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영봉목사

"성탄에 묵상하는 십자가" (빌립보서2:6-11)

새벽지기1 2017. 2. 27. 12:25


1.

예루살렘에서의 순례길의 절정은 뭐니 뭐니 해도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입니다. '비아 돌로로사'는 '고난의 길' 혹은 '슬픔의 길'이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예수께서 빌라도 총독에게 십자가형을 언도 받은 총독 관저에서부터 시작하여 매장되셨던 무덤까지 이르는 길을 가리킵니다 (지도 1).

십자가 처형은 인간이 개발해 낸 가장 잔인한 처형 방법입니다. 사형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빠르면 이삼일, 최대 열흘까지 고통을 받다가 죽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조각이나 그림을 보면, 허리에 천을 두르고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완전히 발가벗겼습니다. 수치와 고통의 극대치를 느끼게 하는 것이지요. 또한 십자가 처형은 보는 사람에게 치를 떨게 하는 공포감을 전해줍니다. '일벌백계'(一罰百戒), 즉 한 사람에게 벌을 주어 백명을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 벌을 주어 수천명에게 훈계를 하는 '일벌천계'의 처형 방법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형은 주로 정치범에게 행했습니다. 로마 정부가 가장 신경을 썼던 것이 반란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로마 총독만이 사형을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 총독이 머무는 곳을 '안토니오 요새'라고 부르는데, 그곳이 재판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십자가 형을 언도받으면, 사형수는 심한 매질로 고문을 당한 후에 십자가를 메고 처형장까지 걸어가야 했습니다. 어떤 십자가를 졌느냐는 문제에 대해 이견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십자가 형틀 전체를 지고 갔다고도 주장하고, 어떤 이들은 세로대는 처형장에 세워져 있었고 가로대만 지고 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비아 돌로로사에는 열 네 개의 이정표가 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 '십자가의 열 네 장소'(The Fourteen Stations of the Cross)라고 부릅니다. 가톨릭 교회는 일찌기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던 중에 일어난 열 네 가지 일들을 조각이나 그림으로 만들어 놓고 그것을 보고 기도하고 묵상하는 전통을 시작했습니다. 가톨릭 성당이나 수양관에 가면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각 번호에 따라 일어난 사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총독 관저: 예수께서 재판을 받은 곳
2. 십자가를 지신 곳
3. 첫 번째로 쓰러진 곳
4. 어머니 마리아를 만난 곳
5.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진 곳
6. 베로니카라는 여인에게서 손수건을 넘겨 받은 곳
7. 두 번째로 쓰러진 곳
8. 울면서 따라오는 여인들에게 말씀하신 곳
9. 세 번째로 쓰러진 곳
10. 로마 병사들이 옷을 벗긴 곳
11. 십자가에 못박은 곳
12. 십자가가 서 있던 곳
13. 예수님의 시신을 내린 곳
14. 시신이 매장된 곳

우리 일행도 예수께서 재판 받으신 자리에서 출발하여 순서대로 걸어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열 네 장소를 다 볼 수는 없었습니다. 무슬림 구역에 속해 있는 여덟 번째 장소에서 돌아 나와야 했습니다. 다행히, 열 번째 장소부터 열 네 번째 장소까지는 '성묘교회'(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re)(사진 1)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거룩한 무덤 교회'라는 말 뜻 그대로 예수님의 무덤이 있던 곳에 세워진 기념 교회입니다.


2.

비아 돌로로사는 넓이가 1미터 남짓한 좁은 골목길입니다.(사진 2) 길 양쪽으로는 기념품과 음식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상인들이 손님을 끄는 소리로 시끄럽습니다. 좁은 골목은 오고 가는 순례객들로 가득합니다. 꼭 한국의 남대문 시장 혹은 동대문 시장을 옮겨다 놓은 것 같습니다. 그 길을 걸으면서 기도하고 묵상하는 것은 보통 영적 내공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인솔하는 분은 왜 그리 빨리 가는지!

