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조병수교수

요한계시록 해설 (3)

새벽지기1 2017. 6. 9. 07:19


III. 성도들의 인내 (8-14장)

1. 성도들의 기도 (8:1-5)

그러면 성도들에 대한 이같은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환난의 배경은 무엇인가? 여기에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깊은 영적인 배경이 있다. 요한은 이제 이 영적 배경에로 우리의 관심을 돌린다. 하지만 그는 우선 환난받는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서술한다. 환난받는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기억은 무엇보다도 기도응답으로 나타난다. 환난 중의 성도들은 기도를 한다. 하늘의 장면에서 4생물과 24장로들이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는데, 이 향은 성도들의 기도들이라고 하였다 (5:8). 환난 중의 성도들이 많이 기도한다. 그래서 성도들의 기도는 많은 향이라고 표현된다. 환난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이에 못지 않게 기도가 많다. 환난이 크면 클수록, 성도들은 더욱 많이 기도한다. 금향로에 담긴 향연이 성도들이 기도와 함께 하나님 앞으로 올라간다 (8:4).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즐겨 받으신다. 기도는 향이기 때문이다! 향은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기뻐하심을 의미한다. 기도가 향인 것은 하나님께서 그만큼 즐겨 받으신다는 것이다. 이제 향로에는 단 위의 불이 담겨지고 땅에 쏟아진다. 기도와 향을 담았던 금화로가 이제는 진노의 불을 담는데 사용된다 (박윤선, 191).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셨고, 땅에 내리는 심판은 그 기도의 응답이다. 기도할 수 있다는 것,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있다는 것, 이것은 환난 중의 성도에게 이미 큰 위로가 된다. 이 사실은 성도들이 환난 중에서 얼마나 많이 기도해야 할 것인가를 알려준다.

2. 일곱 나팔 (8:6-11:18)

그들을 핍박하는 자들에 대한 심한 심판이 진행된다. 처음 네 가지의 나팔재앙은 지상적이며 물리적인 성격을 지녔다. 그리고 나중 세 가지는 영적 능력으로 말미암는 성격을 지녔다.

잠시 여기에서 계시록의 구조에 대하여 살펴보자. 계시록을 이해하는데는 "4"라는 숫자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1. 하늘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중심으로 4생물, 24장로, 14만4천 등이 둘러싼다.

2. 계시록의 중요한 사건들로 교회, 인, 나팔, 대접 (교인나대)가 나오는데, 이것들을 장별로 구분하면, 2장-3장에서 일곱 교회들에 대한 이야기, 4장 (또는 5장)부터 인에 대한 이야기, 8장부터 나팔에 대한 이야기, 16장부터 대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며, 20장부터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3. 그런데 이처럼 일곱씩 짝을 이루고 나오는 사건들 가운데, 처음 4개와 나중 3개는 다시 그룹을 이룬다. 즉, 일곱 인에서는 처음 4 인이 말과 말탄자들이 짝을 이루어 나중 3 인과 구별되고, 일곱 나팔에서는 처음 4 나팔이 땅 (地), 바다 (海), 강 (江), 해 (日)에 대한 심판으로 짝을 이루고, 나중 3 나팔은 세가지 화로서 짝을 이루어 구분되며, 일곱 대접에서는 처음 4 대접이 위의 처음 4 나팔과 마찬가지로 땅, 바다, 강, 해에 대한 심판으로 짝을 이루고, 나중 4 대접은 영적인 사건을 다룸으로써 구별된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일곱 교회에 대한 구분인데, 계시록의 장 (章)을 나눈 분이 처음 4 교회는 2장에 두고, 나중 3 교회는 3장에 두어 구분했다는 점이다.

이 재앙들의 모티브는 출애굽시의 열 재앙과 비슷하다. 우박과 불 (8:7, 출 9:24), 물이 피가 됨 (8:8, 출 7:19), 어두워짐 (8:12, 출 10:21), 황충 (9:3, 출 10:12). 이 재앙의 중요한 목적은 성도들을 핍박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이다. 그래서 출애굽의 재앙이 단지 애굽인들에게만 내렸듯이, 여기의 재앙도 단지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맞지 않은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 (9:4). 그런데 이러한 재앙의 궁극적인 목적 중의 또 하나는 사람들이 배신적 (背神的)인 행동을 그치고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다 (9:20-21). 과연 그들은 이러한 심판 앞에서 회개하고 돌아올 것인가?

