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영봉목사

"환난을 자랑하는 이유" (신명기 8:1-10)

새벽지기1 2017. 2. 23. 07:05


1.

Happy Thanksgiving! 주님의 은총이 교우 여러분 각자의 영혼 위에, 가정 위에 그리고 하시는 일 위에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이 기간 동안에 만나는 모든 만남 위에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중에는 찾아 올 사람 혹은 찾아 갈 사람이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보시는 하나님,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찾아 주시고 또한 만나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는 모세의 설교의 일부를 읽었습니다. 구약성경의 다섯 번째 책인 <신명기>는 가나안 땅을 앞두고 모세가 모압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준 설교입니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43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합니다. 값싼 노동력을 잃고 싶지 않았던 이집트 왕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그들을 붙잡으려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그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출애굽기> 전반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집트를 나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수가 남자만 60만이었다고 합니다. 여자와 아이들은 계산하지 않았으니, 모두 합하면 백만명은 족히 넘었을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가나안 땅 즉 지금의 팔레스틴 땅까지 가는 가장 짧은 길은 시나이 반도 서북쪽 끝에 있는 해변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지도1) 조금 과장하여 '사흘길'이라고 하는데, 일 주일 정도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그곳에 자리잡고 있는 불레셋과 싸워야 했습니다. 불레셋은 군사력이 강한 민족이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 백성은 전쟁을 할만한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회로를 택하셨습니다.

얼마 후, 이스라엘 백성이 바란 광야(지도 2)에 이르렀을 때, 열 두 지파에서 한 사람씩 대표를 뽑아 가나안 땅을 탐지하러 보냅니다. 가나안 땅을 보고 돌아온 열 두 명의 대표단은 과연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보고합니다.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보면 팔레스틴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상하지만, 황량한 사막과 광야에 비하면 그렇게 부를만도 합니다. 하지만 갈렙을 제외한 열 한 명이 입을 모아 그 땅에 들어가기를 반대합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상대하기에 너무 강해 보인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로 인해 백성들 사이에 불신이 퍼지고 소요가 일어났습니다. 이 일로 인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다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로 인해 40년의 길고 긴 광야생활이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이 40년 동안 광야를 방랑했다"는 말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40년 동안 끊임없이 이동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 이스라엘 백성은 어느 지역에 이르러 그들을 인도하던 구름 기둥이 멈추면 그곳에 진을 치고 몇 달 혹은 몇 년이고 그곳에서 삽니다. 그러다가 성막을 두르고 있던 구름이 떠오르면 짐을 챙기고 대오를 정렬하여 이동했습니다. 민수기 33장에는 이집트에서부터 모압 광야까지 이동할 때 진을 쳤던 지역 즉 머물렀던 지역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 기록만 보아도 이스라엘이 진을 친 곳이 마흔 한 곳입니다. 평균을 잡으면 한 곳에서 1년 정도 머무른 셈입니다. 실제로는, 몇 달 지나다 떠난 곳도 있고, 몇 년 머무른 곳도 있을 것입니다.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 평균 15일 정도 걸렸으리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경로(지도 3)는 정확하게 그리기 어렵습니다. 민수기 33장에 있는 지명 중 많은 것들이 바뀌었거나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지금의 요르단 땅을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지금의 요르단 땅은 출애굽 당시에 세 민족이 살고 있었습니다(지도 4). 남부에는 에돔, 중부에는 모압 그리고 북부에는 암몬. 에돔족이 살던 남부는 주로 사막과 광야였고, 모압족이 살던 중부는 광야와 돌산으로 되어 있고, 암몬족이 살던 북부는 비교적 푸른 돌산과 평야로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막과 광야와 돌산을 지나 모압 평야에 와 있습니다. 그곳에서 요단강 건너편을 바라보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언과 같은 설교를 하는 겁니다.

