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영봉목사

"소리 없이 강한 헌신" (이사야 42:1-4)

새벽지기1 2017. 3. 10. 07:19


1.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의 다양한 욕구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강한 것 중 하나가 인정 받으려는 욕구입니다. 누구에겐가 인정을 받으면 살 가치를 느낍니다. 특별히 자신에게 중요한 사람에게 받는 인정은 그만큼 더 강한 만족을 줍니다. 그런 점에서 부모가 자녀를 인정해 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부모에게 충분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자랐기에 다른 사람의 인정에 집착하는 현상을 심리학에서는 '파에돈 콤플렉스'(phaethon complex)라고 부릅니다.

인간은 의식이 발달되기 이전에도 자신이 인정받고 있는지 거부 당하고 있는지를 안다고 합니다. 아니, 태중에서부터 그렇게 느낀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인해 태어난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문제를 많이 겪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하지요. 태중에 있을 때 가장 가까이 있는 엄마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겁니다. 어린 아이에게는 엄마가 세계의 전부입니다. 그러니 엄마가 환영받지 못하는 아이는 온 세상으로부터 거부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태어나고 나서도 인정받고 사랑받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존감(self-esteem)이 꺠지고, 그래서 문제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새 생명에 대해서는 환영하고 사랑하고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생명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어떤 조건에서든 새 생명을 환영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임신했을 동안만이 아니라, 태어나서 자라는 동안에도 늘 그 태도를 지켜야 합니다. 부모의 가장 우선적인 책임은 자녀들이 살아야 할 이유와 가치를 느끼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요즘 부모들은 물질적인 환경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더 중요한 것은 아이의 존재 자체를 받아 주고 사랑해 주며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인정을 받으면서 부모를 뛰어 넘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부모님의 인정은 자식에게 중요하지만, 자식의 머리가 커가면서 그 무게는 점점 줄어듭니다. 그리고는 부모님의 인정을 대신할만한 인정을 찾습니다. 스승의 인정으로 대신하는 사람도 있고, 직장 상사의 인정으로 대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대중의 인기로 그것을 대신하기도 하고, 친구들의 인정으로 대신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찌보면, 인간은 죽을 때까지 인정을 구하며 산다 할 수 있습니다. 인정받지 못하면 더 이상 살 이유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인정에 목 매고 삽니다. 그런데 인정 받는 것에 대한 우리의 욕구는 마치 바닦없는 구멍과 같아서 아무리 받아도 만족을 모릅니다. 또한 사람에게서 받는 인정이라는 것이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인정에의 욕구는 우리를 만족시킬 가능성보다 좌절하게 만들고 비참하게 만들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그래서 때로 스스로 목숨을 취하는 사람도 있고, 포기하고 되는대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면 갈수록 이러한 경향이 더 강해지는 것 같아서 참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질기고도 질긴 인정에의 욕구는 하나님을 잊은 데서 오는 증상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알고 보면,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인 우리에게 부모보다 더 가깝고 더 중요한 분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부모가 세상의 전부입니다만,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나면 그분이야말로 세상의 전부임을 깨닫습니다. 따라서 그분에게 인정을 받으면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서 인정을 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분의 인정과 사랑은 '파에돈 콤플렉스'까지도 완치할 수 있습니다.


2.

오늘 우리는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Lectionary)에 맞추어 이사야서 42장 1절부터 4절을 읽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사는 사람을 만납니다. 1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종을 보아라.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사람이다.
내가 택한 사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가 뭇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아들이나 딸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식을 소개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내 아들이요!"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자랑스럽게 당신의 종을 소개하십니다. 그러면서 세 가지의 단어를 사용하여 종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드러내십니다.

첫째, "내가 붙들어 주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은 세상을 다 가진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둘째, "내가 택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눈에 들었다니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셋째,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잘 해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를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도대체 이 종은 누구이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이렇게 전폭적인 신뢰와 인정을 받는 것일까요?

이사야를 통해 이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은 이 종의 정체에 대해 질문해 왔습니다. 42장 이후에도 이 종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옵니다. 그래서 그것을 '야훼의 종의 노래'(The Songs of the Servant of YHWH)라고 부릅니다. 어떤 학자는 이 종이 선민 이스라엘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고, 또 어떤 학자는 이스라엘의 왕을 가리킨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노래가 바로 당신에 대한 노래라고 믿었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일어난 사건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 때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하나는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그분에게 임하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신 것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막 1:11)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말씀은 이사야의 예언 중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이 두 사건은 예수님이 바로 이사야가 예언한 야훼의 종임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을 예수님에게 내려 주시고 사랑의 음성을 들려 주심으로써 전폭적인 신뢰와 인정을 표현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 말씀은 예수님에게 가장 중요한 말씀 중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이 말씀을 자주 묵상하셨을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할 때 그것이 그분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를 주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폭적인 인정을 받았는데,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이제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오직 주어진 사명에 전념하면 됩니다.