1) 처음 네 나팔 (8:6-13)

처음 네 가지의 나팔은 땅, 바다, 강, 일월성진에 대한 심판으로 이어진다. 땅이나 바다 뿐 아니라, 전 세대를 통하여 강과 샘들도 이 행악자들을 대적할 것이다. 그러나 나중 세 가지의 나팔은 더욱 중한 심판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의 큰 소리로 도입된다.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이외에도 세 천사의 불 나팔소리를 인함이로다" (8:13)고 말한다. 음산한 분위기가 가일층 강조된다.

2) 나중 세 나팔: 세 가지 화 (9:1-11:18)

(1) 첫째 화

첫째 화는 다섯번째 나팔과 함께 시작된다 (9:1-12). 이때 하늘에서 떨어진 별 하나가 보인다. 이것은 틀림없이 패배한 사탄의 모습을 가리킨다. 눅 10:18에서 주님은 "사탄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말씀하셨다. 그에게 무저갱의 열쇠가 주어졌다. "주어졌다"라고 함으로써 사탄이 활동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한도내에서 할 뿐임을 나타낸다 (박윤선). 본래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1:19). 하나님께서 사탄을 이용하시어 사람들을 심판하신다. 하지만 사탄은 이 열쇠를 빼앗기고, 이 열쇠는 하나님의 천사에게 주어지게 될 것이다. 결국에 사탄은 자신이 사용한 무저갱에 던져지고 갇힘을 받고 만다는 점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20:1-3). 이 무저갱으로부터 연기가 올라와 해와 공기를 어둡게 한다. 이것은 악한 사상이 세상에 퍼트려져 진리가 흐려지는 것을 의미한다 (박윤선). 또한 이 연기가운데로부터 무시무시한 형상을 띈 황충들이 나온다. 이것들은 악한 사상을 가지고 모든 비성도 (非聖徒)들의 영혼을 멸망케 하는 군대인 동시에 겸하여 거짓 선지의 무리를 상징한다. 이것들은 대단한 세력으로 사람을 괴롭힌다. 인간의 영혼에 악한 사상을 주입시켜 병들게 만든다. 그리하여 멸망으로 이끌고 간다. 왜냐하면 그들의 임금의 이름이 히브리어로 아바돈, 헬라어로 아볼루온이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이 장면의 끝에서 갑자기 히브리어와 헬라어 단어를 하나씩 언급한다. 이것은 언어에 의한 상징이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언어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계시록을 읽는 성도들에게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배우라고 말하려는 것인가? 요한이 자신의 히브리어와 헬라어 실력을 과시하려는 것인가? 사도 요한은 독자의 무식이나 자신의 유식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러한 언어적 상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요한은 언어적 감각으로 아주 분명하게 의미를 전달하려는 것이다. 히브리어의 아바돈과 헬라어의 아볼루온은 멸망시키는 자라는 뜻이다. 언어적 감각으로 독자들은 황충들의 임금의 성격을 단 한 마디로 대단히 인상적으로 알게 된다. 하지만 황충들의 괴롭힘에는 시간적인 제한이 있다. 단지 다섯달 동안이다 (9:5,10).

(2) 둘째 화

둘째 화는 여섯번째 나팔과 함께 시작한다 (9:13-21). 이때 큰 강 유프라데스에 결박된 네 천사가 놓인다. 이들은 년 (年), 월 (月), 일 (日), 시 (時)를 의미한다. 이 심판은 전쟁에 의한 것을 말한다. 어떤 특정한 시대의 전쟁이 아니라, 온 시대를 걸쳐 일어나는 전쟁이다. 그러나 전쟁의 시간도 모두 하나님의 권한에 놓여져 있다. 하나님께서 온 시대에 걸쳐 일어나는 전쟁들의 년과 월과 일과 시를 정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육적인, 영적인 모든 분야에 재앙을 내리심으로써 성도들을 핍박하는 자들을 끊임없이 징벌하신다. 그런데 이처럼 성도를 핍박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이 제한적인 것은 무엇을 위함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들이 회개하지 않는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한 이를 회개하지 아니하고..." (20). 이들은 계속해서 십계명의 두개의 기본 사상을 범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범죄에서 떠나지 않는다 (20).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우상을 섬긴다. "금, 은, 동, 목, 석"으로 만들어진 우상에게 절한다. 이들은 우상을 만드는 재료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함으로써 사람에 대한 범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21). 성도를 핍받하던 세상은 이제 회개하지 않는 세상이 된다. 11장에서 바로 이 회개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더욱 자세한 묘사가 나온다. 세상이 얼마나 완고한지를 보인다.

