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진호컬럼

닭보다 훨씬 못한 인간들

새벽지기1 2017. 8. 24. 07:07


닭보다 훨씬 못한 인간들


미국연방대법원은 1973년 온갖 우여곡절의 논란 끝에 그 유명한 "Roe v. Wade" 판결로 낙태를, 임신주기 3개월(trimester)단위에 따라 구체적 내용은 다르지만, 허용했다. 그 판결에 정면 대응하는 낙태금지법안이 네브라스카 주에서 통과되는 바람에 진보(pro-choice)와 보수(pro-life) 진영 간의 전국적인 재대결이 벌어질 것을 예고하고 있다.


금년 10월 20일부터 시행될 문제의 “Pain-Capable Unborn Child Protection(고통감지태아보호법)”은 임신 20주 후의 태아는 고통을 인식하므로 낙태시킬 수 없다는 것이 골자다. 네브라스카는 미국에서 후기 태아의 낙태를 전면 금지시킨, 엄마의 생명을 위협할 때는 예외로 하지만, 최초의 주가 되었다. 낙태를 원하는 임산부에게 의사가 의무적으로 태아가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자문을 해주도록 규정한 여타 6개 주 및 유사한 조치를 강구중인 많은 주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전의 연방대법원 판결은 3개월 이내 초기 태아는 주(州)가 임부의 낙태 권리를 제한할 수 없게 했고, 또 임신후기(7-10개월)의 경우는 태아에게 눈으로 보이는 하자가 있을 때만 낙태를 허용하게 했다. 새 법은 이 두 규정과는 저촉되지 않지만 문제는 임신중기(4-6개월의)다. 각 주별로 엄마의 건강과 관련하여 낙태에 관련된 법률을 제정할 수 있게 한, 쉽게 말해 엄마에게 치명적 위험이 없는 한 낙태를 제한해선 안 된다는 규정과 상충된다.       


첫 번의 연방판결은 주로 ‘인권’에 관한 논쟁이었다. 임부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보장해주어야 하고, 또 태아를 한 인간으로 취급하려면 정식 임신을 어느 시기로 잡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이슈들을 다뤘던 것이다. 아마 곧 이뤄질 것 같은 둘째 케이스는 ‘과학’ 즉, 태아가 언제 고통을 느끼느냐에 관한 논쟁이 될 것이다.


보수 측은 태아가 20주만 되면 고통감지 신경계가 완전히 생성되어 뇌에까지 연결되기에 고통을 느끼면 스트레스 홀몬이 대량 산출될 뿐 아니라, 현재 낙태 수술을 시행하는 의사들도 태아에게 마취조치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진보 측은 태아의 고통감지는 아직은 이론에 불과하지 의학적으로 완전히 검증된 것이 아니라고 맞서고 있다. 일개 시골 주의 법이 시행도 되기 전에 벌써부터 전국적 논쟁이 첨예하게 맞서서 가열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비록 임신 중기 이후에만 적용된다 해도 미국에서 최초로 낙태금지법안이, 그것도 연방대법원 판결과 상치되는, 시행될 예정이라고 하니 반가운 소식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럼에도 아직도 갈 길은 너무나 먼 것 같다. 어쩌면 영영 목표지점에 도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마저 든다.


이번 법안의 취지를 가만히 따져보라. 태아의 고통에 대한 연민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요컨대 태아에게 고통을 주는 잔인한 행위는 그만 두자는 것이다. 그럼 역으로 따지면 고통을 못 느끼면 얼마든지 태아를 죽여도 된다는 뜻이 된다. 아니 여전히 20개월 미만의 경우는 낙태를 허용하고 있으니 이 법안을 뒤집으면 정확하게 바로 그런 뜻이 되지 않는가?


그럼 또 어떻게 되는가? 인간의 고통을 줄이거나 없애는 조처는 무엇이라도 선한 일이 된다. 예컨대 현실적 환난과 문제로 힘들어 하거나 정서적 영적 갈등으로 방황하거나 간에 마약으로 그 고통에서 탈출하는 것도 선한 일이다. 아니 자살로 고통을 단번에 종식시키는 일이야말로 가장 선하다.


이를 또 뒤집으면 어떻게 되는가? 인간이 행복해진다면 어떤 조치도 다 선(善)이 된다. 우상숭배, 오감만 자극하는 유희, 도박, 프리섹스, 동성애, 변태, 마약, 그 어떤 것도 다 용납, 아니 선한 것이 된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남에게 직접적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어떤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지고(至高)의 쾌락을 얻는 것이 가장 선한 것이다.


말장난으로 치부하여 웃고 넘길 일이 아니다. 실제로 작금의 세태가, 특별히 젊은 세대 가운데는 그런 추세가 만연하고 있지 않는가? 태아의 고통을 연민하는 것은 분명히 선한 일이다. 그럼에도 아직은 인간이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인본주의적 발상에 머물러 있다. 인간끼리 사랑하는 것은 너무나 좋은 일이지만 더 근본적이고도 절대적인 근거와 기준이 상실되면 마약과 자살이 미화되는 결과도 낳게 되지 않는가 말이다.  

 

어미 닭이 달걀을 품는 경우와 비교해보자. 달걀의 상태로는 분명히 고통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병아리로 부화되어야만 비로소 외부 자극에 감지, 인식, 반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어미 닭이 병아리를 스스로 깨트리는 경우를 보았는가? 아예 없지 않는가? 닭이 고통을 감지하는 신경계통과 뇌의 상관관계를 알 리는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닭은 생명을 존중할 줄 아는 아주 고상한 존재다. 어미 닭은 먹이가 떨어져 굶게 되었거나, 오랫동안  품고 있는 일이 귀찮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몸에서 난 새끼를 절대 죽이지 않는다. 바꿔 말해 닭은 자기에게 생명을 창조해 주신 하나님을 자신의 삶으로 진정으로 경외할 줄 아는 너무나도 신성한 존재다.


반면에 매일 달걀과 어미닭을 프라이로 즐겨 먹는 인간은 제 새끼도 조금 귀찮다는 핑계로 가차 없이 죽이고 있다. 또 그 일을 인권과 자유를 신장하며 인간끼리 인간의 고통을 덜어주는 아주 고상한 인격적 행위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서 칭송하는 존재다. 닭보다도 훨씬 못하지만 어쨌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존재다.


하나님을 배제한 인간이 필연적으로 도달할 수밖에 없는 종착지다. 다른 말로 인간을 정말로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것이 과학이나 인간애(人間愛)로 형성되는 인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무한한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달걀은 어미 닭으로부터 영양 한 톨 공급받지 않고도 병아리가 되었다. 고통을 전혀 감지 못하는 달걀 상태에서부터 이미 완전한 생명을 지니고 있었다는 뜻이다. 인간 엄마는 임신되자마자 열심히 인간 달걀에게 영양을 공급해 준다. 그런데도 자기 아기를 인간이 아니라고, 아니 생명조차 아니라고 하니 앞으로 가야할 길이 너무나 멀고 험하다는 것이다.


그나마 이번 법안에서 한 가지 실 날 같은 위로는 얻었다. 곧 있을 둘째 대전(大戰)에서 Pro-life 진영이 총력을 바쳐 승리한다면 차츰 임신초기 낙태의 금지도 가능하리라는 섣부른 희망이 생겼다는 뜻이 아니다.


문제의 법안의 이름을 보라. “Unborn Child(태어나지 않은 아이)”라고 했다. 드디어 20개월의 태아에 대해선 정식으로 “아이”라는 명칭을 붙였지 않는가? 설마 이것이 20개월 되어서야 Child가 되고, 그 전에는 Fetus(胚)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