이번 순례 여정 중에 저희 일행은 에돔족이 살던 땅에서부터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출애굽 여정의 일부를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 여정에서 가장 많이 나눈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겪어야 했던 고난이었습니다. 어떤 분이 그러십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변덕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막상 와 보니 이해가 됩니다. 저 같았으면 더 많이 불평하고 더 심하게 변덕을 부렸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집트로부터 가나안에 이르는 경로는 실로 사람이 살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도무지 땅에서는 희망을 찾을 수 없는 곳이 그곳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그 땅에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즉각즉각 응답이 오지 않습니다. 견뎌야 할 고난은 너무나 크고 하나님의 침묵이 길어질 때, 그들은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느끼기도 했고, 하나님에게 버림 받은 것처럼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때론 불평을 쏟아 놓았고, 때론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찾기도 했으며, 때론 이집트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렇게 40년을 지나 드디어 약속의 땅 입구에 이르렀습니다.


2.

오늘 읽은 말씀에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40년 동안 광야에 머물게 하신 이유에 대해 설명합니다.

당신들이 광야를 지나온 사십 년 동안,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오랫동안 당신들을 광야에 머물게 하신 것은, 당신들을 단련시키고 시험하셔서, 당신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당신들의 마음 속을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2절)

당신들은, 사람이 자기 자녀를 훈련시키듯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도 당신들을 훈련시키신다는 것을 마음 속에 새겨 두십시오. (5절)

주님께서는 넓고 황량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우글거리는 광야와 물이 없는 사막에서 당신들을 인도하여 주시고, 차돌 바위에서 샘물이 나게 하신 분이십니다. 광야에서 당신들의 조상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당신들에게 먹이셨습니다. 이것이 다 당신들을 단련시키고 시험하셔서, 나중에 당신들이 잘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5-16절)

여기서 자주 보이는 단어가 몇 있습니다. '단련하다', '훈련하다' 그리고 '시험하다'입니다. '단련하다'라는 말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고생시키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단련시키고 시험하셔서"라는 말은 따라서 "고생을 통해 시험했다"는 뜻입니다. 시험한 이유는 하나님이 몰라서가 아닙니다. "당신들의 마음 속을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라는 말이 의미하듯, 그들의 믿음이 어떤지를 드러내려는 것이었습니다.

실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끊임없이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 시험에서 그들은 끊임없이 낙방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얼마나 약한지를 거듭 거듭 확인했습니다. 자신의 내면에 무엇이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도 근심했고 모세와 아론의 속도 썩었지만, 무엇보다 그들 자신이 좌절하고 실망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그들의 믿음이 단련되고 자라갔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믿음이 점점 강해졌습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만을 섬기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가장 복된 길임을 믿는 믿음이 깊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을 지켜보는 하나님의 마음은 마치 자식의 고통을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고는 그들의 믿음을 연단시킬 수 없었고,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지 못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 타락하고 부패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모세는 그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배불리 먹으며, 좋은 집을 짓고 거기에서 살지라도, 또 당신들의 소와 양이 번성하고, 은과 금이 많아져서 당신들의 재산이 늘어날지라도, 혹시라도 교만한 마음이 생겨서, 당신들을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내신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12-14절)

당신들이 마음 속으로 "이 재물은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모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 걱정이 됩니다. (17절)

모세는 성공과 번영과 부의 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잊게 만드는지를. 그것이 얼마나 쉽게 섬겨야 할 하나님을 이용하게 만드는지를. 인간의 마음이 물질적인 부로 인해 얼마나 빨리 부패하는지를. 그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을 보는 모세의 마음에는 걱정이 더 앞섰습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연단된 믿음으로도 가나안 땅에서의 성공과 번영과 부의 파괴력을 이겨내지 못할까 염려했던 것입니다.


3.

그런 염려 때문에 모세가 제시한 처방이 있습니다. 2절에 그 처방이 나와 있습니다.

당신들이 광야를 지나온 사십 년 동안,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하십시오.