A. 환난의 원인 (10:1-11)

사도 요한은 회개하지 않는 세상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기 전에 성도가 왜 핍박을 받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게 된다. 성도의 고난은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사도 요한자신의 경우를 들어 성도의 고난을 설명한다. 요한은 거대한 천사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책을 가져다가 먹는다. 이것은 입에는 꿀 같이 달지만 (겔 2:9이하, 3:1참조), 배에는 쓰다. 성도의 고난은 복음때문에 오는 고난이다. 복음은 달고 영광스럽다. 이것은 시편기자가 노래한 것과 같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맛보다 더 하니이다" (시 119:103). 하지만 그 복음을 받은 후에는 반드시 쓰린 고난이 온다. 성도가 고난을 받는 것은 복음을 먹은 자이기 때문이다. 먹은 후에는 쓴 고난이 따른다. 실제로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 섬에 유배를 당하였다 (1:9). 하지만 성도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다시 전도하게 된다. 요한은 이 책을 먹은 후에 계속해서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예언할 사명을 받는다.

B. 외식적인 기독교인 (11:1-2)

하지만 복음에 의한 고난은 외식적인 기독교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이 사실을 성전 측량이 잘 보여준다. 사도 요한에게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지만, "성전 밖의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고 한다 (11:2). 전자는 참된 교회, 즉 중심에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거하고 있는 성도들을 말한다 (Hendriksen). 복음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받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산 속에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에 의하여 측량되어진다. 척량은 소유의 회복이나 소유의 확보를 의미한다 (박윤선). 후자는 교회와 관계하고 있으나 참된 성도가 아닌 자들을 가리킨다. 이름 뿐인 그리스도인들이다. 하나님 앞에 보이러 오는 자들이다. 마당만 밟을 뿐이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빌면,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함과 같다 (사 1:12). 이들은 세상적인 것들을 환영한다. 복음을 따라 살려고 하지도 않으며, 더군다나 복음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받지도 않는다. 복음대로 살려하기에 고민하지도 않으며,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을 각오도 없다. 이들은 오히려 세상과 짝하여 그 안에서 살고 세상의 친구들과 향락을 즐긴다. 세상적인 사고방식에 자극을 받고 감동한다. 세상적인 생활방식에 매력을 느끼며 파묻힌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산 밖에 있다. 하나님의 자로 측량되지 않는다. 이들은 세상사람들에 의하여 마구 침범될 것이다. 세상사람들이 외식성도들에게 다양한 즐거움을 제공할 것이다. 세상은 모든 최신 문화를 이용하여 성도를 미혹한다. 현대의 문화를 마음껏 즐기라고 말한다. 현대인의 삶에서 뒤쳐지지 말라고 속삭인다. 그리스도인은 현대의 문화를 만끽하면 안되느냐고 질문을 던진다. 세상이 수다한 방법으로 이들을 유혹할 것이다. 사상으로, 향락으로, 물질로, 음란으로 유혹할 것이다. 그래서 참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조금 덜 현대적인 삶을 살 필요가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산 속에 있음 - 하나님의 소유임 - 에도 불구하고 고난에 놓이게 될 것이다. 거짓된 성도들이 세상의 유혹을 받을 때에, 참된 성도의 모임은 고난의 현장에 놓이게 될 것이다. 성전 밖 마당과 함께 "거룩한 성"이 이방인에게 짓밟힌다. 하지만 여기에도 시간적인 제한이 있다. 이것은 단지 마흔 두 달 동안 될 뿐이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참된 성도들은 고난에서 허덕이고만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이 기간동안도 꾸준히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말한다.

