, 이단적이요 비 기독교적이면, 신앙도 옳은 신앙은 못 될 것입니다. 그런 신앙은 입으로만 떠들고 사실은 믿지 아니하던가, 그릇 믿던가, 혹은 시험에 들어서 병든 믿음일 것입니다.


여러분, 야고보에 있는 말씀을 지금 다 들었습니다. 야고보 장로가 여기 분명히 그와 같은 열매 없는 믿음은, 말로만 하는 믿음은, 일용할 양식 없는 이에게 평안히 가서 잘 먹고 잘 있으라고 말하듯 말만 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송장과 같은 믿음이올시다. 썩어진 믿음이란 말입니다. 백합화가 매우 아름답습니다. 가러나 백합화가 썩어지면 냄새는 제일 고약하다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렇게 귀한 신앙이라고 죽게 되면 냄새가 날 것입니다.
야고보 장로는 그보다 더 격렬한 말씀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19절 읽는 것을 다 들으셨을 줄 압니다.『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 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말만하고 행위가 없는 믿음은 귀신의 마음이란 말입니다. 귀신이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똑바로 봅니다. 우리보다 더 잘 알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은 순종하지 않고 존경하지 않습니다. 영광을 돌리지 않고 예배하지 아니합니다. 말만하고 실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이 귀신이 가진, 마귀가 가진 믿음과 같다고 우리에게 경고해 준 두려운 말씀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바른 신앙의 노선을 찾아서 바르게 믿는다고 하지마는『서자서 아자아』(書自書 我自我)격으로 행함이 없으면 아무 쓸데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우리의 복음과 우리의 복음 적 믿음을 위해서는 어떠한 행위를 해도 관계하지 않다 든 가, 또는 우리가 어떤 진리를 위하여서는 어떠한 비 신앙적 행동을 감행하여도 관계하지 않다고 하는 사상처럼 비 성서적이요, 위험한 사상이 우리 신앙 생활에 없는 것입니다. 행위를 보아서 믿음을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열매 없는 신앙을 가진 이는 자연히 마지막에는 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히 위선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은 이런 이들로 말미암아 교회가 훼방을 받고 전도의 문이 막히고 믿음이 어린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 때문에 걸려서 넘어집니다. 행위는 믿음의 시금석(試金石)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분명히 깨닫고 내 행위로서 내 신앙을 스스로 반성해 보아야 될 것입니다.


셋째로, 행위는 최후 심판의 표준입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맙시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믿음으로 얻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무엇으로 나타나느냐? 결국은 행위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최후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다 행위로서 판단한다고 성경에 말하였습니다.
산상보훈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주께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오.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도 요한 이 요한1서 2장 17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행위가 심판의 표준이 됩니다.
여러분께서 유명한 예수 그리스도의 면양과 산양의 비유를 기억하십니다. 오른 편에 있는, 면양 편에 있는 의인을 향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너 영원 전부터 내 아버지께 축복을 받은 이들아, 너를 위하여 준비한 복을 나와서 받으라.』『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너희가 마실 것을 주었고 내가 헐벗었을 때에 너희가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너희가 찾아와 보았고 내가 병 가운데 있을 때에 너희가 와서 위문하였느니라.』고 하셨을 때 의인들이 하는 말이『주여 언제 주님께서 목말라서 우리가 마실 것을 드렸으며, 언제 주려서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언제 옷을 드렸으며, 언제 방문했으며, 언제 찾아가 보았나이까?』그 때에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우리 형제 중 지극히 적은 이에게 행한 것이 곧 주께 행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행위가 심판의 표준입니다.


예수께서 역시 유명한 달란트 비유 가운데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에게 다 칭찬과 상을 주신 후에, 마지막에 한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 두고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한 그 종보고 뭐라고 하셨습니까?『저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하셨습니다. 행하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아니했습니다. 행위가 심판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때에『이제 도끼를 나무 뿌리에 놓았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다 찍어 불에 던지리라.』고 경고하였습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다 찍어 불에 던지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실행하셔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했습니다. 말라 버렸습니다. 영원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말만하고 열매 없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던 바리새인들의 지도를 받고 따라가던 유대 민족은 그리스도를 참으로 따르지 아니하고 마침내 주후 70년에 송두리째 멸망을 당한 것을 우리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행위가 최후 심판의 표준이 됩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베드로는 소망을 강조해 가르쳤습니다. 사도 요한 은 사랑을 강조해 가르쳤습니다. 야고보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이것은 우리 믿는 사람의 세 가지 큰 덕으로, 이 세 지가 합해서 아름다운 행실로 나타나야 된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믿음도 선행으로 나타나야 됩니다. 소망도 선행으로 나타나야 됩니다. 사랑도 선행으로 나타나야 됩니다. 행함이 없으면 믿음이 죽은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산보훈을 말씀하시다가 우리의 의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오늘날 말대로 한다고 하면 오늘날 한국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불교도나 유교도보다도 그 행위가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다고 한 말씀과 꼭 같은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어느 사람이 예배당에 다니는 거나 안 다니는 거나 그것이 뭐 신앙의 표준이 됩니까 라고. 이런 말을 들을 때처럼 기막힌 때는 없습니다.
야고보의 말씀을 하나 더 인용하고 그만 두겠습니다. 야고보 1장 22절에 친히 말씀하시기를『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 듣기만 해서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말입니다. 듣기만 하면 저절로 구원 얻는 줄도 알지 말라는 것입니다.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고 도를 행하는 자가 되라는 뜻입니다. 바른 노선을 찾을뿐더러 산 신앙을 우리가 얻어서 우리의 행위로 나타나는 참된 신앙 생활을 하여야 되겠습니다.
(1959년 1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