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진리와 자유 (요한 복음8:31-44)

새벽지기1 2017. 10. 18. 06:53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요8:32)
『그런고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하게 하면 참으로 자유하리라.』(요8:36)

이 성경 구절을 보면 우리 인간이 사용하는 말 가운데 가장 위대한 말 중에 두 말이 적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자유라고 하는 말이고 또 하나는 진리라고 하는 말입니다. 인간은 진리를 탐구합니다. 인간은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마는 이 두 말처럼 남용(濫用)되고 오용(誤用)되고 그릇되게 사용된 말이 별로 없는 줄 생각합니다. 진리 아닌 진리의 미명(美名)아래서 무고한 사람을 전죄하고 핍박한 예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유 아닌 자유의 미명 아래에서 온갖 불의와 불법이 감행된 실례가 인간 역사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또한 그 반면에 인간의 가장 고귀한 노력과 희생이 이 두 말들 아래에서 바쳐진 것입니다. 진리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을 당한 영혼들이 많습니까? 고귀한 자유를 위해서, 자유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귀한 청년들이 피를 흘리며 이 땅에 쓰러졌습니까? 여기에 이 두 말, 자유와 진리, 이 두 가지 말이 같이 적히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닌 줄 생각합니다. 참된 진리는 참된 자유를 가져옵니다. 참된 자유는 오직 진리에서만 오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진리는 무엇입니까? 진리라고 하는 말을 흔히 쓰지마는 그것이 무엇이냐고 정의하려고 한다면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한문 글자로 말하면 참된 이치, 혹은 참된 원리라고 설명(說明)할 수 있습니다. 그 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헬라 말을 그대로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진리라고 번역하기보다는 알아듣기 쉽게「」이라고「참된 것」이라고 번역할 수가 있는 줄 생각합니다.
그럼「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우리가 대조해서 생각하면 뜻이 더 분명할 줄 압니다. 가령 참이라고 하는 것은 그림자와 대조할 수 있는 줄 압니다. 산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습니다. 그림자는 산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림자가 산은 아닙니다. 산은 실체(實體)요 그림자는 반영뿐입니다. 여기 사람이 있으면 사람과 비슷한 사진이 있습니다. 그 사진은 사람의 모습과 매우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 사진이 사람은 아닙니다. 사람이 실체인 참이요, 사진은 그 반영된 그림자뿐입니다. 참은 실체를 항상 의미합니다. 또한 그 다음에 참은 거짓과 정 반대되는 것을 표시하는 말입니다. 누렇다고 다 금이 아닙니다. 가금(假金)과 정금(正金)이 있습니다. 번들번들 한다고 다 비단이 아닙니다. 진견(眞絹)과 인조견(人造絹)이 있습니다. 참은 모든 허위, 가면, 가짜, 외식의 정 반대되는 진실을 의미합니다. 이리가 양의 가죽을 쓴다고 양이 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리는 이리요 양은 양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진리의 세계에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살펴보면, 세 가지가 섞이어 돌아갑니다. 여기 참이 있습니다. 그것과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과 정 반대나 참의 이름으로 나타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말이지마는 참 말이 있고, 비슷하나 참 말이 미처 아닌 외 곡된 말이 있고, 아주 참 말처럼 하지마는 거짓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분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종교계에도 참된 종교가 있습니다. 그림자와 같이 참된 종교와 비슷해서 일시적으로 있지마는 참 종교가 나타날 때에 없어질 것밖에 없는 그림자와 같은 종교가 있습니다. 아주 거짓된 허위의 종교 사상과 종교 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철학이나 예술이나 과학이나 사상이나 각 부면(部面)에서 이 세 가지 섞이어 돌아가는 것을 우리가 바로 분간해서 참 말을 믿고, 참 말을 의지하고, 참 말대로 행할 때에, 우리 인간에게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을 구성하는 무지, 온갖 미신, 오해, 기만, 허위, 이런 모든 것 가운데서 우리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각 방면의 진리밖에는 없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너희가 내 교훈에 항상 있을 것이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 하게 하리라.』