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전역에 지점을 갖고 있는 일본 마쓰시타 그룹은
남미지역 총책임자를 뽑기 위해 가장 뛰어난 인재 두 명을 선발하였습니다.
엄격한 심사를 거쳐 최종 후보에 오른 사람은
미국 지사 고객 팀장인 데이비드와 말레이시아 상품 개발부 책임자인 아파딤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회장과의 최종면담을 위해 도쿄로 날아갔습니다.
숙소에는 회장의 메시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도쿄 임페리얼 호텔로 갈 것.”
그들은 한걸음에 임페리얼 호텔로 달려갔고, 환한 미소로 환대하는 지배인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배인으로부터 들은 말은 너무나 뜻밖이었습니다.
“회장님께서 두 분을 여기서 1주일간 청소원으로 일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업무는 화장실 청소입니다. 바로 시작하십시오.”
지배인은 어안이 벙벙한 두 사람에게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뭣들 하십니까? 시작하십시오. 변기를 새것처럼 반짝반짝 닦으십시오!”
연봉 100만 달러에 온갖 특권을 기대했던 두 사람은 기가 막혔습니다.
'해? 말아?'
당연히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청소도구를 들고 화장실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데이비드는
손걸레를 들고 변기를 닦으려다가 순간 치밀어 오르는 헛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걸레를 집어던진 데이비드는 화장실을 뛰쳐나가 지배인에게 갔습니다.
“전 도저히 못 하겠습니다.”
지배인은 미소를 띠며 대꾸했습니다.
“아파딤 씨는 어쩌고 있는지 한번 가보세요.”
아파딤 씨는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열심히 변기를 닦고 있었습니다.
데이비드의 머릿속은 복잡해졌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열심히 변기를 닦고 있는 아파딤의 모습이 감동스럽기까지 하였습니다.
데이비드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요?”
“사명감이지요. 무슨 일이든지 최선을 다해 완성하겠다는 생각 말입니다.
저는 남들이 보기에 웬만큼 성공한 축에 들지만 현재에 만족하기 싫습니다.
회장님이 우리를 화장실에 보낸 데는 타당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을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파딤의 말은 진지했고 데이비드는 감동했습니다.
데이비드도 돌아가 변기를 열심히 닦았습니다.
남미 총책임자 자리는 아파딤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아파딤으로부터 한 수 배운 데이비드도 뛰어난 리더가 되었고
두 사람은 평생 파트너로서 커다란 업적을 일구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왕진링과 한바이가 함께 쓴 '회사가 아끼는 사람'이라는 책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회사가 아끼는 사람은,
비전과 사명감으로 무장한 백조형 인간, 정보에 밝은 비둘기형 인간,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독수리형 인간, 빠른 결단과 실행력의 치타형 인간, 불굴의 도전과 용기의 호랑이형 인간,
참고 또 참는 코끼리형 인간 등등입니다.
모두 나름의 뛰어난 능력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우리들도 각자 자신의 특성을 잘 파악하여 가장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 가장 기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사 45:15)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창조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질투하시는 하나님, 치료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이레, 여호와 닛시 등등 다양한 하나님에
대해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좀 의아스럽기도 하고, 마땅치 않기도 합니다.
숨어 계시지 말고, 나타나셔서 우리의 곤경을 즉각 해결해 주시고, 여러 억측과 산적한
의문점들을 속시원히 해명해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절대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왜 숨어 계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에 대한 모든 명칭들은 각각 하나님의 의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언제나 우리들을 살리고 그 생명을 더욱 풍성케 하시려는 선한 것입니다.
또한 이 명칭들은 모두 하나님의 사람들의 신앙 경험들을 통해서 드러난 것들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신앙의 선배들은 각자의 삶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체험했고,
다양한 하나님 체험이 별볼일 없던 그들의 인생을 지고한 경지로 끌어 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숨어 계시는 이유도, 우리를 골탕 먹이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고 더욱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을 경험하셨습니까?
