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너는 나의 증인 (이사야 43:10~13, 18~21)

새벽지기1 2017. 9. 5. 07:34


전도 봉사를 열심히 하면, 교회에 충성하면, 목사를 잘 섬기면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해서 복을 받았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일까요?
여전히 고생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진리가 진리 되기 위해서는, 100명이 그렇게 하면 100명 모두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합니다.
만약 몇 사람만이 복을 받았다면 그 말은 사실이나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진리가 아닌 것을 열심히 설파한다면 그것은 설교가 아니라 선동입니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전도에 대한 강박관념을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면 전도에 대한 강박관념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였다면 예수님의 말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대로 점점 더 영혼은 자유로워지며, 점점 더 감사와 평강과 겸손을 누려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 강박은 심해지고 짐은 무거워지며 지쳐갑니다.
처음부터 뭔가 잘못된 것이 분명합니다.

혹시 전도를 열심히 하면 복을 받고 게을리하면 벌을 받는다고 배웠기 때문이 아닐까요?
기도, 성수주일, 십일조, 봉사도 그런 마음으로 행한 것이 아닐까요?

모든 사람들을 네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본능과 욕심에 따라 움직이는 ‘본능의 사람’,
율법을 잘 지키면 복 받고, 어기면 저주를 받는다는 이분법에 따라 사는 ‘율법의 사람’
인간의 존엄성을 위하여 책임을 다하는 ‘자율의 사람’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자유와 은혜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 모두가 네 번째 ‘자유와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죽음조차도 그를 위협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처사로 겸손히 받아들이고 감사하며 맡은 일을 성실히 수행합니다.
날이 갈수록 예수님을 닮아 점점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한 마디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율법의 사람’들을 키우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결정적인 잘못입니다.
율법의 사람들은, 본능의 사람들로부터 경멸을, 자율의 사람들로부터 거부를, 자유와
은혜의 사람들로부터는 측은함을 당합니다.
그래서 율법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는 외면을, 스스로는 고립을 자초합니다.

교회의 명령을 잘 지키면 복을 받고 어기면 저주를 받는다는 그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열어놓으신 진리와 은혜와 자유와 생명의 길이 보입니다.

달라스 윌라드는 그의 책 ‘하나님의 모략’에서
성도들의 주요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 네 가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1. 특별한 체험 / 방언이나 입신 등, 황홀한 체험을 추구하는 것.
2. 특정 교리 / 하나님의 무한한 섭리와 신비를 특정 교리에 제한하고 강요하는 것.
3. 교회에 대한 충성 / 전도와 봉사와 같은 교회 활동이나 종교행위에 충성을 독려하는 것.
4.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외적인 동조 / 은혜 받은 사람이나 서원한 사람들을 일어서게 하는 것.

이런 것들은 분명 나름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신앙생활의 목표가 되면,
예를 들어 “올해는 모두가 방언을 받도록 합시다.”라며 독려한다면,
교인들로 하여금 영혼에 짐을 지우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일을 극도로 어렵게 만듭니다.

달라스 윌라드는,
그렇게 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을 수가 없소!”라고 거듭
큰 소리로 외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음에 새기십시오.
덜 중요한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될 때, 비본질이 본질로 추구될 때 영혼은 병들어갑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또한 영적리더로서 올바로 살기 위해서는 어떤 목표를
향해 나가야 할까요?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 모두 순교하고 사도 요한만이 구십여 세의 천수를 누렸습니다.
그가 죽음을 앞두고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저(예수님)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 1:5)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받은 제자로서 박해와 고초로 점철된 수십 년의 세월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내린 결론이 바로 '하나님은 빛, 어두움은 조금도 없으신 분'입니다.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입니까?

여러 가지 다양한 답이 나올 것입니다.
“글쎄 내게 예수님은 어떤 존재지?” 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고,
옆집 철수보다도 관심 없는 무의미한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요 빛이요 생명이십니다.”라고 대답하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에게 다시 묻습니다.
그 대답이 얼마나 진지한 것입니까?
요즈음 말로 얼마나 ‘레알’한 것입니까?

사도 요한도 ‘하나님은 어두움 한 점 없는 빛’이라고, 나도 ‘예수님은 빛’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그 대답의 강도强度는 다릅니다.

사도 요한은 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죽음의 위협을 당하고 피신하고 굶기를 밥 먹듯이 했습니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이제는 끝이구나.”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빛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렇게 사는 동안, 시마다 때마다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그때마다 마음과 영혼이 밝아졌습니다.
그 어떤 어두움도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내린 결론, '하나님은 어두움 한 점 없는 빛'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증언이며,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가장 믿을만한 증인입니다.

나에게 예수님은 얼마나 밝은 빛입니까?
낙심이 되고 마음이 어둡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면 근심이 사라지고 마음이 밝아집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은 나의 빛’이란 말은 공허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사 43:10)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부르신 이유, 무병장수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증인과 종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를 하나님의 증인으로 삼으려 하시는가?

먼저 하나님을 ‘알고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 홈피에 올라온 신정애 씨의 이야기입니다.

