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내과 의사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그 누구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하였습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일입니다.
그 사람들은 예상과는 달리 죽음을 앞둔 자신의 두렵고 복잡한 심정을 솔직히 토로하였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죽음학’입니다.
그녀는 죽음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1) 否認 : 첫 번째 단계에서 자신이 죽게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럴 리가 없어. 의사가 잘못 진단한 것이 틀림없어. ”다른 병원에서 확인해 봅니다.
2) 분노 : 확정 판결을 받으면 분노로 바뀝니다. “왜 하필 나야?”
3) 거래 : 죽음을 지연시키는 방법을 찾으려고 온갖 궁리를 합니다.
“하나님 살려만 주시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여생을 바치겠습니다.”
4) 우울 : 병세가 악화되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깊은 우울 상태에 빠집니다.
5) 수용 : 마침내 죽음이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개인 차가 많습니다.
부인하거나 분노하다가 또는 우울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 다섯 단계는 비단 죽음에서만 거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사업이 갑자기 어려워졌습니다.
“일시적인 현상일 거야.”라고 부인합니다.
그러나 점점 더 어려워집니다.
“불법을 저지르는 저놈은 잘 되는데, 왜 나만 이래.”라고 분노합니다.
이어서 거래합니다.
“하나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착한 일 많이 하겠습니다.”
그래도 나아지지 않습니다.
자포자기한 마음의 우울 상태에 들어갑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처사로 겸허히 받아들이고 새 길을 모색합니다.
수용의 단계입니다.
여러 달 동안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공부하고 다시 이사야서로 돌아왔습니다.
다 잊었겠지만 먼저 이사야 선지자 당시의 이스라엘 상황을 개관합니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멀리 떨어져 계시는 타자가 아니라,
역사와 개인의 삶 중심에서 역사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바알 신을 섬기듯 하였습니다.
불의를 밥 먹듯이 행하면서도 넘치는 제물로 그저 하나님의 복만을 구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 이 모든 것이 '내 앞에 보이러 오는 것'(1:12),
'마당만 밟는 것'(1:12), '헛된 제물'(1:13), '가증히 여기는 것'(1:13)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왕 이하 온 백성들은 이사야 선지자가 전한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의 말씀을 거절하고
자신들의 길을 갔습니다.
이것이 39장까지의 이야기입니다.
39장까지는 하나님의 무서운 경고와 심판의 말씀들이 곳곳에서 터져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너무나 참담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잔인한 앗수르에 의해 초토화되고 맙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40장에서는 하나님의 어조가 완전히 바뀝니다.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찌니라.”(사 40:1-2)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너무나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장자(長子), 맏아들들입니다.
장자에게는 두 배의 복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아니하면 두 배의 벌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을 모르며 불법을 저지르는 저들은 번영을 누리는데 우리들은 작은 잘못에도 불구하고
어려워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깨닫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라는 40장 이하의 말씀의 역사적 배경을 또한 잘 알아야 합니다.
39장과 40장 사이에는 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망하고 남왕국 유다와 앗수르는 다시 바벨론에게 망했습니다.
바벨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데려갔고, 더욱 강성해져 온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 암담한 시절에 하나님께서 내 백성들을 위로하라고 하셨습니다.
포로로 타국에서 고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음의 다섯 단계 중 ‘우울의 단계’에 깊게
빠져 있는 중입니다.
우울의 단계에서 가장 많이 떠오르는 단어는 ‘버림받음’, ‘자포자기’, ‘절망’, ‘암담’,
‘무기력’, ‘무표정’ 등입니다.
한편 가장 거리가 먼 단어는 ‘희망’, ‘기쁨’, ‘사랑’ 등입니다.
각자 현재의 삶을 점검해 보십시오.
나는 현재 어떤 단계의 삶을 살고 있는가?
‘부인과 분노의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나님이 있다면 왜 이런 일들이 생기는 거야.”라며 살아갑니다.
‘거래의 단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행여 망할까 전전긍긍하며 하는 신앙생활도 하나님과 거래의 일환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한다는 교인들 중에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합니다.
요즈음에는 ‘우울의 단계’에 빠진 사람들이 점점 많아집니다.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해봤으나 별재미를 보지 못하고, 이제나저제나 올까 기다렸던
하나님의 복은 오질 않았습니다.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이런저런 처방을 받고 ‘혹시나’하며 해봤지만 ‘역시나’였습니다.
그래서 포기해 버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모두 다 ‘수용의 단계’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징계하시고 망하게도 하시고 포로로 고생하게 하시고
벼랑 끝으로 밀어내시는 이유, 원하는 소원들을 다 이뤄주시기 않는 이유도 우리 모두 다
‘수용의 단계’에 이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수용의 단계에는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질문하십니다.
“누가 손바닥으로 바다 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 보았으랴?”(사40:12)
이에 대한 답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이어서 질문하십니다.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사40:13)
계속해서 이어지는 질문에 대한 답은 ‘아무도 없다.’입니다.
