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장로는,
상가 2층에 위치한 법당 철문 앞에서 긴장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크게 숨을 들이마셨습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매캐한 향냄새가 눈과 코를 먼저 자극하였습니다.
익숙지 못한 향냄새가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고, ‘쾅’하고 닫히는 철문소리는 무거운 마음을
움찔하게 만들었습니다.
얼른 놀란 표정을 감추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상대방에게 허점을 보여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문 닫히는 소리에 부처상 앞에 앉아 있던 스님이 고개를 돌려 김 장로를 바라보았습니다.
바라본다는 것보다 째려본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상황입니다.
눈길이 서로 마주치는 순간 김 장로는 과연 어려운 상대라는 것을 직감하였습니다.
전직 형사 출신으로, 뒤늦게 출가한 스님이 되어 이곳에 법당을 차렸다는 것과 현직에 있을 때
악명이 높았다는 그럴듯한 이야기도 여러 정보들과 함께 이미 들어 놓은 상태입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니까요.
김 장로가 이 스님을 만나 담판을 지어야 하는 이유는 형의 사업 때문입니다.
공장으로 사용할 5층짜리 건물을 매입했는데, 아직 계약 기간이 남아 있는 법당이 2층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법적으로도 이쪽에서는 할 말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설득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터라, 차분한
김 장로가 형 대신 나서게 된 것입니다.
팽팽한 신경전이 길고 지루하게 이어졌습니다.
상대는 역시 만만한 구석이 전혀 없었습니다.
삐끗 말 한 마디에 만사가 낭패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몇 시간째인가, 힐끗 본 벽시계는 벌써 여섯 시간은 족히 흘렀음을 알렸습니다.
커피를 일곱 잔이나 마셔 속은 얼얼해졌고,
정신은 점점 혼미해져 갔고, 승산은 점점 멀어져갔습니다.
그런데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할 그때,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스님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독백처럼 흘러나온 말은,
“부처님을 제대로 모시지 못해 이런 일까지 생기는구먼요.”였습니다.
김 장로는 몽둥이로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것 같았습니다.
정신을 가다듬자 떠오른 한 가지 생각.
그것은 '나는 과연 예수님을 잘 모시고 있는 것일까?'였습니다.
지난번 소록도에 갔다가 여수에 들려 김복남 집사님 회사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기독교 장로가 불교 스님을 설득한,
무용담처럼 들을 수도 있는 이야기이지만 저는 자꾸 다른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곱 시간 동안 차분히 설득해 나간 김 장로님도 훌륭하지만, 그 스님도 훌륭한 분입니다.
이런 협상에서 통하는 것은 오직 ‘진실’입니다.
누가 누구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엄연히 계약기간이 남아 있기에 “싫소!” 한 마디면 모든 것이 어그러질 수밖에 상황에서,
김 장로님은 진실로 임했고, 전직 형사 출신 스님은 그 진실을 읽어냈던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불교도인보다 존경스러워야 하고 목사는 장로보다 깊고 넓어야 할진대,
저 먼 남녘에서 “완전 선수(選手) 기죽이는 일”을 두 고수(高手)께서 조용히 행하셨고,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얼마나 주님께 진실했는가 되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 일 년 전쯤 새로운 의사가 동네 작은 병원을 인수하였습니다.
서울대를 나온 50대 초반의 그 의사 선생님은 참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환자들을 자상하고 겸손하게 대했습니다.
책상 위에는 늘 성경책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쓴 책을 선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그 병원에 셔터가 내려져 있었습니다.
여름휴가를 갔나 했는데 그 기간이 너무 길었습니다.
그 병원 옆 약국에 들렀다가 물어보았습니다.
“병원이 문을 닫았네요. 환자가 없어서인가요?”
“선교하러 떠나셨어요.”
약사의 대답에 갑자기 멍해졌습니다.
그분의 표정과 태도가, 의례적인 것이 아닌 ‘진짜’였다 것에 대한 당혹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떠오른 것은, ‘나는 내 일에 얼마나 진실 하였는가’ 였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진실성을 증명하려고 애를 씁니다.