그 길을 걸으면서 참 아쉬웠습니다. 수도원의 정원처럼 정갈하게 가꾸어져 있고 사람도 별로 없어서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걸으며 복음서를 읽고 묵상하며 기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습니다.
그렇게 아쉬움을 씹으며 걷고 있는데, 어느 순간 '그게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그 거리를 지나실 때도 그와 같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도 유월절 축제를 위해 몰려 온 순례객들이 가득 했을 것이고, 상인들은 그들의 호주머니를 털기 위해 부산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헤집고 지나가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 실감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날, 저녁에 숙소에 돌아와 눈을 감고 다시 그 길을 걷는다고 상상해 보았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걸으셨던 주님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처럼 그 때도, 사람들은 물건 파는 일과 구경하는 일에 마음을 빼앗겨 있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주님을 보면서 그들은 속으로 '또 한 사람 죽는구나!' 생각하고 값싼 동정을 던졌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그 고난을 당하시는 것인데, 정작 그들은 아무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차가운 무관심으로 인해 주님은 육체적 고통보다 더 진한 외로움과 절망감을 느끼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일기에 기도문을 적었습니다

주님,
세상은 이렇게
변한 것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 길을 걸으실 때도
사람들은 다 각기
제 살기에 바빠
그 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심이 없었지요.
그 때도 주님은
그 길을 홀로 걸으셨지요.
그들의 구원을 위해
주님은 그 길을 걸으셨지만
정작 그들은
딴전을 팔고 있었습니다.

2천 년 후
주님이 걸으신 그 길을 걸으며 보니
하나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길가의 상점은 더 많아졌고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얽혀
길은 어지럽습니다.
이 길이 어떤 길인지,
2천 년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 우리가 왜 이 길을 걷고 있는지,
그들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우리가 멈추어 지갑을 열기만을 기다립니다.

아, 주님께서는
이 길을 걸으며 얼마나 외로우셨나요?
자신에게 구원이 필요한지조차 모르는
아니 모른 척하는 그들을 위해
주님은 어떻게 생명을 바치셨나요?

주님께서 태어나실 때도 그랬습니다. 그 때도 사람들은 먹고 마시는 일에 마음을 빼앗긴 나머지 자신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관심이 없으니 알아차리지 못한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은 사람들 중에 거할 곳이 없어서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셨고 짐승의 먹이통을 침상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렇게 외롭게 이 땅에 오신 주님은 마지막도 그렇게 외롭게 가신 것입니다.

지금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추수감사절이 지나자마자 크리스마스 캐롤을 틀어주는 곳은 백화점입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성탄절을 준비합니다. 그들에게는 주님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아마도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타이슨스 몰을 걸어다니셔도 아무도 못알아 볼 것입니다. 주님이 누구신지 알아 볼 생각도 없고, 누구신지 안다 해도 그분을 환영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이의 구원은 돈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은 외롭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아보신 여러분은 복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을 갈망하는 여러분은 진정 복되십니다. 외로운 예수님의 친구가 되시는 여러분은 참으로 귀하십니다. 주님을 찾은 목동들처럼 주님을 찾아 예배하는 여러분은 복되십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바쳐 이루신 구원을 누리시는 여러분은 진실로 복되십니다. 그 믿음 안에 늘 거하여 그 은혜를 충만히 누리시기 바랍니다.

3.

저는 이와 같은 묵상 가운데 한 참 은혜에 젖어 있었습니다. 마음 다해 감사를 드리고 또한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또 다른 음성이 제 마음에 들려왔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너만 누리고 있을 것이냐?"라는 음성입니다.

아, 주님은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십니다. 그냥 은혜 안에서 황홀함을 즐기도록 내버려 두시지, 이렇게 산통을 깨십니다. 주님께서 "그래, 그렇게 마냥 즐겨라"하고 말씀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저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두 손 들고 항복하고는 다음과 같이 계속 적어갔습니다.

너도 그리 하라구요?
자신에게 구원이 필요한지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구원을 전하라구요?
그러기 위해 무엇이든 희생하라구요?
필요하다면 목숨까지 바치라구요?

아,
저는 못합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해 아무 관심 없고
오직 먹고 사는 것을 전부로 알고 사는 사람들을 위해
주님처럼 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처럼 무시 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주님처럼 외롭고 싶지 않습니다.
주님처럼 희생 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주님 걸으신 길을 걸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 제 마음이
떨립니다.
무겁습니다.
두렵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을 하라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 때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내 뒤를 따라오라"는 말씀에
'아멘!'하고 응답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고는
차마 그렇게 못하겠습니다.
아니,
제게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제게 그런 능력은 없으나
그런 마음은 있습니다.
주님처럼
제 사는 곳에서
비아 돌로로사를 걷고 싶습니다.
주님처럼 외로워도
주님처럼 무시 당해도
주님처럼 헛되어 보여도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일에
저의 생명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가 저를 압니다.
제게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구합니다.
베드로처럼
저에게도 주님의 영을 주십시오.
저에게 능력이 없으나
주님의 영이 나를 사로잡으면
그럴 수 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같은 모습일 것이나
저는 달리 살아갈 것입니다.

