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13년의 마지막 주일 예배입니다. 하루를 보장할 수 없는 우리의 인생길이기에 새롭게 시작한 한 해의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 겸손히 머리 숙여 감사하는 우리 모두에게 주님께서 평강과 기쁨을 내려 주실 줄 믿습니다.
'성지순례'(聖地巡禮, Pilgrimage to Holy Place)는 어떤 면에서는 '사지순례'(死地巡禮, Pilgrimage to Death Place)라 할 수 있습니다. 가는 곳마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성지순례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다 보면, 자연히 인생이 무엇인가를 질문하게 되고,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질문하게 됩니다. 성지순례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순례 여정 중에서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들어 준 곳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마사다(Masada)(사진 1)입니다. 사해 근처, 거대한 바위 기둥을 세워 놓은 것처럼 유대 광야의 한 복판에 우뚝 솟은 돌산입니다. 높이가 450미터(1300피트) 정도 되는데, 그 돌산의 정상은 평평하게 되어 있습니다. 뽀죡했던 산을 빙하가 지나가면서 깎아내어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그 결과, 길이가 약 600미터(1800피트)에 폭이 약 250미터(900피트) 정도 규모의 타원형 분지(사진 2)가 생긴 것입니다. 돌산의 경사는 매우 가파릅니다.
이 돌산의 가치를 알아본 사람은 헤롯 대왕이었습니다. 그는 권력을 지키는 일에 항상 불안을 느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신의 왕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로마 황실은 언제든지 자신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워낙 잔인하게 정적들을 해쳤기 때문에 언제든지 복수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위험이 닥칠 때를 대비해 비밀 궁전을 짓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마사다는 최상의 선택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주전 37년부터 6년 동안 정상에 작은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집과 곡식 창고 그리고 목욕탕 시설까지 마련했습니다(사진 3). 게다가 절벽을 파서 3층짜리 궁전을 만들었습니다(사진 4). 위기의 순간에 그곳에 피신하면 아무도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저는 마사다의 폐허를 돌아 보면서 수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땀과 피를 생각했습니다. 한 사람의 탐욕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킬 수 있는지를 절감했습니다. 힘없는 백성들이 의미 없는 공사에 동원되어 아까운 생명을 희생해야 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마음 아팠습니다. 헤롯 대왕과 그 주변에 있는 권력자들이 그곳에서 향락을 즐기는 동안,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그들을 위해 무거운 짐을 지고 그 높고 가파른 산을 오르내려야 했던가를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마사다의 슬픔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주후 66년, 유대인들이 로마 정부에 반란을 일으키자 로마 군대가 대대적인 진압 작전을 펼칩니다. 그 때, '시카리'(Sicarii)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유대인 테러 그룹이 마사다에 피신합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모두 960명이었다고 합니다. 4년 동안의 긴 전투 끝에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로마군은 마사다로 피신한 반군들을 진압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마사다 주변에 진을 치고 공략합니다. 하지만 깎아지른 높은 산에 성벽까지 세워져 있는 그 요새를 점령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로마군은 3년 동안 마사다 요새를 포위하고 여러 가지의 작전을 씁니다.
마침내 로마군은 마사다 정상에 이르는 인조 언덕(ramp)을 쌓습니다. 어떤 학자는 한 달 정도 걸렸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어떤 학자는 6개월 정도 걸렸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어떻든, 로마군은 인조 언덕을 통해 마다사 성을 공격하고, 유대인들은 죽을 힘을 다해 반격합니다. 그 싸움은 결국 로마군의 승리로 기울어졌습니다.
성을 거의 함락시킨 상태에서 로마군은 일단 후퇴를 합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다시 공격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날은 유대인들이 반격을 하지 않습니다. 성을 부수고 성안에 들어가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패색이 짙어지자 유다 반군의 지도자인 엘리아살 벤 아이르(Eleazar ben Yair)가 남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로마군에게 항복하거나 마지막까지 싸우다 죽는 길밖에 없다. 하지만 또 한 가지의 길이 있다. 영광스럽게 자결하는 길이다." 그 연설에 모두가 자결을 택합니다.