C. 두 증인 (11:3-14)

이 기간동안의 하나님의 교회는 두 증인으로 비유된다. 증인 이수 (二數)는 증거상 신실을 성립시키는데 요구되는 수효이다 (신 19:15). 이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 (11:4)라고 소개되는데 이것은 슥 4:11-14의 내용을 이용하는 것 같다. 두 증인은 모세와 엘리야를 연상시킨다. 하늘을 닫아 비가 오지 못하게 하는 것 (11:6)은 엘리야를 (왕상 17:1), 물을 변하여 피가 되게 하는 것 (11:6)은 모세를 연상시킨다 (출 7:20). 모세와 엘리야는 율법과 선지서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 17:3 par.). 그러나 이것은 더 나아가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율법과 선지자가 완성되었으므로, 이제 신약교회가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영적 권세를 가지게 된 것을 의미한다 (박윤선). 교회가 영적 권세를 행사하는 동안 세상을 교회를 핍박한다. 하지만 교회는 핍박을 받을 때마다 더욱 맹렬하게 반격한다.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한다" (왕하 1:9-12 참조). 성도들이여, 최고의 방어는 공격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핍박당하는 동안 그리스도를 말하라. 복음을 말하여 세상을 흔들었기에 핍박이 온다면, 핍박받는 중에도 복음을 말하여 계속해서 세상을 흔들어라. 그리스도인은 말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은 침묵하는 자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아, 불같이 말하라! 여기 두 증인은 1260일 동안 예언을 한다. 거룩한 성에 대한 공격은 달로 (42 달), 두 증인의 예언은 날로 (1260일) 표현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달은 듬성듬성한 성격을, 날은 촘촘한 성격을 나타낸다. 세상의 교회에 대한 물리적인 공격보다 교회의 세상에 대한 영적 반격이 더욱 강하다. 두 증인은 다시 두 선지자로 일컬어지는데,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힌다" (11:10). "이것은 그들이 진정한 선지자들이었던 증표이다. 거짓 예언자는 사람에게 아첨하며 (렘 6:14, 8:11), 사람들의 죄를 바로 말해주지 아니하며, 치료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진정한 예언자는 사람들이 듣든지 말든지 죄를 책망한다 (겔 2:7, 딤후 4:2)" (박윤선). 교회의 이러한 찔러댐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다. 시간이 다되어, 두 증인이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인다" (11:7). 이것은 사실상 13장에 있을 사건을 미리 당겨 설명하는 것이다. 두 증인의 결국을 말하기 위함이다. 두 증인의 시체가 큰 성길에 있게 된다. 이 성은 영적으로 소돔, 애굽,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고 불린다. 이것은 실제로 이 세상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11:9) 두 증인의 시체를 구경하며 장사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이처럼 타락하고 (소돔처럼), 성도들을 핍박하고 (애굽처럼),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마저 죽였다. 교회가 핍박을 당할 때에 세상은 즐거워한다. 세상은 기뻐하며 서로 예물을 보낸다 (11:10). 하지만 이 시간은 단지 삼일 반이다. 이 숫자에 주의하라! 이것은 42달과 1260일의 년수인 3년 반을 날로 바꾸어 생각한 것이다. 세상이 주는 핍박의 기간과 이 동안 교회가 증거해야 할 시간은 동일하지만, 그 정도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나며, 핍박 그 자체는 보다 짧은 기간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후에 두 증인은 다시 살아나고, 하늘로 올라가게 된다. 이것은 20:5의 내용이 미리 당기어 설명되는 것이다. 부활과 승천을 구경하는 자들이 (11:11,12) 크게 두려워한다 (11:11). 그때에 큰 지진이 나게 되자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며 심지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11:13).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회개하였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 두려워 떨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는 회개하고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다! 그들은 다만 공포에 사로잡힌 것뿐이다. 느브갓네살 왕이 그의 생존시에 자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었다 (단 2:47, 3:28, 4:1이하, 4:34, 4:37). 그러나 이것이 그가 회개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Hendriksen). 세상은 전도를 듣고 회개하는가? 아니다. 세상은 정말로 완악하다. 그 완악의 심각한 정도는 이렇게 설명된다. 그들은 두 증인의 말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다.

(3) 셋째 화

이제 일곱 번째 나팔이 나온다 (11:15). 이것은 세 번째 화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세 번째 화가 무엇인지 설명되지 않는다. 이것은 비로소 일곱 대접의 재앙 (16장이하)에서 자세하게 묘사된다. 이것은 마지막 재앙이다 (15:1). 이 마지막 재앙인 일곱 대접이 실현되기 전에 먼저 하늘의 여러가지 장면들이 설명된다. 첫째로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난다" (11:15).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왕노릇할 것을 노래한다. 다음에는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린다" (11:19). 셋째로는 하늘에 몇 가지 이적이 보인다 (12:1, 12:3, 15:1). 그 사이에 "하늘에 전쟁이 있다" (12:7).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린다" (15:5). 여기에서 성도들에 대한 환난의 영적 배경이 설명된다. 환난은 외적인 것일 뿐 아니라 내적 원인이 있다. 환난의 영적 원인은 사탄이다. 사탄은 어떻게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는가?

