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는 지난 11월 첫 주일부터 '성지묵상 연속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네 주 동안 광야에 이야기를 주로 했습니다. 그 동안 사막과 광야와 돌산을 지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헤맨 것을 생각하면, 네 주일 동안 광야에 대한 설교를 듣는 것 정도는 견디기 쉬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광야를 벗어나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갑니다.
성지 순례 여정의 절정은 뭐니뭐니 해도 예루살렘입니다. 지금의 예루살렘은 신예루살렘과 구예루살렘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루살렘 성은 구예루살렘입니다. 그곳에는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두 번째 임금 다윗이 수도로 정한 이후 예루살렘은 지난 3천년 동안 수 많은 풍상을 겪어왔습니다. 역사에 기록된 것만 따져도, 두 번 완전히 파괴되었고, 스물 세 번 포위되었으며, 공격받은 것은 쉰 두번이나 됩니다. 지금은 네 구역, 즉 알미니안 구역, 유대인 구역, 기독교인 구역, 이슬람 구역으로 찢겨 있습니다. (지도 1)
예루살렘은 해발 760미터(2,490피트) 높이의 시온산 위에 우뚝 서 있습니다. 시온산 주변으로는 세 개의 깊은 골짜기가 둘러 있습니다. 동쪽으로는 기드론 골짜기(Kidron Valley), 남쪽에는 힌놈 골짜기(Hinnom Valley), 서북쪽으로는 티로포엔 골짜기(Tyropoeon Valley)가 에워싸고 있습니다. 골짜기 위에는 화강암 돌을 깎아 만든 성벽이 줄지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난공불락의 요새입니다. 그런 까닭에 쉰 두 번 이상 공격 받았으면서도 두 번만 함락되었습니다.
저희 일행은 예루살렘의 동쪽에 있는 올리브산(옛번역에서는 '감람산')에 먼저 올라 기드론 골짜기 건너편에 있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았습니다.(사진 1) 기드론 골짜기 위에는 성벽이 늘어서 있었고, 그 뒤로 성전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원래 솔로몬이 지은 것이었습니다만, 지금은 이슬람 사원이 서 있습니다. 7세기에 무슬림 정권이 팔레스틴을 점령했을 때, 솔로몬 성전이 있던 자리에 사원을 지은 것입니다. 옛날 정복자들은 정복 당한 민족의 신전을 허물고 그 위에 자신이 섬기는 신을 위한 신전을 짓곤 했습니다. 무슬림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국가들도 그런 만행을 자주 범했습니다.
솔로몬 성전 자리에 세워진 사원의 황금빛의 지붕은 우리 말로 '황금돔', 영어로는 'The Dome of the Rock'이라고 불립니다. 무슬림들은 그곳에서 모하메드가 승천했다고 믿습니다. 그곳은 이슬람 구역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이나 유대인은 무슬림의 허락을 받고서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황금돔은 꼬일대로 꼬인, 인간의 계산으로는 절대로 해법이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예루살렘의 상황을 상징합니다.
올리브산에 올라 기드론 계곡을 내려다 보면 또 하나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 있습니다. 기드론 계곡 전체에 널려 있는 묘지가 그것입니다.(사진 2) 그 모습이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입니다. 안내하신 분에 의하면, 그곳에 매장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3만 달러를 주어야 하고, 그것마져도 이제는 자리가 별로 없다고 합니다.
사람이 살기에도 비좁은 땅에 그 거대한 무덤 계곡이 만들어진 이유는 유대교인들의 부활 신앙 때문입니다. 그곳이 공동묘지가 된 것은 1541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한 무슬림 통치자 슐레이만 황제(Suleiman the Majesty) 때 시작되었습니다. 성지를 공동묘지로 만드는 것은 유대교와 기독교를 모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유대인들이 앞을 다투어 그곳에 묻히기를 원합니다. 마지막 날에 메시야가 올 때 예루살렘에 오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묻히면 가장 먼저 부활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죠. 유대교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믿지 않지만, 메시야가 올 때 모든 의인이 부활할 것을 믿습니다.
올리브산에서 보면, 동쪽 성벽에 큰 문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미문'(the Beautiful Gate)이라고 부르고, 지금은 '금문'(the Golden Gate)이라고 부르는 문입니다.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셨을 때 바로 이 문을 통해 오셨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문이 막혀져 있습니다. (사진 3) 이것도 역시 슐레이만 황제가 한 일입니다. 유대인들이 장차 메시야가 오시면 바로 그 문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들어 오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입구를 돌덩이로 봉해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못 들어올 줄 알았던가 봅니다.
