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영봉목사

"사랑이면 된다" (요한복음 20:19-23; 로마서 5:1-11)

새벽지기1 2017. 1. 26. 07:17

  

1.

 

최근에 한국인이 작곡한 찬양 중에서 가장 많이 불려진, 세속적인 용어로 표현한다면, 가장 크게 히트한 곡이 하나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찬양입니다. 지금은 목사가 된 이민섭이라는 찬양 사역자가 1997년에 발표한 이 찬양은 믿는 사람들뿐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도 널리 사랑받고 있습니다.

저는, "이 찬양이 왜 이토록 널리 사랑받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아름다운 선율에 있습니다. 바이올린이나 첼로로 연주되는 이 찬양은 참으로 감미롭습니다.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없을까? 저는 이런 의문도 가져 보았습니다. "혹시나 이 찬양의 가사가 사랑 받고 싶어 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이 아닐까?" 좀 더 부정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사랑 받고 싶어 하는 자기중심적이고 지극히 사적인 감정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 가사는 이렇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반복)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반복)

 

제 생각에 동감하는 분들은 안 계십니까? 어린 소녀 가수들이 부르는 이 찬양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자기만 사랑받고 싶어 하는 병든 영혼에게 바치는 노래처럼 느껴집니다. 이 노래에 담긴 기독교가 매우 자기중심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감상주의적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노래 안에는 기독교 사상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웃도 없고, ‘사회도 없으며, ‘희생봉사도 없어 보입니다.

저는 이 부정적인 느낌을 해결하기 위해 이 노래의 가사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랑이 어떤 것인지,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인간에게 있어서 그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인간이 그 사랑을 만날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랑에 대한 묵상이 깊어질수록 저는 이 찬양이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2.

 

현대 정신분석학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증언이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이 겪는 대부분의 마음의 병은 사랑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 데 그 뿌리가 있으며, 따라서 마음의 병을 고치는 데 있어 최고의 명약도 역시 사랑이라는 것이, 정신분석학자들의 결론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사랑받지 않고는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을 갈망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사랑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헬라 말에 사랑을 의미하는 네 가지 단어가 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남녀 간의 이성적인 사랑을 가리키는 에로스’, 친구들 사이의 우정을 가리키는 필리아’, 부모의 자식 사랑과 같은 자연적인 사랑을 가리키는 스토르게그리고 인간으로서는 꿈 꿔 볼 수 없는 이상적인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완전한 사랑을 가리키는 아가페가 그것입니다. 인간이 인간 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남녀 간의 사랑 에로스나 친구 사이의 우정을 가리키는 필리아는 아가페에 대한 아주 조잡한 모조품에 불과합니다.

그나마 아가페에 가장 가까운 것은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스토르게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경험하지는 못했어도, 부모로부터 희생적인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은 건강한 인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 사랑을 경험하고 자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더 열망하고 추구하게 마련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통해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약간이나마 맛보았기 때문에, 그 온전한 사랑을 더 깊이 맛보고 싶어집니다. 통계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맛보고 자란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찾고 믿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몇 주일 전, 연회 참석을 위해 Roanoke까지 운전해 가는 길에서 다른 목사님들과 여러 가지의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 이야기 중에 성장 과정에서의 상처와 아픔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성품과 인격과 삶에 있어서 성장 과정 중에 가정에서 얼마나 사랑 받고 자랐는지가 매우 중요한 요인이라는 점에 서로 의견이 일치되었습니다. 그 때, 강현식 목사님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목사님은 가장 이상적인 가정에서 자라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지 않다고, 나는 그저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대답했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제가 자란 가정은 어느 면으로도 이상적이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보통 가정이었습니다. 다른 가정이 겪는 아픔과 갈등이 제 가정에도 있었습니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때도 많았습니다. 그랬더니 강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아니, 제 말은, 목사님을 옆에서 지켜보니, 아무런 상처나 아픔도 없이 성장한 것처럼 느껴진다는 뜻입니다."