3. 성도의 인내 (12:1-15:5)

1) 여자와 용 (12장)

하늘의 이적에 한 여자가 등장한다. 이 "여자"는 구약과 신약을 통털은 하나님의 교회를 의미한다. 우선 교회의 구약적인 모습이 묘사된다. 해와 달과 12별 (12:1)은 이스라엘의 구성인인데 (창 37:9), 여기에서는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교회를 나타낸다. 구약교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오신다. "여자가 아들을 낳는다" (12:5). 사탄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려 하였다.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12:4). 그러나 이 아들은 부활 승천하신다. "이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12:5).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구약교회는 신약교회가 된다. 하지만 사탄은 이 신약교회를 그냥 두지 않는다.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지라" (12:13). 사탄이 신약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사탄은 "하늘의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신약교회는 세상에 머물되 하나님의 보호가운데 있다. "광야로 도망하매...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에 있더라"(12:6, 12:14 참조). 용 (사탄)은 이 여자를 해치기 위하여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한다 (12:15). 사탄의 물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모든 이 세상주의의 생활인데, 곧, 염려, 탐심, 기타 여러가지 육체적 생활을 가리킨다" (박윤선). 사탄은 거짓의 물결, 혼란, 종교의 이즘 (ism), 철학적 허구, 정치적 이상향, 그럴듯한 과학적 요설 등등으로 교회를 삼키려고 애를 쓴다 (Hendriksen). 하나님의 교회는 이런 사탄의 계략 앞에서 "흘러 떠내려갈까" 주의해야 한다 (히 2:1). 그런데 사탄이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할 수 없게 되자 분노에 사로잡히여, 이제는 각 성도들을 망가뜨리려 한다 (12:17). 이들은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다 (12:17). 그런데 교회와 성도들이 핍박을 받는 시간이 "한 때 두 때 반 때"로 정해진다. 이것은 구약을 통하여 엘리야 시대의 가뭄으로 인한 고통의 시간과 동일함을 알 수 있다 (왕상 17장, 약 5:17). 이 기간 동안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에 의하여 심한 핍박을 받았다. 단 7:25, 12:7에 의하면, 이것은 적그리스도의 시간이다.

2) 용의 동역자들 (13장)

그런데 용 (사탄)은 여자의 남은 자손과 어떤 방법으로 싸우는가? 그는 세 가지 방법을 고안한다. 마지막 방법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큰 음녀 바벨론이다 (14:8; 17장-18장). 여기에서는 단지 처음 두 가지 방법을 고찰한다. 사탄은 먼저 두 짐승을 고용한다. 하나는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이고, 다른 땅에서 나오는 짐승이다. 바다와 땅의 짐승들을 고용하기 위하여 사탄 자신은 바다와 땅의 경계인 모래 위에 선다 (12:17).