2.
저는 올리브산에 서서 저 멀리 보이는 도시 예루살렘, 도시의 동남쪽 끝에 있는 성전뜰, 이슬람 사원이 되어 버린 솔로몬 성전, 막혀 버린 금문 그리고 그 아래에 늘어서 있는 무덤들을 바라 보며,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그 자리에 머무르고 싶을 정도로 충격이 강했습니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기독교인과 유대교인 그리고 기독교인과 무슬림은 메시야에 대한 믿음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갈립니다. 유대교는 나사렛 예수를 세례 요한 정도의 예언자로 생각합니다. 기독교가 시작될 시기에는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사람들을 이단자로 규정하여 회당에서 추방시켰습니다. 유대인들 중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Messianic Jew라고 부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극소수이고, 유대교인들은 다른 메시야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야가 아니라고 보는 점에서는 이슬람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슬람교의 경전인 꾸란(Quran)에서는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부르기도 하고, '사자'(messenger)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부르기도 합니다만, '사명받은 한 인간'이라는 뜻으로만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사렛 예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어지는 예언자의 긴 고리 중 하나이고, 그 고리의 마지막에 모하메드(Muhammad)가 있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누가 메시야인지에 대해서는 세 종교가 입장을 달리하지만, 하늘로부터의 구원자를 바라는 점에서는 같다 할 수 있습니다. 기드론 계곡에 묻힌 사람들 대다수는 메시야가 올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메시야가 성전 동편 계곡으로 와서 금문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므로 그곳에 묻히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발상인데도 그곳에 묻히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줄을 잇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도 그처럼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시신을 고이고이 매장해야만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부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장을 꺼리고 시신 기증이나 장기 기증을 꺼립니다.
이렇게 믿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는 까닭에 생깁니다. 마지막 날에 일어날 부활은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3차원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믿음으로 경험하기는 하지만 다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부활이란 옛날 몸으로 다시 되살아 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야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금문을 밀봉한 슐레이만 황제의 행동은 하나의 코메디이며, 기드론 계곡을 가득 메우고 있는 무덤들도 촌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그런 모습을 볼 때면, 생각있는 사람들은 "난 저런 거 안 믿어!"라고 고개를 돌립니다. 그 심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이 대목에서 조심해야 합니다. 자주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행동으로 표현되는 메시야 신앙은 그렇게 쉽게 웃어넘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감람산 언덕에 서서 무덤 계곡을 한 참 동안 바라보다가, 눈을 올려 시온산 위의 예루살렘을 주목했습니다. 세계 3대 종교 즉 기독교,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교가 이 도시를 소유하기 위해 싸워 왔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네 구역으로 찢겨 있습니다. 무슬림 구역에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유적과 유물이 많이 있는데,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들어가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총독 관저에서 골고다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고난의 길'(Via Dolorosa)도 끝까지 갈 수 없습니다. 무슬림 구역에서 돌아 나와야만 합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복잡하게 얽히고 꼬인 관계 속에서도 상업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서로 손을 잡는다는 것입니다. 종교, 인종 혹은 정치 문제에 있어서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순례자들의 호주머니를 터는 일에는 손을 맞잡습니다. 무슬림 상인들이 기독교 순례자들에게 십자가 목걸이를 팔고 있고 유대인 순례자들에게 다윗의 별을 팔고 있습니다. 돈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예루살렘을 가리켜 '우주의 배꼽'이라고 부르는데, 그렇게 부를만도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류의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현실이 예루살렘 안에 집약되어 있기 떄문입니다. 예루살렘의 얽히고 설킨 현실은 영영 해결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해결 방법은 오직 하나, 어느 한 나라가 무력으로 점령하는 것뿐인데, 이미 역사를 통해 본 것처럼, 그것은 또 다른 무력을 불러올 뿐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인간에게도 없고 이 땅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 현실이 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인류에게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봅니까? 인간의 이성과 의지만 가지고도 인류 사회는 유토피아에 이를 수 있다고 믿습니까? 지금 우리가 100년 전 혹은 200년 전의 인류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때보다 더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물질 문명만을 생각하면 그렇다 할 수 있습니다. 10년 전만 해도 차를 타고 다니며 인터넷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했습니다. 전기 코드에 전선을 연결하지 않고 배터리에 충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기술을 발명해 내는 것을 보면 인간의 능력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나님도 지금쯤 "이크, 내가 너무 잘 만들었나?"하고 놀라실 것 같습니다. 10년 후면 또 어떤 물건이 발명될지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됩니다.
