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 커다란 황소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얼마나 무섭고 성가시고 귀찮겠습니까?
그런데 엄마는 설거지를 하다가 황소가 다가오면 슬쩍 피했다가 다시 설거지를 합니다.
그 집에 사는 식구들은 마치 그 황소가 없다는 듯이 살아갑니다.
그 황소를 내쫓으려고 한 적도 여러 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소동이 났고 일만 커졌습니다.
그래서 황소가 마치 없는 듯 무시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황소는 엄연히 존재하며 온 집안의 분위기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누구나 겉으로는 괜찮은 것 같은데, 집안에 그런 황소 한 마리쯤은 있습니다.
열심히 종교생활을 하면 황소가 제 발로 나간다고 하지만 정말 황소가 제 발로 나갔다는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나갔나 싶으면 어느새 다른 황소가 들어와서 집안을 배회하고 있습니다.
이 황소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당시 이스라엘은 망해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집안에 황소가 들어온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 집을 황소가 차지하고 식구들은
쫓겨나서 냄새나는 소 외양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격입니다.
얼마나 오래 되었을까요?
수십 년은 족히 흘렀습니다.
그런데 암담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귀가 번쩍 뜨이는 말씀이 들려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보라 네게 노하던 자들이 수치와 욕을 당할 것이요 너와 다투던 자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같이 될 것이며 멸망할 것이라.”(사 41:10-11)
꿈같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황소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며 끝내는 아예 없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과연 어떻게 하실까요?
자못 궁금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그 해결책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사 42:1)
하나님께서는 거두절미하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붙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종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분은 누구일까요?
우리 모두 다 알고 있듯이 장차 오실 예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도 알고 있어요.” 하실 것입니다.
무슨 뾰족한 수라도 기대하신 분들은 실망하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정말 예수님 외에는 해결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해결 방법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은 나름대로 열심히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잘 해보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예수님께서 내 문제의 해답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왜 2,000년 전 그때 오셨을까요?
당시는 여러 방면에서 문제들이 가장 심각한 때였기 때문입니다.
나라건 개인이건 간에 가장 극심한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처해있었던 시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갖고 계십니다.
기독교는 바로 그 해답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어 문제들을 해결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서 제대로 행복하게, 의미 있게 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복잡하게 만들고는 그것을 열심히 지키면 황소가 나간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삶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율법은 종교의 멍에가 되었고, 삶의 짐은 더욱
무거워졌습니다.
역사상 그때보다 종교의 멍에가 무거웠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문제의 원인과 그 해결책이 무엇인지 당연히 알고 계십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우리들과 같은 인간이십니다.
이 사실은 아주 중요한데 우리가 늘 간과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에게만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잘 되지 않았고 실망하여 예수님을 버리고 교회를 떠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유일한 해답이신 그분을 떠나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동안 해보지 못한 것,
사람으로서의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또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1885년 1월 7일
영국 싸우스워크에 있는 한 교회 목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 설교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연구해야 할 합당한 주제는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하나님을 묵상하는 일에는 우리의 지성을 엄청나게 향상 시켜주는 무엇이 있습니다.
그 주제는 너무나 광대하여 우리의 모든 사고는 그 광대함 속에서 길을 잃고 맙니다.
그 주제는 너무나 심오하여, 우리의 교만은 그 무한함 속에 잠겨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보다 우리 마음을 더 겸손하게 해 주는 묵상 주제는 없습니다.
그 주제는 마음을 겸손하게 해 주는 한편 마음을 넓혀줍니다.
또한 이 땅에서는 구할 수 없는 크나큰 위안을 줍니다.”
이 설교를 한 사람은 스펄전 목사입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스무 살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말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스펄전 목사는 약관의 나이에 깊은 시름에 빠진 영국 교회를 깨웠습니다.
그 힘은 하나님에 대한 묵상과 예수님을 아는 지식에서 나왔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귀담아 들을 말을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체휼하다’는 ‘함께 수난을 당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고난을 당하십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에 언제나 함께 계십니다.
또한 우리들의 고난보다도 더 큰 고난과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고난과 시험에도 지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이기셨습니다. 그래서 죄가 없으십니다.