3.

아, 주님께서 어떻게 그토록 의연하고 견고한 걸음으로 갈릴리에서 골고다까지 걸어갈 수 있었는지를 알 것 같습니다. 그분은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실하셨습니다. 그분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환호할 때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이적을 행한 다음 사람들이 그분을 주목한다 싶으면 종적을 감추셨습니다. 사람들의 인기에는 도무지 마음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주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 (요 5:41)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여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줄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자를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요 6:27)


얼마나 분명합니까? 그런 까닭에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을 노리는 어떤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유일한 두려움은 성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는 일이었습니다. 그 외에는 어떤 것도 그분을 흔들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바리새파 사람들이 와서 헤롯 왕이 해치려 하니 몸을 숨기라고 충고를 합니다. 그 때 이렇게 답하십니다.

가서, 그 여우에게 전하기를 "보아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 하여라.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눅 13:32-33)

이것이 주님이 사는 방법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의  2절과 3절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소리 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거리에서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할 것이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

사람들의 인정에 목마른 사람들은 서두릅니다. 억지를 부립니다. 무리합니다. 부산합니다. 시끄러운 소리를 냅니다. 목소리를 높입니다. 어떻게든 인정 받기 위해서 몸부림을 칩니다. 튀고 싶어하고 뜨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은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진리의 힘을 믿습니다. 사랑의 힘을 믿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힘을 믿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도 조급해지지 않습니다.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도 불안해지지 않습니다. 차분히, 겸손히, 부드럽게, 낮은 자세로 하나님의 뜻을 섬길 뿐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만만해 보입니다. 약해 보입니다. 쉽게 넘어뜨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시해도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은 가장 강한 사람입니다. 과거에 어느 자동차 선전의 카피 중에 "소리 없이 강하다"는 것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쇠하지 않으며,
낙담하지 않으며,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울 것이니,
먼 나라에서도 그의 가르침을 받기를
간절히 기다릴 것이다.

사람들의 인정에 목마른 사람들은 대단한 것을 이룰 것 같아 보입니다. 남보다 빠른 것 같습니다. 강해 보입니다. 하지만 실은 정반대입니다. 그들은 쉽게 지칩니다. 결과로 인해 쉽게 낙담합니다. 쉽게 부러집니다. 스스로 목숨을 취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사람들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코 지치지 않고, 낙심하지 않으며,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삶 속에서 증명되었습니다. 
 

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혹시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두리번 거리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채워지지 않는 인정에의 욕구 때문에 끊임없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혹은, 어떤 방법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인정에의 욕구에 시달리다 지쳐 이제는 자기 안에 갇힌 완고한 고집쟁이가 된 것은 아닙니까? 우리도 예수님처럼 살 수는 없을까요? 그분처럼 하나님에게서 인정을 받고 마치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고 주어진 소명에 충실하게 살아갈 수는 없을까요?

"아, 그거야 예수님이니까 그러셨지요. 우리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반문하고 싶은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우리와 예수님 사이에는 건너갈 수 없는 넓은 거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감히 예수님과 같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 모두를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산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믿지 못하게 하는 장벽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서 있습니다. 바로 죄입니다. 우리는 죄 중에서 태어났고 또한 무수한 죄를 범하고 살아갑니다.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죄에 대해 오해하고 있거나 자신에 대해 착각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의 보혈로써 죄 씻음을 받고 나면 그 벽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은 사람은 죄의 장벽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수 없지만, 보혈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그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과거의 죄에 대한 기억과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죄의식 때문에 그 사랑을 자주 의심합니다.  

지난 주, 저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저의 믿음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또 한 번 경험했습니다. 몇 달 전에 새해 계획을 세우다가 새해 맞이 기도회를 저녁에 하기로 정했습니다. 충분한 시간 동안 뜨겁게 찬양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나누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다시 부흥!"이라는 표어를 달고 시작하는 새해에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적은 수가 모이더라도 불쏘시개로 여기고 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찬양하기로 했습니다.

첫 날, 뚜껑을 열고는 저와 부목사님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화요일 저녁, 기록적인 한파를 기록한 날임에도 예배당에 교우들이 그득히 모였습니다. 찬양을 부르는 동안 이쪽 저쪽에서 눈물을 훔치셨습니다. 말씀을 듣는 눈빛에서 간절한 열망을 보았습니다. 공동 기도 제목을 두고 합심하여 기도할 때 뜨거움을 느꼈습니다. 하루만이 아니라, 나흘 동안 매일 그렇게 모였고, 매일 뜨겁게 찬양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교우들의 영적 열망이 그렇게 깊고 뜨거운지 몰랐습니다. 하마터면 큰 일 날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그 간절한 열망에 응답하지 않았다면, 우리 교회는 영적으로 심각한 침체의 늪에 빠질 뻔했습니다. 제가 그 증상을 진단하고 기도회를 계획한 것이 아니었는데, 지나고 보니 주님께서 큰 질병을 예방하도록 저를 인도하신 것입니다.