마음을 정한 그들은 먼저 모든 소유물을 모아 불태웁니다. 그리고 남자들에게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살해하게 합니다. 남자들만 남게 되자 제비를 뽑아 열 사람을 고릅니다. 그 열 사람이 남자들을 모두 살해합니다. 마침내 열 사람만 남자 다시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을 고릅니다. 그는 나머지 아홉 사람을 죽이고 자결합니다.
이 이야기는 영원한 비밀로 남겨질 뻔 했습니다. 그런데 비극적인 죽음의 잔치가 벌어지던 날, 두 명의 여자와 다섯 명의 어린 아이들이 동굴 속에 피신해 있었습니다. 로마군이 성에 들어가 수색을 하던 중에 그들이 발견되었고, 그들을 통해 영원한 비밀이 될 뻔했던 이야기가 전해진 것입니다. 최근에 이루어진 고고학 연구는 요세푸스의 기록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2.
죽음에 대해 특별히 깊게 생각하게 만들어 준 곳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므깃도(Megiddo)입니다. 이스라엘 땅에서 가장 비옥한 곳이 이스르엘 평야(Jezreel Valley)입니다. 유대 산지와 광야를 돌아보고 나서 지중해 가까운 북쪽으로 가다 보면 '이것이 같은 나라인가?' 싶을만큼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집니다. 어디를 보나 누런 황토빛만 보이던 산지와는 달리, 이곳은 푸른 평원과 산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이스라엘의 곡창지대라고 부릅니다. 그 평원의 한 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분지가 므깃도입니다.(사진 5)
므깃도는, 말하자면, 이스르엘 평원을 지키는 망대인 셈입니다. 이스르엘 평원을 가지면 이스라엘 전체를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또한 므깃도는 이집트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길목에 있습니다. 그래서 므깃도는 모든 권력자들이 탐을 내는 성이었고, 그래서 수 많은 전쟁이 이곳에서 벌어졌습니다. 고고학자들의 발굴을 통해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해도 스물 여섯 번이나 파괴되고 재건되기를 반복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곳에서 최소한 스물 여섯 번 전쟁이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완전히 파괴된 것만 따져서 그러니까, 작은 전쟁까지 따지면 백 번도 넘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6장 16절에 보면, '아마겟돈'(armageddon)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마지막에 우주적인 전쟁이 일어날 곳을 말합니다. 이 단어는 '므깃도 산'(Mount of Megiddo)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하르 므깃도'(Har Megiddo)에서 나왔습니다. 헬라어에는 자음 'h'가 없기 때문에 '아르므깃도'라고 읽고, 그것이 변하여 '아마겟돈'이 된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므깃도가 인류의 종말에 있을 최후의 전쟁터가 될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을 잘 못 해석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아마겟돈'은 지상의 어떤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모든 전쟁이 집약된 것 같은 참혹한 전쟁을 상징합니다. 그 전쟁은 지상의 전쟁이 아니라 우주적인 전쟁이 될 것입니다.
저희는 므깃도에 올라 남겨진 전쟁의 잔해들을 보았습니다. 눈이 닿는 곳마다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겼습니다. "이곳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까?" 생각하니, 착찹하고 우울하고 슬퍼졌습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온 우주보다 큰데,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우주가 깨어졌을까요? 그 중에는 인생의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어린 나이에 희생된 이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들로 인해 또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피눈물을 흘렸을까요? 과연, 그 많은 전쟁 중에서 생명을 바칠만한 전쟁이 얼마나 되었을까요? 의미 없는 전쟁을 위해 덧 없이 희생된 사람들의 인생은 누가 보상해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어디, 마사다와 므깃도 뿐이겠습니까? 이스라엘과 주변 국가의 어디를 가나, 죽음의 냄새를 맡고 피의 흔적을 볼 수 있었습니다. 현대의 기술로도 설명되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로마식 건축물들을 보면서 그것을 위해 희생된 이름 없는 백성들의 죽음을 생각합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는 페트라(Petra)의 무덤궁전을 보면서도 죽음을 생각합니다.(사진 7) 한 권력자의 죽음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돌산을 깎아 무덤 궁전을 만들었을까를 생각하니 피의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그토록 어리석은 탐욕의 상징물 앞에서 그 후손들은 조잡한 기념품을 팔아 생계를 잇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3.
