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영봉목사

"첫 사랑의 기억" (요한복음 21:15-17)

새벽지기1 2017. 3. 7. 22:48


1.

Happy New Year!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교우 여러분의 영혼 위에 그리고 가정과 직장 위에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로 '성지묵상 연속설교'를 마칩니다. 그동안 함께 순례를 하는 심정으로 경청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의 일생에 있어서 중요한 지명이 몇 군데 있습니다. 태어나신 베들레헴, 자라신 곳 나사렛, 세례 받으신 요단 강, 금식하며 기도하신 유다 광야, 공적 활동을 시작하신 갈릴리 그리고 죽음 당하신 예루살렘입니다.

오늘은 갈릴리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갈릴리는 베들레헴이나 나사렛 같은 동네 이름이 아닙니다. 미국으로 따지면 주(state)에 해당한다 할 수 있습니다. 한 주 안에 여러 동네가 있듯, 갈릴리 안에 수백개의 동네가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갈릴리의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내십니다.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시기 전까지 그분이 어떻게 사셨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분은 평범한 목수로 사시다가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시고는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유다 광야에 나가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십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세례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는 나사렛을 떠나 갈릴리 호수 근처의 가버나움에서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저희 일행이 갈릴리 호수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뉘엿 뉘엿 넘어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숙소에서 호수까지 반 마일 정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짐을 풀고 저녁 식사로 모일 시간까지 여유가 있어서 호수가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호수에는 갈대가 촘촘히 자라 있었고, 호수 위로는 하얀 달이 떠 있었습니다.

주변은 한적했고 고요했습니다.

저는 아내와 떨어져 홀로 그 호수가에 섰습니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몇 번 했습니다. 그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식과 평안이 제 마음을 채웠습니다. 마치 번잡한 도시의 삶에서 벗어나 고향에 온 느낌이었습니다. 이곳이 바로 주님께서 걸으시고 말씀하셨던 그곳이라고 생각하니 거룩한 전율이 제 몸을 스쳤습니다.

이상하게도,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걸으셨던 '비아 돌로로사'를 걸을 때보다 주님의 임재를 더 친밀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제 묵상을 방해했지만, 갈릴리 호수가에서는 아무 것도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호수가 벤치에서 눈 감고 묵상하는데, 마치 예수께서 옆에 앉아 계신 것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곳에 앉아 한참을 기도했습니다.


2.

갈릴리는 예수님에게나 제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곳입니다. 첫 사랑의 기억이 서린 곳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처음 만나시고 부르신 곳이 갈릴리입니다. 제자들마다 주님을 만난 경위가 다르고 주님을 따라 나선 동기가 달랐으니, 오늘은 베드로의 경우만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어떻게 만나주셨고 또한 베드로는 어떻게 주님을 따라 나서게 되었습니까? 그 첫 사랑의 이야기가 누가복음 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날, 어부로 잔뼈가 굵어진 베드로는 동료들과 함께 호수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밤, 밤새도록 허탕만 쳤습니다. 빨리 정리하고 집에 가서 쉬려고 했는데, 낯선 사람이 다가옵니다. "잠시 배를 사용해도 되겠느냐?"고 물으셔서 그렇게 하라고 했더니, 그분은 배에 오르셔서 해변에 모인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십니다. 베드로는 그물을 손질하면서 말씀에 귀 기우립니다. 전에 들어보지 못한 말씀이었습니다. '이분은 누구신데 저런 말씀을 하시나?' 베드로는 그분의 정체가 궁금해졌습니다.

설교를 마친 후, 그분은 베드로에게 말을 거십니다.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눅 5:4) 베드로는 거부할 수 없는 권위를 그분에게서 느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5절)라고 대답하고는 배를 저어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립니다. 얼마 후, 그물에 손을 댄 베드로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힌 것입니다. 그 때, 베드로는 그분이 누구신지 깨달았고, 그 날로 그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예수님 사이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도 수제자로 인정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 모두와 함께 할 수 없을 때에도 베드로와 다른 두 제자만큼은 옆에 두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특별한 사랑과 신뢰를 감사했고 그래서 몸을 바쳐 충성을 다했습니다. 목숨까지도 주님께 드리고 싶었습니다. 진실한 사랑을 경험하면 자신의 것을 다 주고 싶어지는 법입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이라고 예고하셨을 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비록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나는 절대로 버리지 않겠습니다. (마 26:33)

이 얼마나 대단한 사랑의 고백입니까? 이 때, 베드로는 진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뜨거운 사랑의 고백에 찬 물을 끼얹으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오늘 밤에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34절). 이 대답에 베드로는 발끈합니다. "내 진심을 그렇게도 모르십니까?"라는 뜻으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절대로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35절)