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진리는 어떤 방면의 진리를 가르친 것이냐? 예수 님께서 말씀하신 이 진리는 인간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우주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진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존 칼빈(John Calvin, 1509-64, 제네바의 종교 개혁가)선생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기독교 강요」의 첫 페이지 첫 구절에 보면, 우리 인간이 마땅히 배워야 할, 알아야 할 지식이 허다하지마는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두 가지 밖에 없는데,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요, 또 하나는 사람에 대한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가 진리를 알고, 인간에 대하여 그 깊은 진리를 알진댄 그 밖에 모든 문제는 다 여기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대하여 꼭 우리가 알아야 할 진리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 동양사람들은 옛날도 그렇고, 지금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마는 하나님을 상제(上帝)라고 많이 생각해 왔습니다. 사실 아직도 적당한 말이 별로 없어서 여기 중국사람들의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을 상제라고 번역했습니다. 그 뜻은 위에 계신 임금이라는 것입니다. 그 위에 계신 임금이라 하는 말은 물론 하나님의 일면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전체를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한 그림자아 같은 하나님에 대한 사상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하나님은 이 우주의 이성(理性)이라 이런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거기도 일면이 있습니다. 어떤 철학자는 하나님은 이 우주 안에 있는 대양심(大良心)이라는 말을 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다 일면을 보여줍니다. 그림자와 같습니다. 온전히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에 대하여 여러 가지 말씀으로 가르쳤지마는 특별히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두 가지 말씀입니다. 첫째는『하나님은 영이시니 신령과 진리로 그를 예배할 것이라.』둘째는『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시라.』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아버지라고 하는 뜻은 인격적 신을 의미합니다. 우리 사람과 같이 생각을 하시고, 느낄 수 있고, 의지가 계시고, 무엇을 결정하시는 인격적 신을 가리킨 것입니다. 또 아버지라고 하는 말씀은 하나님은 곧 사랑이라고 하는 뜻을 가리킵니다. 이 인격적인 영적 존재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서 이 우주와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이시라고 예수 님께서 이와 같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는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많은 미신, 나무를 숭배하고, 돌을 숭배하고, 뱀을 숭배하고, 사람을 숭배하고, 온갖 우상을 숭배하는 미신의 구속에서 자유를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서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는 이 진리를 인간이 알 수 없는 우주에 나서 사는 동안에 항상 마음 가운데 있는 여러 가지 공포심, 두려운 마음, 이 공포 가운데서 인간을 자유롭게 하였습니다. 진리가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님께서 우리 사람에 대해서 분명한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 한국에도 인내천(人乃天)이라고 하는 사상이 있습니다. 그 뜻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하는 그런 뜻인 줄 생각합니다. 이것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서양이나 동양이나 다 있는 범신론적 사상입니다. 사람이 곧 신이라 혹 신의 일부분이라 신과 같다는 이 사상의 근본적 문제는 죄악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신이 아닌 것을 분명히 압니다. 일본 천황이 신이라 하는 이름을 가지고 오래 자기 국민을 속여왔지마는 맥아더에게 항복한 다음에는 자신은 신이 아니라고 그렇게 다시 조서를 내렸습니다. 그 말이 옳습니다. 사람은 신이 아닙니다.


