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진호컬럼

일곱 무지개 색깔의 복음

새벽지기1 2017. 8. 22. 16:03


일곱 무지개 색깔의 복음

복음은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자에게 당신의 일방적 긍휼에 따라 당신께서 직접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원죄 하에 태어난 모든 인간은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허물과 죄로 죽어있었습니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엡2: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드러난 의를 온전히 믿는 자를 구원해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선언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

신자는 그 은혜에 수혜자(受惠者)로서 참여하는 것뿐입니다. 인간 쪽에서 구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라곤 자격, 공적, 선행, 심지어 믿음까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만에 하나 믿음을 포함해 인간의 공로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자연히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자랑치 못하게 하려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이 구원의 처음부터 끝까지 작용했다고 단언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구원 안에 담긴 그분의 경륜은 인간 이성에 의한 이해를 초월합니다. 그러나 이성과 절대 반(反)하지 않습니다. 또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구원의 은혜 안에 들지 못한 자는 십자가 복음을 아예 이해할 수 없지만 은혜 안에 들어온 자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단지 그 전부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1:18)이 되는 까닭입니다. 당연히 신자에게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만듭니다.(롬1:17) 토마스 아퀴나스의 “믿는 자에겐 설명이 필요 없고 믿지 않는 자에겐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표현은 아주 적절합니다.

인간이 신학적으로 복음의 신비를 설명하는 내용 모두는 아주 단편적인 설명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성경 기록조차 인간의 언어를 통해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추었기에 복음의 신비를 일목요연하게 묘사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오해는 말아야 합니다. 그 기록 자체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오류가 하나도 섞이지 않는 절대적으로 완벽한 하나님의 계시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인간 언어가 갖는 본질적인 한계성 때문에 성경에 산재한 복음에 대한 설명이 단편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의미하는 내용이 각각의 구절이 규정하는 내용에 한정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전체를 아우르는 체계적인 성경 신학이 필요합니다. 신자로선 개별 교리들을 먼저 이해하고 그 전부를 모아 성경 전체의 뜻에 맞추는 큰 그림을 그려볼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신자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쳐야 할 핵심주제입니다.

그런데 이런 개별적 교리의 단편성은 봉사가 코끼리를 만지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봉사들이 코끼리의 귀와 꼬리와 다리 등 한 부분만 만져보고는 각기 부채, 뱀, 기둥으로 묘사했지만 코끼리의 실체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완전히 틀린 내용이었습니다.      

반면에 복음에 관한 신학적 설명은 마치 빛을 프리즘으로 분광해서 보는 것과 같습니다. 빛은 육안으로는 아무도 정확히 볼 수 없습니다. 창틈이나 구름 속에서 비스듬히 내리비치는 경우에 한해 단순히 희고 밝은 색의 직선 모습으로만 인식할 수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빛은  이처럼 흑암이 있어야만 대비되어 나타납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대낮에는 그냥 빛 속에 잠겨 있기에 빛을 감지조차 못하며 어떤 모습이라고 묘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프리즘으로 보면 빨주노초파남보의 일곱 무지개 색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복음에 대한 예정, 대속, 칭의, 보상, 전가, 은혜, 회심, 중생 등의 신학적 설명은 바로 프리즘으로 비춰본 일곱 색깔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인이 평소에 빛을 구태여 프리즘으로 볼 이유나 기회는 없습니다. 빛에 대해 공부할 때에만 그렇게 봅니다. 빛은 그냥 흰색으로 항상 우리 곁에 함께 있을 뿐입니다. 신자에게는 복음은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빛을 프리즘으로 분광해보는 것 같이 복음에 대한 신학적 설명도 복음을 조금 더 자세히 그리고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코끼리 봉사의 경우와는 전혀 다르게 복음의 성격을 분명히 사실대로 정확하게 설명한 것입니다. 틀린 내용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전부가 아닌 단편일 뿐입니다.

나아가 빛에는 프리즘으로는 볼 수 없는 적외선, 자외선이 있으며 또 파장과 입자라는 두 가지 상충되는 성격까지 갖추었습니다. 복음에도 이처럼 인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예컨대 선택과 예정 같은 영역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라는 서로 상충되는 부분을 함께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측면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빛에는 다양한 특성이 있지만 인간 육안으로는 그냥 하얗게 인지됩니다. 또 태양이 항상 인간과 함께 하듯이 빛은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합니다. 비록 때로는 먹장구름이 막혀도 태양은 그 위에 상존(常存)하며 밤에도 달에 반사하여 비춰줍니다. 빛 가운데 있는 자는 단순히 빛으로 이해됩니다. 빛을 모르지 않으며 보지 못하지도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복음 안에 들어온 자는 복음을 일곱 색깔로 나누거나 자외선 적외선 같이 복잡한 과학적 설명을 알 필요 없이 그냥 단순히 복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은혜 안에만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해 죽으신 그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 구원을 얻었음을 확신하면 됩니다. 아무 의심을 가질 필요가, 아니 생길 리가 없습니다. 믿음 안에 들어온 자는 복음을 이해하고 그 은혜와 권능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그 구원을 빛으로 표현한 것은 너무나 절묘한 유비(類比)입니다. 아니 그분은 실제로 이 땅에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