기억하는 것, 바로 그것이 모세가 제시한 처방입니다. 광야에서 어찌 살았는지, 하나님이 어찌 인도해 주셨는지, 그리고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단련한 그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 먹고 살 것이 풍족해져도 광야에서 배운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망각하면, 17절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모든 것이 자기의 힘으로 된 것인 줄 착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안겨주신 축복이 재앙으로 변합니다.

번영과 성공과 부, 그것 자체가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세가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이끌고 간 목적지가 어디입니까? 지리적으로 말하자면 가나안 땅이었지만, 상황으로 말하자면 평안하고 풍요로운 삶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7절 이하에서 모세가 말합니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을 데리고 가시는 땅은 좋은 땅입니다. 골짜기와 산에서 지하수가 흐르고 샘물이 나고 시냇물이 흐르는 땅이며, 밀과 보리가 자라고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가 나는 땅이며, 올리브 기름과 꿀이 생산되는 땅이며, 먹을 것이 모자라지 않고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돌에서는 쇠를 얻고 산에서는 구리를 캐낼 수 있는 땅입니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주신 옥토에서, 당신들은 배불리 먹고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7-10절)

하나님은 모세를 시켜 노예 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풍요로운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사막과 광야와 돌산에서의 40년의 고생은 이 풍요와 번영을 위한 준비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언제까지나 고생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풍요로운 땅에서 번영을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번영과 풍요에는 심각한 위험이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망각하고 자기가 하나님이 되는 위험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 능력으로 된 줄 착각하고, 자기가 가진 것으로 인해 무엇인가 된 것처럼 착각하며,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위험입니다. 이것을 조심하지 않으면 풍요와 번영이 재앙의 원인이 되고 맙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고난이 아닙니다. 평안이요 풍요이며 번영입니다. 하지만 물질적인 평안과 풍요와 번영은 하나님을 잊게 만들고 스스로 교만하게 만드는 치명적인 독소를 품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번영과 풍요를 구하기 전에 우리는 믿음의 연단을 구해야 합니다. 번영과 풍요를 견뎌낼만한 영적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번영과 풍요를 얻으면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사막과 광야와 돌산을 지날 때 함께 하시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 수 있고, 헛된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 손에 들어온 물질은 우리를 부패시키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용할 영적 자유와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셔서 우리의 영혼을 정화시키시고 또한 믿음을 연단시키십니다. 모세가 말씀한 대로,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를 단련하듯, 하나님께서도 사랑하는 자녀를 단련시키십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듯, 하나님께 아무런 단련도 받지 못한다면 혹시나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난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면 때로 고난이 닥칠 때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롬 5:3-5)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라는 말씀이 제 눈에 클로즈 업됩니다. "우리는 환난을 기뻐합니다"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당하는 환난을 기뻐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오히려 환난을 피하기 위해 노력해 왔고 어쩔 수 없이 환난을 당하면 수치스럽게 여기고 숨기려 하지 않았습니까? 바울 사도가 세상과 인생을 보는 눈이 우리의 눈과 이토록 달랐습니다. 그는 환난을 반겼고 또한 자랑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한다는 증거였고, 또한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는 도구였으며, 그로 인해 그에게는 더 큰 간증과 소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이 그에게 있었기에 번영과 풍요가 그를 유혹하거나 넘어뜨릴 수 없었습니다. 


4.