온몸으로 체험하는, 하나님 경험이 없는 종교생활은 시간과 생명의 낭비일 뿐입니다.
예컨데 '내가 오늘 예배를 드렸으니까, 내가 오늘 헌금을 했으니까 요번 주일은
안전할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당이 써 준 부적을 양복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니까
좋은 일만 생길 거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을 체험해야 하는 더 원초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가슴이 미어지는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꽃다운 청년들이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러 갔다가 누구도 아닌 동료들에게 총을 쏘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원인에 대해서 여러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몇 주 전에 설교로 말씀드린 ‘두려움과 공격성’ 때문입니다.
기수 열외 등의 극에 달한 두려움을 가장 격한 공격성으로 대처한 것입니다.
그 결과는 참담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 청년을 한번 생각해 봅니다.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겠습니까?
그 절체절명의 두려움과 외로움을 파괴력으로 종용하며,
배후에서 웃고 있는 사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해결 방안은 오직 하나, 예수님께서 행하신 길입니다.
그 길은 때로는 너무나 어렵고 힘들지만 그 외에는 없습니다.
생명의 원천이요, 죽음 너머의 세계를 관장하시는 하나님만을 붙잡고 두려움을 이깁니다.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공격성을 극복합니다.
그리할 때 그 상황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더욱 큰 그릇이 됩니다.
그런 내게
“그래 잘 했다. 그렇게 살아야 한단다.”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태중의 아기를 잃고 절망하는 아내에게 눈물을 흘리며 남편이 간청을 합니다.
“여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을 생각하며 제발 이겨내요.”
심방하며 들은 이 말이 오랫동안 귓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남편의 간청은 바로 하나님을 온몸으로 체험하라는 것이며,
아내는 남편의 간청대로 십자가의 예수님을 생각하며 절망을 이겨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현실이 된 것이고, 말씀이 육신을 입은 것입니다.
구본형 씨는, '낯선 곳에서의 아침'이라는 책에서,
‘자기 혁명을 위한 다섯 가지 방법’을 제시하였는데, 그 중 눈에 띄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변화를 필연으로 인식하라.” 변화하지 못하면 죽는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싸움에서 반드시 이겨라.”입니다.
이것을 신앙 버전으로 바꾸면.
“하나님 체험을 하지 못하면 죽는다고 생각하라.”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반드시 적용해서 그 가르침이 사실임을 경험하라.”가 됩니다.
변화의 첫 번째 싸움에서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그래야 승리의 DNA가 생깁니다.
그리하면 다음에는 보다 쉬워집니다.
반복하다 보면 변화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게 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에 적용해 봅니다.
처음에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점차 쉬워집니다.
나중에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게 됩니다.
처음 예수님의 말씀을 적용하고 그 말씀이 진리임을 깨닫게 될 때,
이때 비로소 진짜 신앙생활의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그전까지는 아무리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헌금을 내고 성경을 읽고 제자 훈련을 받아도,
정말 죄송하지만, 그저 종교생활을 한 것입니다.
말씀을 일상의 삶에 적용하여 하나님을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하나님 알아가기’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그 하나님과 더욱 깊은 관계를 맺습니다.
그 관계를 통하여 내가 성장합니다.
더욱 큰 그릇이 됩니다.
하나님의 복은 저절로 그 그릇에 담깁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사람들은 대부분 초보적인 하나님 이해에 멈춰 있습니다.
복을 주시는 하나님, 벌을 주시는 하나님과 같은 막연한 이해에 머물며 한평생을 보냅니다.
막연하니, 위기에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같은 문제의 반복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교인들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창 12:1)
그 말씀에 순종하여 아브라함은 떠납니다.
수많은 일들을 겪습니다.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점점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체험의 정점은, 모리아 산에서 백 세 때 얻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과정에서 얻은, 그 유명한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입니다.
이삭이 그 뒤를 잇습니다.
착한 이삭은 더 험한 일을 겪습니다.