마사다 정상의 폐허에 서서 그리고 므깃도에서 풍기는 진한 죽음의 냄새를 맡으며 혹은 페트라의 무덤 궁전을 보면서, 저는 진한 '허무감'을 느꼈습니다. 한 때 목숨을 바쳐서 싸웠던 그 싸움도 헛되고, 제왕과 장수들이 권력을 위해 몸부림 쳤던 것도 헛되며, 하늘을 찌를 듯한 개선 행진도 헛되고, 금으로 장식한 화려한 보좌도 헛됩니다. 결국은 모든 것이 잿더미로 돌아가고, 모든 생명은 죽음으로 돌아갑니다.
당시에 목숨을 걸고 싸웠던 사람들이 오늘의 폐허를 와 본다면 뭐라고 할까 싶었습니다.
지난 목요일, 성탄 전야 예배와 성탄일 예배로 여념 없이 보내고는 다음 날 아침 저는 홀로 예배실 앉아 <전도서>를 읽었습니다. 저의 육신은 지쳐 있었고, 영혼은 텅 빈 것 같았습니다. 그 많던 행사는 다 지나갔고, 사람의 발걸음은 뚝 끊어졌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말씀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고, 예배실 가득 성도들이 모여 찬송을 드렸건만, 그 모든 것이 꿈인 듯, 예배실 안은 적막했습니다. 그곳에 홀로 앉아 <전도서>를 펼쳐서 1장부터 12장까지 소리내어 읽었습니다. 아, 구구 절절 어쩌면 그렇게도 마음에 와 닿을까요!
<전도서>는 솔로몬 임금이 쓴 잠언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인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왕들 중에서 부귀영화를 가장 많이 누린 사람입니다. 그가 인생의 말년에 이런 잠언집을 남겼다고 추정하는 것은 매우 그럴 듯한 일입니다. 솔로몬은 그 유명한 '허무함'(Vanity)의 선언으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전도자가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1:2)
이것은 인생에 실패한 사람이 한 말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인생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을 다 이루고 누릴 것을 다 누려 본 사람이 하는 말입니다. 2장에서 솔로몬은 이렇게 말합니다.
원하던 것을 나는 다 얻었다.
누리고 싶은 낙은 무엇이든 삼가지 않았다.
나는 하는 일마다 자랑스러웠다.
이것은 내가 수고하여 얻은 나의 몫인 셈이었다.
그러나 내 손으로 성취한 모든 일과
이루려고 애쓴 나의 수고를 돌이켜 보니,
참으로 세상 모든 것이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고,
아무런 보람도 없는 것이었다. (10-11절)
이스라엘 사람들은 솔로몬을 위대한 임금으로 추앙하고 있지만, 그도 역시 거대한 탐욕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 당했을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솔로몬이 살아있을 당시, 그는 신과 같은 존재요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그도 결국은 죽음 앞에서는 두 손을 들어야 했습니다. 당대에는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있어 보였지만, 몇 십 년 지나지 않아 결국은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 솔로몬은 그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같은 운명을 타고 났다.
의인이나 악인이나,
착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깨끗한 사람이나 더러운 사람이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나 드리지 않는 사람이나,
다 같은 운명을 타고 났다.
착한 사람이라고 해서 죄인보다 나을 것이 없고,
맹세한 사람이라고 해서
맹세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다. (9:2)
그렇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평등합니다. 물론, 억울한 죽음도 있습니다. 너무 이른 죽음도 있고, 너무 안타까운 죽음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권력을 가진 자도, 돈을 가진 자도, 지혜를 가진 자도, 모두 죽음 앞에서 무력해집니다. 이집트의 왕들은 죽음 이후에도 권력을 누리기 위해 거대한 무덤을 만들고 그 안에 산 사람을 매장하기도 했습니다만, 그것으로 그의 죽음 이후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곤 하지만, 그것도 알고 보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전도서>는 마사다 정상의 돌 더미 가운데서, 혹은 므깃도의 폐허 가운데서, 혹은 페트라의 무덤 궁전 앞에서 읽으면 제 맛일 것 같습니다. 거기까지 갈 수 없다면, 가까운 공동묘지 가운데 자리를 잡고 읽어 볼만 합니다. 시간으로 따지면, 지금같이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하는 시점에서 읽어 볼만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리내어 읽는 데 30분이면 충분합니다. 해가 지나기 전에 한 번씩 읽고 묵상해 보시기를 청합니다.
