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기쁨과 경이로움으로만 가득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삶이 온통 행복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인생길이 밝음으로만 채색되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쉽게도 우리네 삶은 기쁨만도 아니고 슬픔만도 아니다.
행복만도 아니고 탄식만도 아니다. 밝음만도 아니고 어둠만도 아니다.
억만장자건 빈털터리건 예외 없이 사람이란 때로는 경탄하고 때로는 탄식하면서 살아간다.
우리 앞에 펼쳐진 세상은 한없이 아름답고, 한없이 장엄하고, 한없이 오묘하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생명체들이 기막힌 조합을 이루면서 무질서한 듯 질서정연하게,
질서정연한 듯 무질서하게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 세상은 정말 경이 그 자체다.
우리 집은 언덕배기인데다가 서향이라서 붉은 노을을 볼 기회가 많은데,
날마다 새롭게 펼쳐지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겹겹이 솟구친 봉우리들을 보고 있노라면
산의 장엄함과 위엄 앞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또 굳은 땅을 뚫고 올라오는 여린 새싹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생명의 위대함에 탄복이 절로 나온다.
꽤 오래 전 곤충들의 세계를 확대 촬영한 ‘마이크로 코스모스’라는 영화를 볼 때
생명의 신묘막측함과 존재의 경이로움에 넋을 잃은 적이 있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할 걸음 더 나아가
‘신비한 것은 세상이 어떠한가가 아니라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다’라고 했다.
진실로 그렇다. 우리는 참으로 신비하고 놀라운 세계를 살고 있다.
한없이 아름답고 장엄하고 오묘하고 다채로운 세계를 살고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이토록 아름답고 장엄하고 오묘하고 다채로운 세계에서 살고 있는데도
다들 탄식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신비한 것은 세상이 어떠한가가 아니라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다’라고 말한 비트겐슈타인마저도
경탄만 하면서 살지는 않았다.
그도 탄식하면서 살았다.
가장 완전한 인간인 예수님께서도 존재와 삶의 신비만을 노래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도 깊이 탄식하며 사셨다.
누구보다도 더 크게 기뻐하시고 경탄하셨으며, 누구보다도 더 깊이 아파하시고 탄식하셨다.
심지어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까지 하셨다.
이것이 인생의 신비이다.
경이로움 없이 탄식만 하며 사는 인생도 없고,
탄식 없이 경이로움에만 사로잡혀 사는 인생도 없다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신비요 은총이다.
기쁨만도 아니고 슬픔만도 아닌 인생,
행복만도 아니고 탄식만도 아닌 인생,
밝음만도 아니고 어둠만도 아닌 인생의 모호함과 뒤섞임 속에
하나님의 신비와 은총이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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