과연, 물질 문명의 발전으로 인해 우리가 우리 이전 세대보다 더 잘 살고 있다 할 수 있습니까? 진실은 그 반대가 아닙니까? 물질 문명은 상상하지 못했던 수준까지 발전했지만, 인간성은 더 심하게 망가졌고, 인간관계는 더욱 얽히고 설켜 버렸습니다. 내면의 전쟁은 더욱 심각해졌고 그것을 다룰 능력은 점점 퇴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 관계에 갈수록 무능하고 서툴게 되고, 그로 인해 가정마다 뒤틀린 관계로 인해 고통을 겪습니다. 인간의 탐욕은 갈수록 교활해지고 그로 인해 우리 사회는 점점 망가져 갑니다. 탐욕 앞에서 정직과 정의는 힘을 잃어 버립니다. 영영 평화로울 것 같던 나라들이 무장하며 거친 말들을 주고 받고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의 태도 변화로 인해 아시아에 화약냄새가 폴폴 나고 있지 않습니까?
예루살렘은 팔레스틴에만 있는 특별한 현상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은 내 안에도 있고, 내 가정에도 있으며, 내가 사는 사회에도 있습니다. 과연, 예루살렘은 절망적인 인간의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4.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마음이 왜 그리 짠했는지, 이제 납득이 됩니다. 참으로 착찹했습니다. 씁쓸했고, 우울했습니다. 누가 저를 툭 치면 울음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예루살렘이 겪어 온 비극의 역사 때문인 줄 알았더니,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을 통해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를 보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도무지 풀 길 없어 보이는 현실에 대한 절망감 때문이었습니다. 아, 그런데요,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을 바라보실 때 그런 마음이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동편의 올리브산에는 몇 개의 기념 교회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눈물 교회'(The Church of the Tears)입니다.(사진 4) 라틴어로 '도미누스 플레빗'(Dominus Flevit)이라고 부르는데, "주님께서 우셨다"는 뜻입니다. 그 교회가 세워진 자리가 바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고 우신 곳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에서 바로 그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41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그 도성을 보고 우시었다.
당시 예루살렘은 오늘날과 달랐습니다. 헤롯이 재건한 웅장한 성전에서 유대인들이 아무런 불편 없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성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많은 제사와 의식이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종교 의식은 화려했지만 그들의 믿음은 죽어 있었고 삶은 오염되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촉구했지만, 그들은 오히려 주님을 배척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영적 교만과 무지로 인해 일어날 비극을 내다보며 우셨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클라이오'(klaio)는 소리내어 우는 것을 말합니다. 성인 남자가 소리내어 울 때는 상황이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말씀하시죠.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길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터인데! 그러나 지금 너는 그 일을 보지 못하는구나. 그 날들이 너에게 닥치리니, 너의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에워싸고, 너를 사면에서 죄어들어서, 너와 네 안에 있는 네 자녀들을 짓밟고, 네 안에 돌 한 개도 다른 돌 위에 얹혀 있지 못하게 할 것이다. (42-44절)
'눈물의 교회'에 서서 예루살렘을 바라보니, 주님께서 오늘 그 자리에 다시 서신다면 더 심하게 통곡하셨을 것 같았습니다. 지금의 예루살렘의 상황은 예수님 당시보다 더 절망적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 세상이 예루살렘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통곡은 실은 인류의 운명에 대한 통곡입니다. 인류에 대한 통곡은 바로 나, 저와 여러분, 우리 각자에 대한 통곡입니다.
여러분은 예루살렘을 향한 주님의 통곡에 공감하십니까?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보면서 그리고 인류를 생각하면서 느끼셨던 절망감에 공감하십니까? 주님처럼 그렇게 울고 싶었던 때가 있었습니까? 자신 안에 있는 예루살렘 때문에, 예루살렘과 같은 가정 형편 때문에, 모든 가치와 도덕이 부정당하는 사회를 보면서, 탐욕과 아집으로 뒤엉킨 조국과 미국의 형편을 보면서,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지구 환경 문제를 생각하면서, 주님처럼 통곡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습니까? 희망으로 우리 곁에 주님께서 오셨는데, 아직도 문 꼭꼭 걸어 잠그고 절망 가운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5.