4.
인생이라는 것이 결국 이렇게 허무하게 되는 것이라면, 과연 어떻게 살면 좋겠습니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설교를 시작한 솔로몬은 독자에게 어떻게 살라 합니까?
인생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그 결과는 크게 두 가지의 인생관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허무한 인생이니 살아야 할 이유도 없다는 인생관입니다. 아더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같은 '허무주의자들'(the nihilists)이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산다는 것은 고통을 겪는다는 뜻이므로 일찍 죽는 것이 가장 행복한 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인생이 허무하니 할 수 있는 한 즐기는 것이 최고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쾌락주의자들'(the epicureans)이라고 말합니다. 기왕에 한 번 살다 가는 것이니 마음껏 즐기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전도서>를 읽다 보면 허무주의나 쾌락주의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오해입니다. 허무주의와 쾌락주의는 동일하게 무신론의 근거 위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고 인생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니, 살 가치가 없어 보이거나 마음껏 즐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것입니다.
반면, 솔로몬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라고 고백한 이유는 인생의 말년에 하나님의 현존을 더 분명히 깨닫고 그 앞에 겸손히 고개 숙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 그분이 지으신 인생이 어떤 것인지를 알자, 탐욕에 눈이 멀어 하나님을 잊고 위대한 일들을 이루기 위해 분심하던 자신의 과거가 헛되어 보였던 것입니다. 인생 자체가 허무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 이끌려 무엇인가 이루어보기 위해 몸부림 친 것이 허무하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인생의 허무감을 느끼고 쾌락주의나 허무주의에 흐르지 않고 오히려 참되고 영원한 인생관을 찾습니다. 인생의 허무함을 느낄 때마다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 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전도서>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젊을 때에
너는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고생스러운 날들이 오고,
사는 것이 즐겁지 않다고 할 나이가 되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기 전에,
먹구름이 곧 비를 몰고 오기 전에,
그렇게 하여라. (12:1-2)
<전도서>는 솔로몬이 쓴 회개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섬긴다고는 했지만 너무도 자주 자신의 탐욕을 위해 살았던 과거에 대한 회개입니다. 자신의 탐욕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피를 보았는지, 얼마나 많은 가정이 파괴되었는지, 얼마나 많은 자원이 허비되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죄악을 저질렀는지를 깨닫고 회개하고 있습니다. 후손들이 자신과 같이 허망하고 후회스러운 삶을 살지 않기 바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젊을 때 진실로 창조주를 기억하고 살았다면, 솔로몬은 달리 살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았을 것입니다. 위대한 일이 아니라 의미있는 일을 꿈꾸웠을 것입니다. 최고가 아니라 최선을 위해 살았을 것입니다. 거대한 일이 아니라 참된 일을 마음에 품었을 것입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기억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남들보다 높아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들과 함께 살기 위해 힘썼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솔로몬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영화를 누린 임금'이 아니라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임금'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빈다. 임금이 최고의 영화를 누렸다는 말은 칭찬이 아니라 욕입니다. 임금의 영화의 정도는 그가 저지른 죄악의 정도와 비례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헛된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 돌아 온 사람 혹은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모든 것이 헛된 것을 깨달은 사람은 이렇게 삽니다. 그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자족합니다. 위대한 일을 이루기 위해 분심하지 않습니다. 미래의 성공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지 않습니다. 큰 것을 이루기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업적을 통해 인정받기를 구하지 않습니다. 보란 듯이 성공하기 위해 자신과 이웃을 들볶지 않습니다. 다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뜻을 따라 하루 하루 정성을 다해 살아갈 뿐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의 모습을 솔로몬은 이렇게 정리해 두었습니다.
그렇다. 우리의 한평생이 짧고 덧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니, 세상에서 애쓰고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요, 좋은 일임을 내가 깨달았다. 이것은 곧 사람이 받은 몫이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와 재산을 주셔서 누리게 하시며, 수고함으로써 즐거워하게 하신 것이니, 이 모두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니, 덧없는 인생살이에 크게 마음 쓸 일이 없다. (5:18-20)
"애쓰고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보고 싶어 하시는 인생이랍니다. "허무한 인생이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매일 주어지는 시간을 의미와 보람과 기쁨으로 채우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 그 뜻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분투하지 않고 모두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5.