(1) 첫째 짐승

첫째 짐승 (이것은 단 7장의 4 짐승의 합성체인 듯하다)은 지배하는 성격을 지닌다. 이것은 이 짐승의 모습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짐승의 모습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다" (13:2). 이 짐승은 정치를 의미한다. 사탄은 이 짐승에게 네 다섯 가지의 권세를 허락한다. 첫째로, 보좌와 함께 지배자의 권세를 준다 (13:2-3). 둘째로, 경배받을 권세를 준다 (13:4). 셋째로, 하나님을 훼방할 권세를 받는다 (13:5-6). 넷째로,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는 권세를 받는다 (13:7) [사실상 헬라어로는 여기에 권세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고 다만 비슷한 어구가 있을 뿐이다]. 다섯째로,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받는다 (13:7). 이 짐승은 모든 시대를 관통하는 적그리스도적인 정치를 가리킨다. 이 적그리스도적인 정치는 모든 악랄한 방법을 동원하여 지배권을 장악하고 자기를 경배의 대상으로 섬기게 하며 하나님을 멸시하고 성도들을 핍박한다. 하지만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세상사람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며 (13:8),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하며 환영할 것이다 (13:4) (이것은 "누가 하나님과 같으뇨" - 미가엘 천사의 이름의 뜻과 같다는데 주의할 것).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이 짐승의 활동기간은 제한이 있다는 것이다. 단지 "마흔 두 달" 활동할 수 있다. 같은 기간이 세 방면으로 이해되고 있음에 주의하라. 교회의 활동은 1260일로서 긴 시간으로 (12:6), 핍박자의 활동은 마흔 두 달로 짧은 기간으로 (13:5), 핍박 그 자체는 세 때 반으로 가장 짧은 기간으로 (12:14) 이해된다. 그리고 또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이 짐승의 결국이 결정되어있다는 것이다.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며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반드시 칼에 죽임을 당할 것이다. 성도들이여 이 포악한 짐승의 정해진 패망에 대한 안목을 가지라. 이 영적 통찰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성도들이 인내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사도 요한의 저 분명한 음성이 들리지 않는가 (13:10):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2) 둘째 짐승