베드로에게는 그럴 자신이 있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시간 후, 베드로는 가야바 법정에서 자신의 사랑의 실상을 목도합니다. 예수님이 재판을 받는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는데, 어느 여종이 다가와 "당신도 예수와 한패지요?"라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엉겁결에 아니라고 대답했고, 계속되는 질문에 거듭 부인합니다. 한 번은 실수라고 할 수 있지만, 두 번, 세 번 그렇게 했을 때는 실수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세 번째 부인할 때는 저주까지 퍼부었습니다. 그 때 닭이 울었고, 베드로는 어둠 속으로 나가 심하게 통곡했습니다.


3.

베드로는 생명을 바치기까지 예수님을 사랑하고 싶었지만 초라하게 실패했습니다. 상상하지 못했던 그 참담한 실패로 인해 그는 절망에 빠졌을 것입니다. 모든 의욕과 열정이 한 순간에 증발되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사람 낚는 어부'로서의 꿈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3년 동안 그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그 모든 열정이 차갑게 식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사랑했던 제자들 또한 주님을 사랑한다던 제자들이 모두 사라지고 난 자리에서 주님은 외롭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십니다.

예수께서 무덤에 장사된 지 사흘째 되는 날, 그분을 가까이 따르던 여인들이 무덤을 찾습니다. 그들은 무덤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았고, 그 안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당황하고 두려워하던 여인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말을 건넵니다. 천사는, 예수께서 예언하신대로 부활하셨다고 전하면서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전하기를,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 나셔서,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그들은 거기서 그를 뵙게 될 것이라고 하여라. (마 28:7)

주님께서 왜 갈릴리로 가셨을까요? 왜 제자들을 갈릴리로 부르셨을까요? 첫 사랑의 장소로 부르신 것입니다. 위기에 빠진 부부가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 처음 만났던 장소를 찾곤 하지요. 처음 만났던 장소로 돌아가 처음 서로를 만났을 때의 감정을 회복하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첫 사랑의 기억이 서린 곳으로 부르십니다.

베드로는 여인의 말대로 갈릴리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습니다. "갈릴리에서 너희를 만날 것이다"라는 말은 "조지아에서 너희를 만날 것이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갈릴리 그 넓은 땅에서  어디로 가야 그분을 만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는 수 없이, 베드로와 그 일행은 갈릴리 호수로 돌아갑니다. 아, 그런데 바로 그곳이 주님께서 생각했던 그곳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갈릴리 호수에서 첫 사랑을 회복하는 이야기입니다.

갈릴리 호수로 돌아온 베드로는 고기를 잡고 싶어졌습니다. 3년이 넘게 손을 놓았던 일입니다. 복잡한 심사를 달래는 데는 육체 노동이 적격입니다. 베드로는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한 머리와 마음을 잠시라도 비우기 위해 배에 오릅니다. 주님을 만날 때까지 할만한 일은 그것 밖에 없었습니다.

아, 그런데 도무지 고기가 잡히지 않습니다. 아무리 3년 동안 손을 놓았다고 해도 그렇지. 초보자도 몇 마리쯤은 잡는 법인데, 어찌 한 마리도 그물에 걸리지 않는가 말입니다. 모처럼 머리를 식히려고 그물을 잡은 것인데, 오히려 심사가 더 뒤틀렸을 것입니다.

새벽이 되어 고기 잡기를 포기하고는 호수가로 돌아와 그물을 정리합니다. 그 때,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건넵니다. "무엇을 좀 잡았습니까?" 베드로와 그 일행은 지나가는 행인인 줄 알고 눈길도 주지 않고 "아무 것도 못 잡았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 보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그 말에 멈칫 했을 것입니다. 3년 전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의 마음에 "혹시?" 하는 의문이 떠올랐지만, 금새 머리를 흔들어 떨쳐 버렸을 것입니다.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속는 셈치고 배 오른쪽에 그물을 던집니다.

잠시 후, 잡아 올리려고 그물에 손을 댔을 때 베드로는 깜짝 놀랍니다. 그물이 묵직해졌습니다. 끌어 올리려니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그 때, 요한이 베드로에게 외칩니다. "저분은 주님이시다!" 베드로도 그런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물을 던지기 전에 "혹시?" 했는데, 그물이 가득 찬 것을 발견하는 순간, "그렇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너무도 반가운 나머지 물로 뛰어 들어 주님께 달려갑니다.


4.