왜 이런 질문을 하시는 것일까요?
여호와 하나님만이 자존자이시며 모든 것의 창조자이시며 중심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도 알아요. 여호와 하나님이 자존자이시며 창조자이시며 전지전능하시다는 것을.
그런데 왜 나를 이 모양으로 만드시고, 왜 내 사업을 어렵게 만드셔요. 그래서 하나님께
항의하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내가 부인을 하든, 분노를 하든, 흥정을 하든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바알 신처럼 섬기기는 하였어도, 모두 다 여호와 하나님께 반응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징계를 받았고, 나라까지 멸망하고 포로 생활까지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초대 강대국 바벨론 포로인 이스라엘, 해방 가능성 제로인 이스라엘을 향해
기뻐하라고 말씀하신 단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장 기본적인 계획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와 안식’입니다.
그래서 온 우주만물과 에덴동산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이브를 그 가운데 두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거부하고 사탄을 따랐습니다.
그 결과 사탄의 하수로 전락하여 죽음과 불안, 돈과 명예와 쾌락의 노예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두 번째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두 번째 계획은 ‘구원’입니다.
아브라함을 불러 하나님과 교제의 통로 ‘믿음’을 가르치셨고, 믿음의 공동체 이스라엘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시내산으로 인도하시고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 19:5-6)
노예를 제사장으로 세우는 것이 두 번째 목표입니다.
제사장이란 하나님 대신 피조물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돌본다는 히브리어 ‘라다’는 ‘살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과 교제하며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하는 것이 제사장의 사명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달리 표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와 안식’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곧 올바른 ‘제사장 노릇’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목적입니다.
명심에 명심을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 최종 목표가 아닙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신 목적은,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와 안식’을 누리며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망각하면 왜곡된 선민의식으로 실패한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게 됩니다.
그래서 무병장수 만사형통을 구하는 기복신앙을 예수님께서 질타하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모른 채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나라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초토화되고 바벨론에 포로가 된 이유입니다.
그렇게 무려 2,134개의 율법을 지키며 열심히 종교생활을 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상상을 초월한 질타를 당한 이유입니다.
성수주일, 전도, 봉사, 헌금, 일천 번제에, 목사님 섬기기까지 그렇게 열심히 하고도 삶의 짐이
점점 더 무거워지는 이유입니다.
죄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챠타’나 헬라어 ‘하마르티아’의 뜻은 ‘과녁에서 빗나가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화살을 멀리 날려도 과녁에 빗나가면 힘만 들 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과녁 대신 번영의 과녁을 향해 날아간 이스라엘은 그들의 죄로 인하여 포로생활을
할 것이라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임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을 외면하거나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구원하십니다.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세우시겠다는 하나님의 불변의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아무리 저항하고 상황이 나빠도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소망 제로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소망의 근거는 내 능력과 내 계획과 내 노력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계획을 알아야 하고 그 계획에 나를 동참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수용의 단계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너무나 자명해집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는 것이고, 징계를 감내하는 것이고, 자신의 실수와 잘못에서
돌아서는 것이고, 하나님의 구원의 때를 조용히 기다리며 열심히 성실히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용의 단계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총명한 그는 동료들과 함께 바벨론 왕에게 발탁되어 엘리트 교육을 받게 됩니다.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호의호식하며 출세할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이방 나라 바벨론에서도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며 경건한 생활을 견지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경배 금지령과 함께 위반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포고령이 내려집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결과에 상관없이 기쁘게 그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습니다.
다니엘은 체포되어 바벨론 왕 앞에 섰습니다.
다니엘을 아끼는 왕은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볼 것을 요청합니다.
그때 다니엘은 그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단 3:17-18)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하나님의 그 어떤 처사도 기쁘게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용의 단계’에 이른 사람들의 마음가짐입니다.
그런데 수용의 단계가 목표가 아닙니다. 시작입니다.
부정하고 분노하고 흥정하고 의기소침해 하는 前 단계들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지지고 볶고 울고 웃다가 끝납니다.
높은들 낮은들, 날든 기든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교차하는 ‘실존적 공허’일 뿐입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뚫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빛이 있으라."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고개를 들어 그 빛을 본 사람들은 수용의 단계에 들어섭니다.
그리고 진짜 인생이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기로 결단하고 그의 진짜 인생이 시작되었듯이.
때로는 땅속으로 꺼져가듯 깊은 우울 속으로 가라앉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사 40:26)는 말씀에
새로운 비전과 사명을 봅니다.
때로는 지쳐 쓰러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사 40:28-29)라는 말씀을 듣고 새 힘을 얻습니다.
모든 일들, 고난과 역경과 실패조차도 하나님의 처사로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어제 일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오늘 일에 집착하지 않고 신나게 살아갑니다.
내일 일에 근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감으로 준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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