며칠 전에 어느 교우를 만났습니다. 그분은 장성한 두 자녀가 하나님을 떠나 살고 있음을 안타까이 여기며 늘 기도해 오셨습니다. 제게 그 이야기를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 눈물에서 저는 그분의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어도 하나님 얻지 못하면 실패한 것이라는 믿음이 그 눈물에 담겨 있음을 알았습니다. 눈물을 훔치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적으로 잘 되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제가 아이들을 잘 못 길렀어요.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승승장구하니까 하나님이 필요 없어진 거죠. 아내가 들으면 뭐라 하겠지만, 제 마음 같아서는 하나님께서 제 아이들에게 실패를 겪게 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저 아이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것 같지 않아요.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께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그분의 두 자녀는 누구라도 부러워할만큼 성공했습니다. 자기들이 일하는 분야에서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렀고, 물질적으로도 부족한 것이 없으며, 자녀들도 대를 이어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복입니다. 그런데 그 복으로 인해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살고 있습니다. 많은 부모들은 마냥 좋아라 하겠지만, 그 교우님은 그로 인해 눈물을 흘리십니다. 자녀들을 바라보는 그분의 마음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는 모세의 마음과 같았습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어도 하나님을 잃으면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공은 우리 모두가 바라는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눈을 가립니다. 번영은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것이지만, 그것에는 패망의 침이 숨겨져 있습니다. 풍요는 우리 모두가 원하는 것이지만, 그것에는 우리의 영혼을 썩게 하는 병균이 숨겨져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그 사실을 망각하고 자녀들의 성공을 위해서 올인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아직 늦지 않은 부모님들은 오늘 모세가 한 말씀 그리고 앞에 소개한 교우께서 한 말씀을 귀담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다시 아이들을 키운다면 세상적으로는 좀 덜 성공해도 좋으니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도록 키우겠다"는 때 늦은 회한에 귀 기우렸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자녀들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도 번영과 풍요의 병균에 감염되어 썩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인생론으로 유명한 데일 카아네기(Dale Carnegie)는 "고난을 견뎌내는 사람이 백명이라면, 번영을 견뎌내는 사람은 하나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모두 다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분투하는 미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꼭 기억해야 할 말입니다.

얼마 전, Facebook을 통해서 읽은 글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자기 분야에서 나름대로 성공한 남편과 10대의 두 딸과 함께 풍요를 누리던 어느 부인의 글입니다. 탄탄대로 같았던 그들의 삶의 여정에 큰 환난이 닥쳤습니다. 40대의 이른 나이에 남편에게 암이 발견되었고, 치료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남편은 지난 10월에 하나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남편이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을 때, 어느 날, 그 부인은 자신의 블로그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내것이 아닙니다. 한 때는 아름다운 집이 저의 가장 큰 자랑이었습니다. 심혈을 기우려 꾸민 아름다운 집. 잡지에 여러 번 나왔다고 자랑스러워했던 우리집. 행여나 때가 탈까, 혹여나 먼지 탈까, 닦고 쓸고 했던 우리집.

하지만 남편이 아프고 보니 제가 있을 곳은 궁궐같던 우리집이 아니라 몇 평 안되는 비좁은 병실이더군요. 피곤한 내 한 몸 누일 곳은 푹신하고 안락한 라텍스 침대가 아니라 딱딱하고 좁은 보조 침상이더군요. 내 것이라 믿었던, 남편과 공동 명의로 되어 있던 자랑스럽던 내 집도 알고 보니 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라만 보아도 뿌듯했던 참으로 고운 접시들, 참으로 예쁜 그릇들. "난 왜 이렇게 꽂히는 게 많은지. 남들은 그릇이면 그릇, 가구면 가구, 옷이면 옷, 하나만 꽂힌다는데, 난 왜 이 모든 것을 다 갖고 싶지?"라며 투덜대게 만들었던, 못말리던 나의 그릇 사랑. 그 수많은 예쁜 그릇들도 남편과 함께 하는 병실에선 아무 소용이 없더이다. 제가 황량한 병실에서 쓸 수 있는 건 보잘 것 없는 플라스틱 접시와 종이컵뿐이더군요.

열다섯자 붙박이장에 가득한 수 많은 옷들과 제가 사랑해 마지 않던 명품 백들. 이 또한 제것이 아니었습니다. 남편과 함께 하는 병실에선 편한 추리닝과 레깅스면 족하더이다. 귀히 여기던 명품 백도 필요 없더이다.