예수님과 베드로 그리고 제자들은 잡은 생선을 구워 해변가에서 아침 식사를 나눕니다. 저희 일행도 갈릴리 호수 근처에서 소위 '베드로 고기'(Peter's Fish)라는 이름의 생선 맛을 보았습니다. 생선 한 마리로 한 끼 식사가 충분했습니다.

식사를 마친 다음, 예수님은 베드로를 따로 불러내십니다. 아마도 둘이서 해변을 걸었는지 모릅니다. 한 참을 말 없이 걸으시던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15절)

예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면서 당신이 지어주신 새 이름 '베드로'가 아니라 원래의 이름 '시몬'을 사용하십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뜻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랑에 대해 물으십니다. 원어를 보면, "아가페이스 메?"(agapeis me)라고 질문하십니다. 헬라어 '아가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질문은 이렇게 풀어 쓸 수 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내가 너를 사랑한 것처럼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Simon, son of John, do you love me as I love you?
 
이 질문을 들었을 때 베드로의 온 몸은 식은 땀에 젖었을지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신을 사랑하셨는데, 주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 너무도 허망하게 깨어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15절)

우리 번역만으로 보면, 베드로가 "예"라고 대답한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원문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아가페이스 메?"라고 물으셨는데, 베드로는 "필로 세"(philo se)라고 대답합니다. 헬라어 '필리아'는 형제간의 우정 혹은 친구간의 우정과 같은 인간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깨어지기 쉬운 인간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이렇게 답한 셈입니다.

제가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신 것처럼 주님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You know that I am not able to love you as you love me.

이렇게 대답하는 베드로의 마음은 떨렸을 것입니다. 자신의 대답이 주님을 실망시켰을 것이라고 짐작했을 것입니다. "너는 아직 그 정도밖에 안 되느냐? 왜 이리도 못 났느냐?"라고 꾸중하실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부드러운 눈길로 베드로의 떨리는 눈동자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여라."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눈물을 왈칵 쏟았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참혹하게 실패한 자신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사랑에 부족한 자신을 믿고 일을 맡기시겠다는 겁니다. 그 따뜻한 말 한 마디에 얼어붙었던 베드로의 마음이 녹아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두 번 더 그의 사랑을 확인하시고 그에게 양들을 돌보라고 부탁하십니다. 베드로가 세 번 실패한 것을 생각하고 세 번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질문은 "내가 너를 사랑한 것처럼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질문은 "네가 내 사랑을 아느냐?"는 질문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첫 사랑의 장소로 다시 불러 십자가에서 드러난 당신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가 '고기 낚는 어부'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고 '사람 낚는 어부'로 다시 시작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주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고 체험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가야바 법정에서 예수님을 부인한 이유는 예수님의 사랑을 다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직 그는 십자가를 보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갈릴리 호수로 다시 불러 십자가에서 완성된 당신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품고 있으면, 실패도, 낙심도, 탈진도 없을 것입니다. 상처 받는 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받는 어떤 상처도 주님의 사랑이 치유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사랑을 품고 다시 시작하도록 베드로를 격려하고 계십니다.


5.

오늘의 이 사건이 일어난 곳에 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 교회를 '베드로 수위권 교회'(the Church of the Supremacy of St. Peter)라고 부릅니다. 천주교회에서는 베드로가 제자들 중에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고 그 권위를 교황이 이어받았다 하여 베드로에게 '수위권(首位權, the supremacy)을 부여합니다. 그래서 이름이 그렇게 붙여졌습니다.

그 교회가 세워진 자리가 정말 그 사건이 일어난 자리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이것도 역시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그 근처 어느 곳에서 일어난 일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니 그렇게 여기면 됩니다.

저희 일행은 교회 앞에 있는 호수가 모래밭에서 잠시 산책하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첫 사랑의 기억을 회상했습니다.(사진 4) 눈을 감고 주님께서 베드로와 함께 걸으시면서 말씀하시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참담한 실패로 인해 좌절과 실망에 빠져 있던 베드로, 그 지치고 상한 심령을 격려하시며 첫 사랑을 회복시키시는 주님의 인자한 눈빛을 상상했습니다.