목요일 아침, 예배실에서 기도하며 저는 하나님께 항복했습니다. 제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께서 저를 인도하셔서 너무도 세심하고 정확하게 필요한 것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니, 두렵고 떨림이 저를 압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이렇게 사랑하고 돌보아 주실 아무런 자격이 제게 없기 때문입니다. 앞뒤 정황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는데, 저 자신을 보면 그런 사랑을 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5.

아마도 신앙 생활을 어느 정도 하신 분들은 이와 비슷한 경험을 가끔 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은 우리의 형편과 조건에 상관 없이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신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정말 자신을 챙기시고 돌보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면 갑자기 의심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개인적으로 경험하는 순간, "내가 무엇이길래?"라는 질문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영어로 Too good to believe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너무 기가막혀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런 의심이 생깁니까? 죄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기억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속이는 자 사탄이 우리의 죄를 빌미로 우리를 고발하기 때문입니다. "너는 죄인이다! 너는 하나님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

이 속삭임에는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어느 정도 진실이 담겨 있기에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반만 진실입니다. 그래서 거짓말입니다. 우리 자신만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 받을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를 사랑하기로 작정하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 보혈의 공로로 죄 씻김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죄는 더 이상 고발할 수 없습니다. 우리 내면에서 들리는 사탄의 속삭임은 순전히 거짓말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그분 안에 머물러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담대한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부모의 사랑의 이유는 자식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부모에게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고 인정하십니다.

불행하게도, 부모로부터 무조건적인 사랑과 인정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렵습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이 온전한 믿음 안에서 살기 원하지만, 정작 그 믿음을 위해 무엇을 해 주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자녀의 믿음을 위해 부모가 해 줄 수 있고 또한 해 주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무조건적인 사랑을 경험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또한 믿을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바울 사도의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전반부에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리고는 결론으로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을 두고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발하겠습니까? 의롭다 하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누가 감히 그들을 정죄하겠습니까?(롬 8:31-34)

이렇게 질문한 다음, 사도는 이렇게 결론 짓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롬 8:35, 38-39)
 
이 얼마나 대단한 사랑의 담력입니까?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지 못한 분들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이 이미 주어졌는데, 스스로 쌓은 죄의 벽 때문에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버지는 집 나간 아들을 다 용서하고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데, 정작 아들은 아버지에게 지은 죄 때문에 집 밖을 떠돌고 있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부디, 예수 그리스도 앞에 진실로 무릎꿇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그렇게 하신 분들이라면, 야훼의 종처럼, 예수님처럼 그리고 바울처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담력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사는 모습이 달라질 것입니다. 더 이상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일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삼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았으므로 우리에게는 더 이상의 인정이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겸손하게, 온유하게, 낮게, 침착하게, 조용하게, 한 번에 하나씩 섬길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우리는 약해 보이지만 진실로 강하고, 결코 포기하지 않으며 탈진되거나 지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이루고 나서도 조용히 물러나 "저는 제 소임을 다했을 뿐입니다"하고 고개 숙일 수 있습니다.


6.

오늘 우리는 '청지기 주일'(Stewardship Sunday)로 지킵니다. 잠시 후에 '청지기 약정서'에 따라 2014년도의 헌신을 다짐하고 결단할 것입니다. 올 한 해 동안에 와싱톤한인교회가 주님의 몸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우리 모두는 주님께 대한 헌신을 새롭게 하고 전보다 더 큰 헌신을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주님께 헌신한 것을 신실하게 지킬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앞서, 먼저 주님과의 관계를 다시 확인해 보십시다. '청지기'는 오늘 말씀에 나오는 '종'과 같은 의미입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우리에게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얼마나 인정하시는지, 얼마나 든든히 붙잡고 계신지, 그리고 얼마나 세심하게 모든 것을 살펴 주시며 필요를 채워 주시는지를 확인하십시다. 야훼의 종에 대해 주신 말씀이 신실한 청지기로 부름받은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신뢰와 사랑과 인정이 믿어질 정도로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섬김과 봉사와 헌신은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이 사랑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헌신이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며, 그래야만 우리는 "소리 없이 강한 헌신"을 통해 주님의 교회와 주님의 나라를 위해 이바지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에 대한 든든한 믿음 안에서 올 한해를 완주하고도 남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 주님
저희로 주님만 바라보게 하소서.
그리하여
주님의 사랑에 머물게 하시고
그 사랑을 담대하게 믿게 하시며
그 사랑으로 헌신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