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마도 여러분도 모두 같은 마음인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나와 내 가족을 위해서만 혹은 먹고 사는 것만을 위해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보고 싶은 열망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자존심도 놓아야 하고, 즐기는 것을 버려야 할 때고 있고, 외로움을 견뎌야 하며, 무시 당하는 것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에서의 작은 봉사로도 그 맛을 볼 수 있습니다.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다가갈 때도 그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맛을 보신 분은 다 알겠지만, 우리로서는 그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일을 당할 때 즐거워하고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당하고, 터무니 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 (마 5:11-12)

우리의 본성으로는 모욕을 당하기도, 박해를 당하기도, 터무니 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는 일도 피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한단 말입니까? 베드로도 할 수 없었고, 바울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능력이 임할 때 베드로도 했고 바울도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능력이 임할 때, 우리도 그리 할 수 있습니다.


4.

이스라엘에 가면 기념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다는 곳에 세워진 '눈물의 교회'(The Church of the Tears)도 있고, 죽임 당하시기 전 날에 늦은 밤까지 기도하셨던 곳에 서 있는 '열방 교회'(The Church of All Nations)도 있고, 산상설교를 하셨다는 곳에 '팔복 교회'(The Church of the Beatitudes)도 있습니다. 이 기념 교회들의 위치는 거의 '믿거나 말거나' 수준입니다. 정확히 그곳이었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묘교회는 신뢰성이 매우 높습니다. 역사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주후 132년에 유대인들의 마지막 반란이 일어나자 로마 황제 하드리안이 팔레스틴을 점령하고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서 모두 추방시켰습니다. 그 때 기독교 유적도 함께 파괴시켰습니다. 그는 초대 교인들이 가장 귀중하게 여겼던 골고다 언덕에 비너스 신전을 세웠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100년도 안 되어 기독교인들이 골고다에 순례를 다녔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 역사적 정확성이 매우 높다 할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2백여 년 후 로마 황제 콘스탄틴이 회심하고 기독교를 로마의 합법적인 종교로 승인합니다.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는 깊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왔다가 골고다에 세워진 비너스 신전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당장 비너스 신전을 허물게 하고 그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것이 성묘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 이후로 성묘교회는 여러 번 파괴되고 또한 재건되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주후 1149년에 십자군에 의해 다시 건축된 것입니다. 그 이후에도 여러 가지의 우여곡절을 거쳤습니다. 그 복잡한 상황을 모두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여러 종파가 공동 관리하고 있고, 교회 문의 열쇠는 무슬림이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슬람 측에서 문을 열어 주어야만 들어가 볼 수 있습니다. 

비아 돌로로사를 거쳐 성묘교회에 들어섰을 때, 저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곳에 서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에 떨림이 일어났습니다. 좁은 통로로 예배당 안에 들어가 보니(사진 3), 발 디딜 틈이 없을만큼 사람이 많았습니다. 경건성을 느낄만한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예배당 중앙에 커다란 바위가 유리관에 씌워져 있었습니다. 안내판에 보니 그곳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도 역시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정확히 그 바위에 십자가가 꽂혀 있었다고 장담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곳 어딘가에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고 생각하니, 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곳에 무너져 내리듯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사진 4)

그 날 저녁, 저는 십자가가 서 있던 자리에서 기도하던 때를 기억하면서 묵상했습니다. 그 날 일기에 적은 또 다른 글입니다.

십자가 아래서

십자가가 세워졌었다는 자리
그 아래
무릎을 꿇는다.

무릎이 땅에 닿는 순간
온 세상이
내 무릎 닿은 지점에,
과거와 미래의 시간이
현재의 순간에,
수렴된다.

세상은 온 데 간 데 없고
나 혼자뿐이다.
시간의 흐름은 멈추고
영원의 문이 열린다.

오, 이제야 알겠다.
과거의 사건이
어떻게 오늘에 닿아 있는지.
한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
어떻게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어떻게 그것이
나에게 일어난 사건인지.
시간이 열리고
공간이 열리니
이제야 알겠다.