그 때, 제게도 바로 그 사랑과 눈빛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첫 사랑의 장소로 부르셨듯, 저를 첫 사랑의 장소로 데려 오셨음을 깨달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저의 삶과 목회를 어떻게 볼지 모르지만, 저 자신은 최근 들어서 제가 이 일에 부적격자라는 느낌에 자주 사로잡혔습니다. 와싱톤한인교회에서의 목회가 이제 9년째를 접어 들어가고 있는데, 처음에 가졌던 자신감은 다 사라져 버리고, 앞으로 남겨진 시간 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착찹한 심정이었습니다. 제게 몇 년의 시간이 남겨져 있는지는 모르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완주하고 싶은데, 그럴만한 에너지가 제게 없는 것 같았고, 에너지가 있다 한 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심정이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주님을 구했습니다. 베드로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저에게도 첫 사랑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이 아니고는 이 길을 계속 갈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며, 제게 있는 사랑은 너무도 깨어지기 쉬운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십자가에서 드러난 그분의 사랑을 새롭게 체험하는 것밖에는 제 사랑을 고칠 방법이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혹시나, 믿는다고는 하지만 첫 사랑이라 할만한 체험이 없는 분이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만나지 못하여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사십니까? 주님과 나눈 사랑의 경험이 없으십니까? 십자가 앞에서 무너져 본 적이 없으십니까? 부디, 영원하신 분과의 사랑에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얼마나 삶을 달라지게 만드는지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지식이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영원한 사랑을 체험하고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6.

얼마 전, 우리 교회 교우 중 한 분에게서 사랑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의 허락을 받고 그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분은 매사에 모범생으로 자랐고 또한 그렇게 살았습니다. 열심히 하면 무엇이든 이루었기에 신앙 생활에 있어서도 열심히 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큐티며 성경읽기며 성경공부며 교회 봉사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성장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열심과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는듯, 기도할 때마다 마치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다 마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주님을 영접한 후에 주님께서 그의 삶을 인도해 주신다는 것을 여러 가지로 경험하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특별히, 십자가의 은혜가 마음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다음은 그분이 제게 보내 주신 영성일기의 한 부분입니다.

지금까지 십자가 그 사랑이 내게 크게 다가오지 못하고 그냥 문자적으로만 이해가 되었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인해 우리가 죄인이라는 말씀도 크게 다가오지 않았고, 십자가 그 보혈은 나의 죄를 사하기 위해 흘린 피라는 말씀도 은혜가 되지 않았다. 다만, 일반적으로 우리 인간들의 죄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큰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십자가를 묵상해도 진정한 은혜로 다가오지 못하고 그저 배운 교리로만 이해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요즘 내 안에 있는 죄들이 자꾸 보였다. 내가 그 동안 깨닫지 못하고, 이 정도는 죄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들이 아주 무거운 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점잖음과 친절함과 선한 미소로 포장하고 위장해 왔던 나의 악한 본성들이 자꾸 보였다. (중략) 내 안에 이렇게 더러운 죄들이 쌓여 있는지를 모르고, 나는 다른 사람보다는 가벼운 죄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으니, 십자가 그 보혈이 크게 은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자신의 죄성에 대해 눈 뜨게 되고 그 죄성의 무게가 점점 커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자매에게 사랑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분의 일기를 계속 읽습니다.

새벽에 일어나면서 전날 제자반에서 불렀던 찬양 "정결한 영을 주시옵소서"라는 찬양이 나왔다. 새벽기도회에 나가서 기도하다가 눈을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슬픈 기분도 아니었는데 왜 이럴까? 이 갑작스러운 눈물은 무엇일까 생각하고 있는데, 걷잡을 수 없이 눈물과 콧물이 흘러 나왔고,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라는 기도가 입에서 계속 나왔다. (중략) 이제야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게 되었다. 오늘 아침 바라본 십자가가 이제는 일반적인 '우리의' 대속의 십자가가 아니라 '나의' 죄를 대속하신 보혈의 십자가로 느껴졌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드러난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며, 그 사랑을 품고 사는 것이며, 그 사랑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고, 그 사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아직도 이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신 분들에게 주님의 성령이 임하셔서 이 자매와 같이 '나를 향한 사랑'을 경험하는 황홀한 순간을 맞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미 이와 같은 첫 사랑의 경험을 거친 분들이 더 많으실 것입니다. 그 사랑이 지금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아직 그 사랑으로 설레고 있습니까? 그 사랑 때문에 사랑의 수고를 기쁘게 감당하고 있습니까? 혹시나,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여 베드로처럼 고기나 잡겠다고 뒤돌아서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낙심하고 좌절하고 탈진한 상태에 계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새해 첫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첫 사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면 됩니다. 그 사랑만 우리 안에 살아 있으면, 우리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사랑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첫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의 갈릴리로 돌아갑시다. 그리고 기도하십시다. 주님께서 우리를 만나 주시고 사랑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올 한 해도 뜨겁게 사랑하며 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랑의 주님,
십자가에서 드러난 그 사랑을
알기 원합니다.
그 사랑으로 살기 원합니다.
그 사랑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저희를 갈릴리로 불러 주시어
그 따뜻한 눈빛을 보게 하시고
그 사랑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