그런데 사탄의 방법은 이처럼 포학한 정치를 이용하여 성도들과 싸우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이제 바다의 짐승에 이어 땅의 짐승이 등장한다 (13:11). 둘째 짐승은 첫째 짐승과 비교할때 대단히 부드러운 모습을 띈다. 그는 "새끼양 같이 두 뿔을 가지고" 있다(11). 하지만 이것은 속임수이다. 왜냐하면 그의 겉모습만 부드럽지 그의 말은 사탄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사탄은 온 세상을 꾀는 자이다 (12:9). 둘째 짐승은 "용처럼 말한다" (11). 이 짐승은 종교를 의미한다. 이 짐승은 사탄이 고안해낸 미혹의 종교이다. 그러므로 이 짐승은 사람들에게 네 다섯 가지 종교적인 일을 강요한다. 첫째로, 둘째 짐승은 사람들에게 처음 짐승을 경배하도록 강요한다 (12). 둘째 짐승은 첫째 짐승을 위한 거짓 선지자이다 (16:13, 19:20, 20:10). 말하자면 사탄의 사주를 받는 정치와 종교는 함께 길을 가는 것이다. 많은 경우 종교는 정치지도자를 우상화하는데 조력한다. 둘째로, 둘째 짐승은 큰 이적을 행한다 (13). 심지어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오는 이적까지 행한다. 이러한 기가 막힌 이적행사를 통하여 미혹을 베푼다. 셋째로, 둘째 짐승은 처음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게 한다 (14). 그리고 우상을 섬기지 않는 사람들을 몇 명이 되든지 상관없이 죽인다. 네째로, 둘째 짐승은 모든 자에게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한다. 마치 하나님의 성도들의 이마에 인을 치듯이 (7:3), 이 짐승은 사탄에게 속한 자들의 이마와 오른손에 인을 친다. 사탄의 종교가 철저하게 사람들을 지배한다. 짐승이 모든 사람들에게 표를 받게 함으로써 도모하는 것은 경제의 통제이다.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13:17). 사탄의 사주를 받는 짐승이 결국 손을 대는 것은 경제이다. 왜냐하면 경제는 생활에 가장 민감하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사탄의 종교를 거부하는 하나님의 성도들은 생업에 막대한 지장을 받게 된다. 성도들은 신앙의 원리에 충성하는 동안 사거나 파는 행위까지도 하지 못하도록 억압을 받게 된다. 이러한 억압에 대하여는 교회의 역사 가운데서도, 교회의 현실 가운데서도 많은 예를 찾아볼 수가 있다. 이러한 적대행위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끊이지 않을 것이며 세상의 종말이 가까워 올수록 더욱 증가할 것이다. 사탄은 경제의 근본을 장악하여 성결하게 사는 성도들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이 표의 내용이 밝혀져 있다. 이 표는 "짐승의 이름"이거나 또는 "짐승의 이름의 수"이다. 그런데 이 수는 다시 "사람의 수"라고 설명된다. 인간에게 속한 수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히 떠난 인간의 수이다. 여기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것은 인간의 배신성 (背神性)이다. 인간의 절대성, 독립성, 만능성, 신성이 강조된다. 마치 바벨탑 사건에서 보이듯이, 사람의 이름이 강조된다 ("우리 이름을 내자", 창 11:4). 짐승은 성도들과 싸우기 위하여 배신적 (背神的)인 모든 인간을 활용한다. 이들로 하여금 경제와 시장을 점령하게 한다. 배신성 (背神性)이 그들이 한편이라는 명백한 표식이다. 하지만 총명있는 자는 그들의 배신 (背神)행위의 결국을 분명하게 안다. 왜냐하면 그는 이 수의 의미를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 (13:18). 그 수는 철저히 하나님의 통치를 버리고, 철저히 인간의 통치를 따르겠다는 것을 나타내는 수이다. 하나님이 우주의 중심에 계시고 우주를 다스린다는 것과 그 대권을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다는 것 (4장)을 거절하는 수이다. 그 수는 666이다. 이것은 불완전의 수이며 실패의 수이다. 인간이 그토록 사랑하는 배신성 (背神性)이란 불완전이며 실패이다. 이것을 사탄에게 속한 자들은 알지 못한다. 그는 인간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단지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자만이 알 수 있다 (13:18). 그러므로 여기에 666이란 숫자를 언급함으로써 말하려고 하는 것은 실제로 사람들이 666이라는 숫자를 이마와 오른손에 표식으로 낙인찍히게 된다는 것이 아니다. "6"을 말함으로써 사탄에게 속한 자들은 인간의 능력을 자랑하여 하나님에 대해 거부적이라는 것과, 동시에 "666"을 말함으로써 인간의 배신성이 철저하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수가 기왕에 불완전과 실패를 나타낸다면, 자신들의 능력을 완전한 것처럼 자랑하는 사탄의 자녀들이 결국은 실패하되, 실패하고, 또 실패하고, 또 실패할 것임이 여기에 암시되어 있다. "이것은 사람의 수인데 짐승은 사람을 번영하게 하고 자랑스럽게 만들기는 하나, 그러나 결국은 실패하고 만다!" (Hendriksen). 이 짐승과 짐승의 우상과 그 이름의 표를 가진 자들의 실패는 그들이 그처럼 거역하는 하나님께서 내리실 것이기에 피할 수가 없다. 요한은 하나님에 의한 짐승의 실패를 드디어 확인하게 된다. 요한은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반대로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자들, "사람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들", 14만 4천명과 함께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선 것을 보고 나서 (14:1-5), 짐승의 실패를 확인하게 된다. 세 천사가 연이어 나타나서 짐승의 실패를 확인시켜준다. 첫째 천사는 온 세상에 영원한 복음 전하는데 하나님의 심판이 그 내용을 이룬다 (14:6-7). 둘째 천사는 사탄의 하수인 중의 하나인 음녀 바벨론의 멸망을 미리 당기어 -- 이것은 17장이하에 자세히 설명됨 -- 선고한다 (14:8). 셋째 천사는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의 실패를 선언한다 (14:9-12). 짐승과 그 우상을 경배하고 그 표를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신다. 섞인 것이 없는 진노이다. 순수한 진노이다. 영원한 고난이 쏟아진다. 짐승과 그 우상을 경배하고 그 표를 받은 자들은 밤낮 쉼을 얻지 못한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세상을, 배신성 (背神性)으로 가득찬 세상을,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신적 (背神的)이기에 하나님의 성도들을 정치와 경제와 그외의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악랄하게 핍박하는 세상을, 사탄의 사주 하에 있는 세상을 하나님은 그대로 두지 않는다. 하나님은 기필코 보복하신다. 이 하나님에 대한 시각이 필요하다. 이 하나님을 바라보라.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기" (14:12) 때문에 핍박받는 그리스도인들이여, 환난 많고 고통 많은 이 세상에서 눈을 땅에 두지 말고, 하나님에게로 돌리라. 하나님이 보복하신다. 사탄은 반드시 실패하고 만다. 두 가지의 추수가 마지막 날에 있을 것이다 (14:14-16, 17-20). 최후의 심판날에 하나님의 성도들은 천국에 들일 것이며 (14:14-17), 사탄에게 속한 자들은 천국 밖에서 고통하게 될 것이다 (14:17-20).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성도들은 어린 양의 찬송을 부르게될 것이다 (15:2-4):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주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아니하오리까? 오직 주 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운 일이 나타났으니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성도들이 인내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 사도 요한의 저 분명한 음성이 들리지 않는가 (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