반면에 사람들 가운데는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고 하니,『사람은 별 것이 아니고, 하는 모양을 보면 사람은 그저 짐승이라. 조금 진화된 원숭이야, 조금 진화된 동물이야, 사람과 다른 하등 동물과의 차이는 사람은 좀 더 복잡한 동물이오, 아메바 같은 것 단세포 동물이야.』라고 이렇게 사람을 한 짐승으로 보는 이런 사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우리 인간에 대하여 분명히 진리를 가르쳤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니라.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니라 라고 그 뜻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서 사람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 우주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을 떠난 탕자로 하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먼 죄악의 세상에서 살므로 그 행동이 짐승의 행동과 같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타락된 까닭입니다. 그 탕자라고 돌아만 오면 다시 하나님의 모습으로 회복될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일시적으로 있다가 짐승처럼 죽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는 불멸의 영혼이 있어서 영생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면 이 앞으로 무한히 향상될 가능성이 인간에게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님의 교훈이요 인간을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로 보고 비록 타락은 하였지마는 회복되면 무한히 발전하고 향상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는 이 사상은 결국 우리에게 자유를 가져왔습니다. 민주주의의 근본적인 사상을 가져옵니다. 따라서 정치적 자유가 결국은 그리스도의 인간에 대한 이 진리의 근본적인 기초를 주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진리를 가르쳐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는 그렇게 그 입술로써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뿐만 아니고「그리스도」가 곧 진리입니다. 요한 복음 14장 6절에 보면 예수님은 곧 진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뜻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는 이렇게 참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을 뿐더러 그리스도 자신이 이 우주에 근본 되시는 하나님이오 하나님의 말씀이오, 그 말씀이 육신을 입어서 진리가 곧 몸을 입어서 진리의 화신으로서 세상에 일하신 이가 곧 그리스도께서 진리로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진리의 화신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친히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얼굴을 통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활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참된 인간의 진리를 가르쳐 줄뿐더러 자기 자신이 참 하나님의 아들로서 참 하나님의 아들은 이렇다 하는 것을 진리로서 참으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참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얼굴을 통해서 참 사람의 얼굴을 볼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성품을 통해서 참으로 변화된 온전한 사람의 성품을 볼 수가 있어요. 주님의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인간의 생활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진리의 화신으로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목적이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이 진리로서 인간을 여러 가지 구속 가운데서 해방해서 자유를 주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었지마는 죄악에 침노되어서, 여러 가지에 얽매어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지적으로 미신과 무지와 죄악에 결박을 당했습니다. 결박당한 인간들을 풀어서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진리이신 예수 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자유는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자유는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고 많이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렇다고도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마음대로 거리에 나가 놉니다. 그것까지는 괜찮습니다. 그 결과는 한 두어 시간 후에 보면 집을 잃어버립니다. 학생들이 마음대로 거리에 나가 놀고 싸우고 뛰어 다닙니다. 그렇게 얼마 하다가는 깡패가 되고 맙니다. 청년들이 마음대로 거리에 나가 놉니다. 마음대로 먹고, 마음대로 마시고, 마음대로 허랑 방탕합니다. 자유 없었다고 하는 그 결과는 얼마 가지 못해서 불량자가 되고 맙니다.
물 속에 있는 물고기가,『이거 원, 나는 물 속에만 이렇게 있겠느뇨. 자유를 얻어야지.』하며 물 밖으로 뛰어 나왔습니다. 그 때는 괜찮습니다. 좀 있다가 말라죽었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가 자기는 왜 공중에서만 살까, 물고기처럼 물 속에서도 좀 살아봐야지, 하고 물 속으로 뛰어 들어 갔습니다. 그것까지는 괜찮습니다. 숨이 막혀 죽고 말았습니다. 기차가 자기는 왜 요렇게 꼭 궤도 위로만 다니게 될까, 마음대로 자동차처럼 나도 신작로로 다녀보겠다 하며 신작로로 뛰어 나왔습니다. 조금 가다가 전복되었습니다.