어디 그뿐인가요? 이십년 넘게 나의 자랑이었던, 나를 빛나게 해 준다고, 나를 완전하게 해 준다고 믿었던 내 남편도 제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의사들은 말합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이 또한 내 것이 아니라고.

이젠 압니다. 내 분신, 내 사랑, 내 사랑하는 아이들조차 제 것이 아니라는 것을요. 이 아이들 또한 그분이 제게 잠시 맡기셨던 선물임을 제가 잊고 있었네요.

이와 같은 이유로, 근심, 염려 또한 제 것이 아닙니다. 적혈구 수치가 모자라 수혈을 해도, 의사가 제 아무리 무서운 말을 해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내 아버지의 것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벧전 5:7) 근심, 염려는 다 주께 맡기고, 내 남편 또한 주께 맡기고, 저는 이 밤 또 기다립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인양 소유하며 자랑하며 욕심내었던 제 무지를, 제 교만을, 제 과거를 회개하며 눈물로 기도합니다.


5.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앞에 두고 있으며, 오늘은 추수감사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이 귀한 축일을 맞는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감사의 조건이 끊임없이 생각나는 분이 계십니까? 좋아서 드리는 감사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값없는 은혜임을 깨닫고 감사하게 되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모두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믿고 맡겨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알면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맡겨
주신 것을 맡겨주신 그분의 뜻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혹시 무덤덤하게 이 축일을 맞고 계십니까? 무심코 반복되는 일상으로 느끼십니까?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깨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루 하루의 생명이 감당할 수 없는 은혜요, 매일 매일의 삶이 기적의 연속임을 인정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7월에 받은 작은 수술로부터 시작하여 4개월 동안 여러 번의 수술과 재활의 과정을 거쳐 회복하여 마침내 스스로 걸어 퇴원하신 교우가 계십니다. 한 동안 몸을 움직이지도 못했고, 기억 능력이 거의 망가졌더랬습니다. 그분이 그러십니다. 그동안 너무도 당연히 생각했던 것들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고. 침대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걸어가는 것도 은혜요, 음식을 씹어 삼키는 것도 기적이며, 숨쉬는 것조차 감격이라는 사실을.

이 마음이면 인생이 결코 무덤덤하지 않습니다. 권태롭지 않습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할렐루야를 외치며 감사로 시작하여 감사로 끝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형편이 무척 안 좋은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감사절이라고 사람들이 들 떠 있는데, 아무리 둘러 보아도 감사할 조건은 없고, 한숨과 불평과 절망과 분노의 이유만 보이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넓고 황량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우글거리는 광야와 물이 없는 사막에서"(15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신 것처럼, 여러분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기억하시고 또한 그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환경적으로 혹은 물질적으로 감사할 조건이 하나 없어도, 나를 지으시고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내 안에 계시고 나 주님 안에 있는 것 하나만으로도, 그 믿음이 진실하다면,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감사의 마음은 우리가 당한 환경을 이겨내는 영적인 능력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믿음은 그 환난을 통해 정금같이 단련됩니다. 그것을 안다면, 우리도 바울 사도처럼 우리가 환난 중에도 기뻐하며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 모아 기원합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 진정으로 감사의 마음이 넘치기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상에 숨겨 놓으신 귀한 보물들을 찾으며 살아가게 되기를! 매일의 우리의 삶이 보물 찾기를 하는 아이들의 마음처럼 기대감에 늘 설레이게 하시고 때로 보물을 찾은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그리고 그 신비와 기쁨을 이웃에게 나누며 살게 되기를! 아멘!


감사합니다, 주님!
번영과 풍요를 얻게 하심에도
환난과 고난을 당하게 하심에도
평탄한 삶을 허락하심에도
저희는 오직 감사할 따름입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저희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립니다.
저희의 생명, 시간 그리고 물질을
주님 뜻을 위해 사용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