생명과 같은 우물을 파는 족족 그 지방 사람들에게 빼앗깁니다.
마지막 우물이 빼앗긴 그날 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십니다.
브엘세바였습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요셉은 노예로 팔려간 이집트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모세는 호렙 산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들이 늘어갑니다.
그 장소들은 특별한 성지가 됩니다.
사람들은 그곳에만 하나님이 계신 줄 알고 그곳으로 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다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곳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를 메고 다녔습니다.
하나님께서 법궤에 거하시며 자신들과 함께 동행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궤만 앞세우면 백전백승하였습니다.
정말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 때였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졌습니다.
그래서 급히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 하나님의 법궤마저 빼앗겼습니다.
“이 어찌 된 일입니까? 그동안 우리들은 가짜 신을 믿은 것인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일대 혼란에 빠졌습니다.
당시 전쟁은 각자 믿는 신들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에서 지면 자신들이 섬기던 신상을 파괴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그랬어야 합니다.
그런데 파괴할 하나님의 신상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등졌지만
다윗과 같은 몇몇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회의를 이기고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패배의 참담함 속에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도 하나님께서 영으로 살아계심을 알았고,
패배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있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의 지평이 넓어졌고, 내 과오는 교정되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붙잡혀 있습니다. 그것도 70년 동안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은 자신들을 잊었거나, 여호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홀연히 이사야 선지자는 외칩니다.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사야서의 최고의 가치 중 하나는
우리가 알지 못하던 하나님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혔다는 것입니다.
'숨어 계시는 하나님'.
나아가서 '고난 받는 종으로 오신 하나님'입니다.
'고난을 받는 종으로 오신 하나님'에 이르러서는 전율을 느낍니다.
조금만 높아도 목에 힘을 주는 것이 사람들인데, 전지전능하시며 비길 데 없이 지고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고난받는 종으로 오시다니, 할 말을 잊습니다.
저절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내가 고통당할 때에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진정 존재하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하나님을 떠나지만, '숨어 계시는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들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며 응원하시는 하나님을 앙망하며 고난을 견디고 이깁니다.
형통을 감사하며 겸손해집니다.
더욱 열심히 맡겨주신 일을 행합니다.
“우상을 만드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며 욕을 받아 다 함께 수욕 중에 들어갈 것이로되”
(사45:16)
우상은 섬기는 신을 눈에 보이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상 섬기듯 섬깁니다.
아기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없는 줄 압니다.
언제까지 어린아이겠습니까?
우리 하나님도,
일마나 때마다 나타나, 자기 자녀 역정을 드는 치맛바람 엄마 같기를 원하십니까?
그저 눈에 보이는 복만 추구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성숙하며,
영안이 열려 숨어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파딤은
화장실 청소를 시키는 회장에게 어떤 의도가 있을 거라 생각하며 열심히 변기를 닦습니다.
부모님이 있으나 없으나, 선생님이 있으나 없으나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훌륭합니다.
사장이 있으나 없으나 열심히 맡은 일을 하는 직원이 훌륭합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나 안 보이나 하나님의 자녀로 성실히 살아가는 성도들이 훌륭합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
숨어 계시는 하나님을 체험하시기를,
성숙한 신앙인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시기를,
그래서 하나님의 큰 복을 누리고 베푸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구원을 입어 영원한 구원을 얻으리니
영세에 부끄러움을 당하거나 욕을 받지 아니하리로다.”(사 45:17)
'좋은 말씀 > 신우인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를 지으신 자는 내 남편 (이사야 54:1~8) (0) | 2017.09.19 |
---|---|
그가 채찍을 맞음으로 (이사야 53:1~7) (0) | 2017.09.14 |
처음 익은 열매를 바치는 날 (신명기 16:10-12 / 사도행전 2:1-4) (0) | 2017.09.07 |
너는 나의 증인 (이사야 43:10~13, 18~21) (0) | 2017.09.05 |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 (이사야 42:1~9) (0) | 2017.08.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