그렇습니다. 우리 자신만을 본다면 그리고 이 땅만 본다면, 우리의 마음은 자주 착찹해지고 우울해지고 눈가에 눈물이 고입니다. 때로 절망감이 짓누를 때면 무너져 통곡하고 싶기도 합니다. 도무지 희망이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엉클어진 실타래처럼 어디서부터 문제를 풀어갈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늘을 우러릅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희망이 없기에 하나님에게서 희망을 찾습니다. 기드론 계곡에 가득 채워진 무덤들은 하늘에서 희망을 보고자 하는 인간들의 발버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무덤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저 산 위를 보라. 저것이 인간 현실이다. 찢기고 갈리고 엉클어진 현실은 다 각기 자신의 역사와 전통, 자신의 종교와 믿음에 따라 최선을 다한 결과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해결할 수 없는 갈등과 분열과 원한이다. 우리에게는 도무지 희망이 없다. 진정한 희망은 하늘에서 찾아야 한다. 메시야가 올 때에야 이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기다린다.
이 무덤의 소리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늘에서 구원의 희망을 찾는다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라고 무시하시겠습니까? 한계 상황에서 인간이 하늘을 향해 구원을 호소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어쩔 수 없어서 그러는 것이지, 하늘의 희망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하늘에서 희망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무덤 계곡에 묻힌 사람들의 열망이 틀린 것만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이 그 절망적인 상황을 바꿀 길을 하늘에서 열어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4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에 이르게 하는 길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터인데!
평화에 이르게 하는 길이 열렸는데, 예루살렘이 그 길을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44절 끝에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그들에게 찾아오셨는데, 그것은 인정하지 않고 메시야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희망이 이미 와 있는데, 그것을 외면하고 다른 희망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에 기독교 인구가 2%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인구의 75%가 유대교를 신봉하는데, 그 인구가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 것 같지 않습니다.
앞에서 저는 '금문'의 사진을 보여 드렸습니다. (사진 3) 화강암으로 빈틈 없이 밀봉된 금문은 마치 복음에 대해 굳게 문을 닫고 있는 그들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같습니다. 굳게 닫힌 금문은 예루살렘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를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복음에 마음 문이 닫히면 인생이 그렇게 얽히고 설킨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해결할 희망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하늘에만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희망으로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문을 활짝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들이면 희망은 시작됩니다.
6.
오늘 우리는 교회력으로 '강림절' 혹은 '대림절'(the Advent) 첫 주일을 맞고 있습니다. 강림절은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를 통해 우리를 찾으신 사건을 기억하는 기간입니다. 하늘의 희망으로 우리 곁에 오신 주님을 생각하는 기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 대한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 상태입니까? 혹시 금문처럼 굳게 봉해진 것은 아닌지요? 교회 나오고 있으니 나는 안그렇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몸은 교회에 나와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금문처럼 굳게 잠겨 있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습니다. 언제까지나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입니다. 몸은 교회에 나와도 주님을 항상 마음 바깥에 세워 두고 사는 이들을 보면 제 마음도 안타까운데 주님은 오죽 더하시겠습니까? 부디, 그 문이 활짝 열리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삶 속에 희망을 빚어 내시도록 맡겨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모셔 들이기는 했는데, 주인이 아니라 손님으로 모시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내가 주인이 되고 주님은 필요할 때마다 도움을 청하는 정도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주님이 말 그대로 주님이 되셔야 합니다. 하루 24시간, 매일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갈 때, 예루살렘처럼 나로서는 어쩔 수 없던 꼬이고 엉킨 일들이 주님의 능력으로 변화되고 희망이 시작됩니다. 내가 변화되면 내 가정이 변화되고, 내 가정이 변화되면 그 변화가 내가 사는 사회로 번져 나갑니다. 예루살렘의 변화는 나로부터, 내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부디, 이 강림절에 이미 우리에게 와 있는 희망이 우리 안에서 현실이 되도록 주님을 더욱 깊이 모셔 들이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에, 내 모든 관계에, 내가 사는 세상에 더 깊이 주님을 주인으로 모셔 들입시다. 뿐만 아니라, 오늘 주님 안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이 완전하게 드러나는 날을 소망하고 기다립시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어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고 모든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날, 그 날이 옵니다. 그 소망을 품고 오늘 이곳에서 우리는 주님과 매일 동행하기를 힘쓰십시다. 주님께서 열어 놓으신 평화의 길이 우리 앞에 활짝 열릴 것입니다.
주님이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우리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예루살렘을 변모시키기 위해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오십니다.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더 가까이 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마침내 완전하게 오실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주님을 모셔 들이십니다. 그리고 그 주님과 매일 동행하십시다. 주님께서 희망을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희망으로 우리 곁에 오신 주님,
저희의 마음을 활짝 엽니다.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치웁니다.
오소서, 주님.
중심에 오소서.
깊이, 깊이 오소서.
오셔서 주인 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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