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안식월이 거의 끝나간다.
설교 안식월 덕분에 쫓기는 맘 없이 구원론 설교 원고를 매만질 수 있었다.
틈틈이 책을 읽고 산책을 하며 몸과 마음을 달랬지만 거의 대부분은 설교 원고를 매만지며 지냈다.
처음 두 달 동안은 설교 내용을 전체 맥락에 맞게 편집하는 작업,
부족한 내용을 보완하는 작업, 눈에 띄는 대로 글을 수정하며 다듬는 작업을 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세 번을 했다.
두세 번을 하고 나니 몸도 힘들고, 글도 어느 정도 정리됐다 싶은 생각에 그만 매만지려고 했다.
이제 구원론 설교는 덮어두고 새롭게 시작할 설교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신광은 목사님과 설교 내용을 검토하면서 원고를 다시 보니
예상외로 수정할 대목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어느 대목은 부끄러울 정도로 비약이 심하고 글의 호흡 또한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았다.
지난번에 작업할 때에는 분명히 어느 정도 정리됐다 싶은 생각이 들었었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다시 보니 또 다시 보충할 부분이 보이고, 수정할 부분이 눈에 띄었다.
하여, 글 전체를 다시 검토하고 있다.
반복되는 부분은 최대한 삭제하고, 부족한 부분은 보완하면서 수정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사실 이번 뿐 아니다. 책을 출판할 때마다 끝없는 수정 작업의 연속이었다.
누구나 그러하듯 나 또한 글을 쓸 때마다 최선을 다한다.
내용의 진실함, 흐름의 자연스러움, 글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최대한 노력한다.
하지만 아무리 최선을 다해 글을 써도 나중에 다시 읽어보면 여기저기 흠이 보인다.
그때는 보이지 않던 흠이 새롭게 눈에 띈다.
그럴 때면 깨닫는다. 글에 완성이란 없다는 것을.
아무리 다듬고 또 다듬어도 여전히 다듬을 곳이 있는 것이 글이라는 것을.
타고난 글쟁이야 그러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풍문에 의하면, 어느 시인은 한 번에 글을 완성한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있으니까.
정말 그러한지는 알 길이 없지만 어쨌든.
그런데 나에게 글이란 결코 완성에 이를 수 없는 너무나도 힘겨운 작업이다.
솔직히 글을 쓰면 쓸수록 글이 내게서 멀리 도망치는 걸 느낀다.
나는 타고난 글쟁이가 아니라는 걸 절감한다.
예전에 전주에 사는 친구를 만나 [혼불]의 작가 최명희 문학관에 간적이 있다.
작지만 아담하게 꾸며진 문학관 입구에 들어서는데 큰 글귀 하나가 눈에 확 들어왔다.
“나는 일필휘지(一筆揮之)를 믿지 않는다.”
글귀가 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온 몸에 전율이 흘렀다.
온 몸의 세포가 ‘맞아’, ‘그렇지’, 라고 함성을 질러댔다.
십년 묶은 체증이 확 가시는 것 같은 통쾌함이 밀려왔다.
그리고 친구와 함께 문학관을 둘러보며, 원고마다 지우고 덧붙이고 수정한 흔적들이 많은 것을 보며
최명희의 글쓰기가 얼마나 지난한 노동이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일필휘지를 하지 못해 위축되었던 나를 따사로이 감싸주었음은 물론이다.
그 후로 나는 잊지 않는다.
일필휘지를 믿지 않는 것이야말로 글 앞에 정직한 것임을.
글이란 오직 ‘끝없는 사고와 수정의 노동’임을.
나는 오늘도 “나는 일필휘지를 믿지 않는다”는 최명희의 고백에 용기를 얻어 감히 글을 쓴다.
글재주를 타고나지 못한 내가 지금껏 포기하지 않고 글을 가까이 하며 사는 것도
작가 최명희의 정직한 고백 덕분이다.
구원론 설교를 매만지다가 갑자기 작가 최명희가 생각난 것도 아마 그래서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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