십자가가 세워졌던 자리
그 자리에
무릎꿇고 앉으니
그분의 눈물이
그분의 피가
내 정수리에 떨어진다.

오, 주님
당신은 진실로
저의 주님이십니다.
저를 받으소서.
아멘.


5.

순례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책을 읽다가 영화를 볼까 싶어졌습니다. 목록을 살펴 보니, 찰톤 헤스톤의 <벤허>가 있습니다. <벤허>의 명장면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마차 경주입니다. 이스라엘과 요르단에서 거대한 로마식 원형 경기장을 둘러 보고 왔기에 마차 경주 장면을 다시 보고 싶어졌습니다.

30여 년 전에 그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는 역사적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줄거리와 스펙타클한 장면만을 보고 좋아했었습니다. 이제 다시 보니, 이야기의 흐름만이 아니라 지리적인 배경과 역사적인 배경까지 다 이해가 되었습니다. 아주 진한 영화 감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대했던 대로 마차 경주 장면은 압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저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되는 장면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주인공 유다 벤허는 나병에 걸린 누이와 어머니와 함께 멀리서 지켜 보고 있습니다. 오후 세시였지만 천지는 어둠에 휩싸이고 천둥 번개와 함께 폭우가 내립니다. 그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누이와 어머니의 나병이 씻은듯이 사라집니다. 두 사람은 감격 속에서 서로 포옹하고 굵은 빗줄기를 맞아가며 감사를 드립니다. 많은 이들이 이 장면을 명장면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그 날 감동으로 다가온 것은 예수님의 피가 빗물에 섞여 흘러내리는 모습이었습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주님의 거룩한 피가 빗물과 함께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는 순간, 그것이 너무도 현실로 느껴졌습니다. 그 거룩한 피가 치유와 회복과 생명의 능력으로 온 세상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졌습니다.

그 피가 지금도 흐르고 있습니다. 제 안에도 흐르고 있습니다. 그 피는 우리의 죄를 씻어내고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빚어냅니다. 그 피는 생명수입니다. 영화가 끝난 후, 저는 다시금 기도 드렸습니다. 그 피가 내 안에 살아있게 해 달라고! 그 피로 인해 내가 늘 새롭게 되도록 해 달라고! 그 피가 나를 통해 흘러나가게 해 달라고! 그 피의 능력으로 살게 해 달라고!

성탄절을 앞 두고 고난 주간에나 어울리는 장면을 보니 이상한 느낌이 드시지요? 알고 보면,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실 때 이미 십자가는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비천한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오신 것, 짐승의 우리에 나셔서 짐승의 먹이통이 누이신 것, 그리고 가장 낮은 계층에 속했던 목동들의 경배를 받은 것은 모두 십자가를 가리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그 사실을 수정처럼 요약해 두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강림절에 그리고 성탄절에 십자가를 묵상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가 있었기에 성탄일을 축하하는 것이며, 성탄일에 일어난 일이 십자가에서 완성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탄의 의미를 제대로 맛보려면 한 번쯤 진지하게 십자가 아래 서 보아야 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다가오는 그 은혜를 맛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흘러내린 그 거룩한 피에 푹 적셔져야 합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치 사랑하는 부모님의 생일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생일을 준비하고 계신 줄 믿습니다. 이 의미 깊은 날에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까요?
다른 것 아닙니다. 그분이 거룩한 생명을 바치셔서 열어 놓으신 구원의 길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골고다에서 2천 년 전에 흐르기 시작한 그 보혈은 지금도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의 전 존재를 열고 그 거룩한 피로 씻김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진실로 기뻐할 것입니다. 당신의 거룩한 피가 헛되이 흘러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주님께서 열어 놓으신 구원의 길을 모른 척하고 먹고 사는 일에 파묻혀 사는 이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먹고 사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피에 씻기고 적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는 진정한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보혈로써 구원과 새 생명을 얻었다면, 그것을 모르는 이들에게 알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주님을 진정으로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을 살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은 곳에 오셨습니다.
가장 귀하신 분이
가장 천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가장 값비싼 생명이
가장 값없는 생명을 위해 희생되셨습니다.
오, 주님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저희를 십자가로 이끌어 주시고
그 은혜에 젖게 하소서.
주님의 거룩한 피가
저희를 살리고
또한 저희를 통해 흘러나가
온 세상을 살리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