요즈음 한국에서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인사말이 유행하는가 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안녕들 하십니까? 요즈음 어떻게 지내십니까? 다 사정은 다르겠지만, 그래도 오늘 이 자리에 오셨으니, 잘 하셨습니다.
저의 Face Book을 통해 어느 교우께서 올린 영상을 보았습니다. 한국에서 꽤 잘 나가는 인기 강사 김창옥 교수의 강연 영상입니다. 그는 방송, 학교, 기업 그리고 종교 기관에 초청 받아 다니는 인기 강사입니다. 청중을 울리고 웃기며 감동을 줍니다. 그런데 그렇게 치열하게 노력하다 보니 우울증이 생겨났습니다. 대중 앞에서 항상 밝고 유쾌한 모습으로 행동하다 보니, 내면의 자아가 지친 것입니다.
여러 경로를 통해 도움을 찾던 중에 프랑스의 어느 수도원에 들어가 침묵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일 주일 정도 침묵 가운데 산책하고 묵상하고 기도하고 쉬던 어느 날의 일입니다. 그 날도 산책을 하다가 어느 벤치에 앉아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는데, 문득 내면에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그래, 여기까지 잘 왔다." 그 생각이 드는 순간,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고 합니다. 그것이 우울증을 치료하는 전환점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까지 잘 오셨습니다. 올 해가 지나가기 전에 꼭 시간을 내시어 고군분투하며 오늘까지 버티어 온 자신을 칭찬해 주시기 바랍니다. 승승장구한 분도, 평탄한 삶을 산 분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어려움을 당한 분도,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 칭찬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때로는 욕심도 부렸고, 실패도 했고, 화를 내기도 했겠지요? 때로는 땅이 꺼지는 것 같기도 했고, 세상의 모든 빛이 사라져 흑백 세상처럼 보이기도 했을 겁니다. 삶의 줄을 놓고 싶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모든 우여곡절을 거쳐서 여기까지 오느라고 제일 힘들었던 사람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아낌 없이 칭찬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새해를 맞으면서 솔로몬이 전해주는 지혜의 말씀에 귀기우리십시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십시다.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항상 기억하십시다. 매일 주님과 함께 동행하기를 힘쓰십시다. 그러면 헛된 일에 마음 쓰지 않을 것입니다. 헛된 일에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거대한 일을 이루려고 버둥대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받기 위해 두리번거리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일을 당해도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절망하거나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우쭐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매일 주어지는 일에 성실하며, 오늘 하루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또 한 해를 살기가 훨씬 쉬워질 것입니다. 아니, 주님과 함께 하기에 오늘을 즐기며 내일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을 통해 하늘의 평화는 이 세상으로 흘러 나갈 것입니다. 그렇게 산다면, 오는 새해를 마감할 때, 기진맥진하여 "그래, 여기까지 잘 왔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감사와 기쁨으로 마음 가득하여 "주님, 또 한 해를 잘 지났습니다.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이 기가막힌 은총이 저와 여러분에게 늘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
주님은 저희를 품으시고 돌보십니다.
하지만 저희는 그것을 모르고,
잘 살아 보겠다고
저희 스스로 몸부림을 칩니다.
그렇게 여기까지 왔습니다.
오, 주님,
지치고 피곤해진 저희의 영혼을
하늘의 이슬로 적셔 주시어
새 힘을 얻게 하소서.
저희를 품으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을 믿고
분복에 만족하며
매일의 삶에 신실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매일 주님 주시는 행복을 누리며
또 그 행복을 전하며 살게 하소서.
아멘.
'좋은 말씀 > 김영봉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리 없이 강한 헌신" (이사야 42:1-4) (0) | 2017.03.10 |
---|---|
"첫 사랑의 기억" (요한복음 21:15-17) (0) | 2017.03.07 |
"신실한 소수자"(마태복음 2:1-12) (0) | 2017.03.01 |
"성탄에 묵상하는 십자가" (빌립보서2:6-11) (0) | 2017.02.27 |
"예수가 아니면"(마태복음 16:13-20) (0) | 2017.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