신정애 씨는 올해 쉰 살로 기계설계 일을 하는 분입니다.
정밀 기계를 설계하는 일이므로 조금의 오차도 허용이 안 됩니다.
그랬다가는 회사에 큰 누를 끼치고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엄청난 긴장과 스트레스를 요구하는 일입니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 못 하는 사장님은 성격이 예민한 신정애 씨에게 가장 무서운 황소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에도 실수가 발생했고, 거래처에서는 난리가 났고 사장님의 질타는 폭발하였습니다.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그때 지난주 설교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주님은 모든 문제의 해답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며,
그분은 나와 똑같은 육신을 입으셨지만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해결 받지 못한 이유가 주님의 생각과 행동을 그대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곧바로 기도했습니다.
“주님이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하셨을까?”
기도를 마친 후의 결론은, 솔직히 자신의 연약함과 실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변명을 다 내려놓기로 하였습니다.
그러자 심장을 파고들었던 상처들이 눈 녹듯이 사라져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본 것이 있습니다.
신정애 씨 자신이었습니다.
자격도 없는데, 쉰 살의 여자로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았고
감사의 눈물이 절로 흘렀습니다.

신정애 씨는,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다 보면 언젠가는 염려와 두려움의 황소들도 모두
물러날 것을 믿는다며 이렇게 말을 맺고 있습니다.
“말씀의 힘이 이렇게 강력한 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신정애 씨의 체험은 신앙 생활의 중요한 핵심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어떤 고난도 시험도 이기셨습니다.
그 힘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에서 나왔습니다.
고난과 시험에 지는 것은 죄입니다.
여기까지는 머리에 머무는 예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런데 고난이 닥쳤습니다.
우려하던 일이 또 터진 것입니다.
이 일을 어쩌나?
그 전에는 변명하고 억울해 하였고, 마음은 더욱 위축되었고, 상처는 깊어졌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에 대하여 ‘듣고 아는 대로’ 해보았습니다.
그러자 정말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나를 알고 믿고, 내가 그인 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이 신정애 씨 안에서 실제로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신정애 씨는 아주 작은 진리에 대한 확실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 일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너무나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감사와 겸손, 그와 함께 얻은 것이 더 있습니다.
자신감과 대처능력과 평강입니다.
그런 변화된 태도가 상대방에게 신뢰감을 줄 것입니다.
나아가서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영감과 능력으로 일의 성과도 분명 클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더 큰 고난과 시험이 와도 잘 대처할 것이고, 그런 일들을 자주 경험하게 되면
정말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구원자가 없음'을 알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지혜로 다른 사람들을 잘 돕는 ‘하나님의 종’이 될 것입니다.

한번 비교해 봅시다.
전도를 열심히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복을 받았다는 사람의 간증을 듣고, 신정애 씨도
그렇게 해보기로 했다고 합시다.
바쁜 와중에 전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더욱 열심을 냅니다.
주업무가 소홀해지고 여기저기 펑크가 납니다.
그래도 복이 오질 않고 문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열심히 전도하여 사람들을 교회에 앉혀 놓았는데 양육과 관리가 잘 되질 않습니다.
목회자들을 원망하게 되고, 하나님에 대한 의심은 늘어나고, 비례하여 자괴감과 회의감도
깊어집니다.
가뜩이나 피곤한 심신은 더욱 지쳐갑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너무나 자명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성령의 열매”
(갈 5:22-23)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열매란 다른 말로 거룩한 성숙입니다.
종교생활을 열심히 해서 복을 받겠다는 생각으로는,
담임목사의 칭찬은 몰라도, 성령의 열매는 얻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고향을 떠나 이방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한 성숙’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왜요?
그래야 제대로 살 수 있으니까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사 43:18-19)

기억하지 말고 완전히 잊어버리라는 ‘옛적 일’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징계를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망각한 채 여전히 불의를 행하면서도, 제사와 율법 준수를 통해
하나님의 복 받아 잘 먹고 잘 살겠다는 기복신앙을 잊으라는 것입니다.
자신과 나라를 망친 기복신앙의 행태를 잊고 버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겠다는 ‘새 일’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회복이며, 제대로 된 하나님 나라 건설입니다.
당연히 옛 습성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새 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새 사람으로 어떻게 거듭날 수 있을까요?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내가 고하였으며 구원하였으며 보였고”
(사43:11-12)

이미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고하셨습니다.’
우리 자신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시시하고 하찮고 이기적인 존재들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거나 남을 불쌍히 여겨 본 적도,
그 수많은 시간 동안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여기에 앉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은혜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렇게 날마다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제 그 하나님의 구원을 볼 때가 되었습니다.
뭐든지 시련과 아픔과 고난과 역경, 기쁨과 형통, 무기력조차도 하나님의 사랑이며
구원의 역사임을 깨달을 때 감사하게 되고 겸손하게 되고 나는 거듭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사 43:18-19)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십니다.
말씀을 통하여 그 생명을 모든 인간과 온 우주만물에 흘려보내십니다.
이 생명의 강은 이미 모든 생명과 생명에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강은 전도, 봉사, 헌금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보상을 바라며 이제나저제나 하나님의 복이 임할까 기다리는 내가 그 강줄기를 틀어막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생명수입니다.
내가 그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알고 믿고 행합니다.
그 순간 메마른 사막과 같던 내 중심에 생명의 강이 흐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생명의 강물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흐르게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증인들입니다.

“생명의 강물을 나를 통하여 흐르게 하리라.”는 마음으로 공부를 하고 직업을 찾고
회사에 다니고 사업을 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돕고 빈민국 아기들을 위해
뜨개질을 해보십시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하나님의 ‘새 일’에 참여하게 됩니다.
어찌 그런 행하는 내 일이 형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누구시길래 이렇게
내 마음 깊은 곳에 찾아와
시냇물 하나 이렇게
흘려 놓으셨나요?

어느 빛, 어느 바람이 이렇게
당신이 흘려 놓으신 물처럼
조용히 속삭이듯 이렇게
영원할 수 있나요?

생명의 강을,
나도 모르게 사막과 같은 내 마음에 흐르게 하신 예수님을 영원히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