상대방이 진실성을 알아주지 않으면 실망하고 섭섭해 하고 화를 냅니다.
그 사람과 결별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이후에도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진실성과 진실성이 거부당한 억울함과 부당함에 대해서
토로합니다.
심지어는 평생 그 일을 되뇌입니다.
그런데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럴 정도로 나는 진실한가?”
요즈음 '허위의식'에 대해서 많이 생각합니다.
허위의식이란, 진실은 외면한 채, 사실을 왜곡, 은폐, 축소, 과장하는 생각을 말합니다.
형편없는 사람이 자신의 지위, 외모, 학벌, 경력, 재산 등으로 인해 그럴듯하게 행세 하는데,
본인도 자신을 ‘상당히 괜찮은 사람’으로 착각하고 추종자들도 그렇게 여깁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허위의식으로 포장되어 버립니다.
그런데 명심해야 할 것은,
아무리 혁혁한 성과라 하더라도 허위의식으로 이룩한 것이면 ‘가짜’라는 사실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오므리 왕조는 솔로몬에 버금가게 부강한 나라로 만들어서 먼 곳에
있는 나라들은 이스라엘을 오므리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지 “여호와의 보시기에 그 전 사람들보다 더욱 악을 행하였다.”(왕상 16:25)고
일축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업적과 성과에 관심을 두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성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계십니다.
‘진실성’이란 무엇일까요?
진실성은 정직과 성실과 인내에다 ‘사랑’까지 더해진 것입니다.
그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 아닌, ‘이타적인 사랑’이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진짜로 사랑할 때만 비로소 진실성이 드러납니다.
능력이 있고 정직하고 성실하며 자신의 감정까지 잘 다스리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만을 생각한다면, 그 모든 것들이 일순간에 빛을 잃고 맙니다.
진실성만이 ‘진짜’를 창조합니다.
이 ‘진짜’는 모든 훼방과 역경을 뚫고 모든 항변과 논리와 반대를 침묵시키며, 마침내 죽은 것을
살려 내고 영원한 생명을 만들어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고난 받는 종으로 오신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이런 개념의 글을 쓸 수 있을까, 필설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최고의 내용입니다.
참으로 이사야는 성령의 영감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임을 저절로 인정케 되는 말씀입니다.
높디 높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고난 받기 위해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이 말씀에 나를 띄어
보내면, 나도 모르는 사이 하나님의 사랑과 신비에 빠지게 됩니다.
저절로 내 모든 허위가 드러나며, 내가 얼마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됩니다.
내 아픔과 허물이 눈 녹듯이 사라지며,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저절로 알게 됩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한 최고의 진실이 이 말씀 안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모든 이에게 묻고 있습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이 질문에, “내가 진심으로 믿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그때, 세상의 능력과는 전혀 다른 여호와의 신비한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어서 말합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2000년 전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산모는 가난하여 제대로 먹지 못하였고,
결혼 전에 임신한 것이라 자신의 임신 사실을 숨겨야 했으므로 더더욱 먹을 것을 변변히 챙길
처지도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먼 길을 오느라 기진맥진하였으며 방을 구하지 못해 짐승들이
사는 마구간에 몸을 풀어야 했습니다.
아기를 낳고 땀내 찌든 담요에 싸서 소 여물통에 뉘어놓았습니다.
그 아기가 예뻤을까요? 아니요.
태중에서 제대로 먹지 못했고, 태어나서도 제대로 씻지 못했습니다.
그 아기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이고, 어쩌다가 저 지경이......”라고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을 것입니다.
수많은 그림에 그려진 예수님의 탄생은 인간의 허위의식으로 포장해 놓은 것입니다.
그것을 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눅 2:12)
메마른 돌짝밭을 간신히 비집고 나온 싹과 같은 아기가 더러운 소 여물통에 누워있다는 사실이,
그 지고하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놀라운 말씀입니다.