이것이 참 자유입니까? 단순히 마음대로만 하는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방종입니다. 어디에 참 자유가 있습니까? 어린아이들은 어머님의 품속에 있을 때만 참 자유가 있습니다. 학생들은 선생의 지도 아래에 있을 때만 참 자유가 있습니다. 청년들은 오직 국가의 법률과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양심의 도덕적 법칙 아래에서 살 때에만 참 자유가 있습니다. 새는 공기 가운데서만, 물고기는 물 속에서만, 기차는 궤도 위에서만 자유가 있습니다. 자유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서 하나님의 법칙대로 하나님의 뜻하신 바를 성취할 수 있는 최대의 기회를 가질 때에 그것을 자유라고 합니다. 우리 사람에게 있어서는 최선의 사람이 될 수 있고 최선의 일을 할 수 있는 최대의 이 기회를 가진 사람이 참 자유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이 기회가 크게 제한되었습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결박의 줄이 인간을 얽매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이것이 정치적인 결박입니다. 어떤 때는 이것이 경제적인 결박의 줄입니다. 어떤 때는 이것이 사회적인 결박입니다. 어떤 때는 이것이 종교적인 결박입니다. 어떤 때에는 이것이 지적(知的)인 결박입니다. 여러 가지 구속의 줄이 인간을 얽어매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최선의 사람이 되지 못하게 합니다.
이 모든 인간을 결박하는 줄이 많은데 그 가운데서도 제일 굵은 줄은 인간의 속에 있습니다. 이 줄을 죄의 줄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정욕의 종이 되었습니다. 음란과 방탕의 자리를 떠날래 야 떠날 수가 없습니다. 마치 소가 갈고리에 코가 꿰어서 원하지 않지만 도살장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처럼 자기가 원하지 않지마는 자기의 영혼과 자기의 육체가 멸망 받을 줄 알면서도 이 저녁거리 서울 구석구석에 어두운 곳을 찾아서, 코가 갈고리에 꿰어서, 정욕의 종이 되어서, 멸망할 곳으로 찾아 들어가는 청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종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탐심의 종이 되었습니다. 돈의 종이 되었습니다. 탐심의 갈고리에 코가 꿰었습니다. 그래서 돈은 위해서는 거짓말도 하고, 돈을 위해서는 배신도 하고, 돈을 위해서는 도적질도 하고, 돈을 위해서는 사람도 죽입니다. 탐심의 갈고리에 꿰어서 자기는 원하지 아니하지마는 종이 되어서 이런 짓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악한 죄의 습관에 종이 되었습니다. 술에 종이 되었습니다. 아편에 종이 되었습니다. 화투에 종이 되었습니다. 혹은 투전에 종이 되었습니다. 여러 가지 악한 죄악의 습관에 종이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갈고리에 코가 꿰어서 원하지 않지마는 그저 하자는 대로 습관대로 부득이 따라갑니다. 종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로 결박의 줄로 말미암아서 인간이 하나님이 본래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이 원하는 최선의 일을 하지 못하고, 멸망하고 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와 같은 죄악의 결박의 줄에 얽매인 사람들은 진리로서 풀어놓아 주어서, 하나님이 본래 뜻하신 사람이 되게 하고, 하나님이 본래 원하시는 일을 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 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 죄를 사해 주실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만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의 결박을 끓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만 죄악의 갈고리를 꺾을 수 있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만 다시 죄악의 갈고리에 꿰이지 않도록 보호할 능력이 있습니다. 진리만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진리임으로 우리들을 모든 속박에서 자유를 줍니다. 우리가 이 자유를 먼저 얻으면 그 밖에 정치적 자유, 지적 자유, 사회적 자유, 모든 자유는 다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 이 자유를 얻었습니까? 여러분, 사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는 여러분입니까? 내가 원하지마는 내 속의 죄악의 세력 때문에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고 원하지 않는 것을 지금도 합니까? 죄에서 자유를 얻었습니까? 진리는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나아와서 그리스도에게 여러분의 심령을 온전히 바치고,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맡기고, 그를 믿고, 그를 의지해서 주님의 능력이 여러분의 심중에 움직일 때, 여러분은 그 줄을 끊어 버릴 수 있습니다.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해방이 될 수 있습니다. 기쁨과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최선의 사람이 되고 최선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 자유입니다. (1959년 10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