“그거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그렇지.”라고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없애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고난과 시험도 능히 이기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또한 명심해야 할 것은 고난과 시험에 지는 것이 곧 죄입니다.
사회적 지위나 교육 정도 등 여러 조건에서 우리 중 그 누구도 예수님보다 못 한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차이가 딱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고난과 시험을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으로 이기셨고, 우리들은 번번이
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샬롬을 누리셨고,
우리들은 폭풍 속의 조각배처럼 사정없이 흔들립니다.
예수님처럼 하면 황소가 떼로 몰려와도 하나님의 샬롬을 누립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내가 하나님의 종, 하나님께서 기뻐 택하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야 하는데
성령처럼 받기 쉬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이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어서 들어오세요.”하고 마음의 문만 열면 예수님은 너무나 기뻐하시며 내 안에
들어오시고 나와 함께 사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성령을 주신 이유가 “이방에게 공의를 베풀기 위해서”입니다.
능력을 발휘하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가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베풀기 위해서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분과 함께 생활하는데 어찌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고 하겠습니까?
여기서 성령을 받은 증거가 무엇인지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뜨거운 체험이나 방언, 능력이 성령을 받은 절대적인 증거가 아닙니다.
자신을 한번 들여다보십시오.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싶고, 단순한 내 만족이나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부탁이므로 선한 일을 하려고 애쓰며 살고, 예수님 때문에 억울한 일을
참고 불의를 거절한다면 이미 성령을 받은 둘도 없는 증거입니다.
이미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부터 필요한 것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훈련입니다.
모든 회의와 갈등, 근심 걱정을 하나님께 맡기고 예수님과 함께 한 걸음 더 나가는 것입니다.
좀 더 참고, 좀 더 선한 일에 열중하고, 좀 더 열심히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갖추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을 ‘하나님 임재 연습’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임재 연습을 많이 하면 할수록
황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며 마침내 물러갑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어떻게 베풀까, 다음 구절에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사 42:2-3)
요즈음 교회에서 권장하는 그리스도인과는 거리가 멉니다.
개그맨들이 희화화할 정도로 요란하고 비장하고 괴상하기까지 합니다.
아는 것이 많고 따뜻한 마음과 실천력을 갖춘 사람을 진정한 인격자라고 합니다.
누구나 그 사람을 좋아합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절대로 비장하거나 요란하거나 괴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 안에서 내 마음과 생각을 지켜 사랑할만한 깊은 매력과 칭찬할만한
인격을 갖추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그(하나님의 택하신 사람)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열과 성을 다합니다.
열네 살 소년 리차드 부스에게 헌책방 주인 피너런이 말했습니다.
“얘야, 넌 커서 헌책방 주인이 될 거야.”
책 읽기를 좋아하는 리차드에게 건넨 이 말이 진짜 꿈을 심어 주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리차드는 고향 헤이온와이로 내려와 헌책방을 열었습니다.
주민이 1,500명에 불과한 시골 마을의 헌책방에 장사가 될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리차드 부스는 조급해 하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전 세계 사람들을 손님으로 생각했기에 좋은 책이 있으면 언젠가는 찾아오리라
믿으며, 그저 좋은 책을 구하는 일에 열중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그에게 핀잔을 주었습니다.
“책은 팔지 않고 쌓아두기만 할 건가?”
그러나 리차드는 아랑곳 하지 않고, “바보만이 서두르는 법이에요.”라고 말하며
제 할 일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애서가들의 입에 리차드 부스의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헤이온와이는 40여 개의 헌책방이 들어선 유명한 책마을이 되었습니다.
리차드 부스로 인해 마을 사람들도 윤택한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바보만이 서두르는 법이에요.”
돈 벌 욕심,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려는 욕심을 버리지 못함으로 ‘초조한 바보’가 되어 버립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무슨 일을 하든지,
사업을 하든 회사원이든 공무원이든 선생이든 가정주부이든,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고 낙담하지 아니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쓰십니다.
이것이 진짜 하나님의 복을 받는 비결 중 비결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사 42:6)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일에 집중할 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황소들은
조용히 꼬리를 내리고 물러납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한줄기 영롱한 빛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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