누군가를 구원하려면 힘과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많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무능과 무력함을 탄식하고, 힘과 능력으로 자신을 강화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질문에 대해서 당연히 대답하지 못하고
“저 보잘것없는 아기가 세상의 구원자라고요?” 이구동성으로 반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다.”라고 하십니다.
성경 전체에서 반복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는 ‘진짜’를 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가리키시는 표적을 보아야 하고, 그 표적에
담아 놓은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내야 합니다.
그래야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립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4)
그러시면서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 5:41-42)
세력과 힘을 구하며 여기저기 기웃거립니다.
힘을 키우며 한편으로는 세력가를 칭송하며 그 세력에 편승합니다.
하나님도 힘을 얻기 위한 방편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이유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단언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마음을 절대로 읽을 수 없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무시하고 야유하고 희롱하고 훼방하고 짓밟아 버렸습니다.
제자들이라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동안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한 제자들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엉뚱한 소리나 펑펑 해댔고, 조금만 어려워도 갈팡질팡, 잘 나간다 싶으면 예수님 면전에서조차도
아옹다옹.
급기야는 자기 뜻에 맞지 않는다고 스승을 팔아먹질 않나, 십자가에 달리자 모두 다 줄행랑을 놓아
버렸습니다.
현재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800년 전 예수님 당시 사람들의 행태를 정확히 서술한 이사야 선지자는
2,800년 후의 우리들의 마음도 정확히 짚어내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지고하신 예수님께서 그처럼 초라하게 태어나셨고, 절대로 힘을 과시하지 않으셨고 십자가 고난을
참으셨음을 진실로 마음속 깊이 받아들였다면, 자신을 어떻게든 드러내려 하거나,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힘을 키우려 하거나, 또한 없다고 비굴해지지도, 많다고 교만해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복 받겠다고, ‘영적 의존증’에 빠져 인간 목사에게 휘둘리거나 온갖 종교행위로 지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실체를 제대로 알면, 당연히 그분을 사랑하게 되고 닮아갑니다.
당연히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는 말씀이 내 삶에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시며, 모든 비본질과 부조리를 드러내는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그분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4)
불행과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잘못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평안과 풍요를 누리고 계십니까?
과연 내가 잘해서일까요?
누군가 나 대신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 은혜와 예수님 사랑은 알수록 할 말을 잃고 그저 송구스럽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세상을 처음 만들었을 때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타락했습니다.
나로부터 매일 크고 작은 죄의 물방울이 똑똑 떨어집니다.
고의적인 죄, 어쩔 수 없는 죄, 그리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죄까지 모여서 죄의 큰물을 이루어
서로를 상하게 하고 생명을 갉아 먹습니다.
죄의 물살이 얼마나 강한지 인간으로서는 속수무책입니다.
누군가가 그 죄의 물살을 멈춰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 일을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가해졌던 모든 것,
욕설, 모욕, 조롱, 침 뱉음, 채찍질, 발길질, 손과 발에 박힌 못, 몸을 파고 든 창은 바로 우리들의
죄였습니다.
예수님은 온몸으로 죄의 흐름을 막아내셨습니다.
이사야는 무지막지한 죄를 담당하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양”이라 하면 무력함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에게 이것은 어떤 고문과 핍박에도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으면서 고통을 견뎌내는
강인한 남자, 최고의 남성상를 의미합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의 전 과정을 지휘 감독한 로마 백부장의 입에서 저절로 튀어나온 말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막 15:39)
예수님의 진실함은,
로마 백부장마저 예수님이 강인한 남자를 넘어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게 했습니다.
그 진실함을 볼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왜 육신을 입고 고난 받는 종으로 이 땅에 오셨을까요?
호세아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너와 결혼하여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너와 결혼하며,
진실함으로 너와 결혼하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호 2:19-20)
어리석은 양처럼 제 뜻대로 가버리는 우리들의 발걸음을 세우고 자신의 신부로 삼기 위해,
그 지고하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고난 받는 종으로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고스란히 담겨진 예수님의 사랑과 진실을 읽고 내 삶에 담아내시기를,
그리하여 하나님과 사람들이 흠모할 만한 진실한 존재로 거듭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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