그 말을 듣고 잠시 머리를 굴려 보았습니다. 정말 그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의 부모님도 다른 부모님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생활고에 쪼들릴 때는 이유 없이 화를 내기도 하셨고, 밖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집안까지 끌고 들어와 집안을 살벌하게 만들기도 하셨습니다. 가끔 두 분이 다투어 저희들을 긴장하게 만들기도 하셨습니다. 그렇게 자라나는 과정에서 어찌 상처와 아픔이 없었겠습니까? 그렇지만 이상한 것은 상처와 아픔에 대한 기억은 제 머리 속에 있는데, 그것이 더 이상 아프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받은 상처와 아픔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크고 진하고 뜨거운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식이 당신의 살을 먹어야만 살 수 있다는 처방이 내려지면, 서슴없이 당신의 살을 베어 주시리라고 믿을 만큼, 부모님의 사랑에 대해 믿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제가 뭔가 큰 잘못을 범하여 세상이 모두 나에게 등을 돌릴 때, 적어도 어머니만큼은 등을 돌리지 않으리라는 믿음, 그리고 내 아버님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등을 돌리시겠지만 돌아앉아 남몰래 아들을 위해 눈물 흘리시리라는 믿음, 그 사랑에 대한 그 믿음이 제가 자라면서 받은 모든 상처와 아픔을 치유한 힘이 아니었는가 싶습니다. 이 한 가지 점에서만 본다면, 저는 이상적인 가정에서 자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혹시나, 부모님에 대한 경험이 저와 달라서, 되돌이켜 생각할 때마다 상처가 되살아나고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까지 그 아픔을 종종 느끼고 살아가는 분들이 계시다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다. 아무리 대단한 부모님의 사랑이라 할지라도,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에 비하면 단지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진짜 사랑을 모른다면, 다만 모조품에 불과할지라도 그 사랑을 경험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사랑을 안다면, 모조품 사랑은 즉시로 그 빛을 잃고 맙니다. 진짜 사랑을 만난다면, 모조품 사랑이 나에게 없었다는 사실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와서 부모님을 원망할 것은 없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위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제가 오늘날 부모님을 생각하며 감사할 것밖에 생각나지 않는 이유도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통해 더 많이, 더 깊이 치유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다른 사랑의 결핍은 크게 문제되지 않습니다.

오늘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써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실증해 주셨습니다(5:8). 지난 설교에서 저는 성경 66권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면 "하나님은 결코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신다."라고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한다면 "하나님은 나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집요한 사랑의 증거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생각하면서 사람들은 자주 자격을 따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어떤 자격을 갖추어야만 할 것처럼 느낍니다. 교회 생활도 잘 하고, 십일조와 헌금도 부족함 없이 드리고, 직장 생활에 있어서도 정직하고 진실해야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을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자신이 궁핍하게 살기 때문에 교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죄송해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자신에게는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분도 계십니다. 혹시나, 심각한 죄를 범하게 되면 자격을 완전히 상실한 것처럼 낙심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자격지심을 가지는 분들은 로마서 58절의 말씀을 마음의 벽에 굵은 글씨로 깊이 새겨 두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 내가 교회에 나오기 이전에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도 그분은 나를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내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는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지금조차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친구들과 함께 밤늦게까지 술독에 빠져 있는 그 동안에도, 혹은 내가 배우자를 속이고 부정한 욕망을 즐기고 있는 그 동안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경쟁자를 넘어뜨리기 위해 비열한 계획을 꾸미고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죄들이 하나님께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범하는 죄들은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 속에 빠져 있는 것에 대해 심히 아파하십니다. 우리가 죄 속에 빠져 있기에 하나님은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사랑하십니다. 불행의 길에 서 있으면서도 그것을 행복으로 착각하고 있기에 더 더욱 사랑이 불 일 듯 타오릅니다. 건강한 자식보다 병든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이 더 간절하듯, 죄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 간절합니다.

하나님은 사랑받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부모라면 자식이 사랑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따지지 않습니다. 자식이라는 하나의 이유만으로 자식을 사랑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당신의 손으로 나를 지으셨다는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 나를 사랑하십니다. 절대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사랑의 품으로 돌아가기까지 그분은 우리를 향한 사랑의 손길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그 본질이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가장 먼저 그분의 사랑을 만납니다. 성령을 체험한다는 것도 실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체험할 때 통곡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그 사랑에 감격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 55절에서 말씀하는 그대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통하여 그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에 녹고, 그 사랑에 항복하고, 그 사랑으로 변화됩니다.

 

 

4.

브레넌 매닝(Brennan Manning)이라는 분이 쓴 책 <아바의 자녀>(Abba’s Child)가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취하는 것이 우리의 거짓 자아를 벗어나 참된 자아로 거듭나고 그 자아로서 살아가게 한다는 사실을, 자신의 체험을 소재로 하여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일독을 꼭 추천하고 싶은 책입니다. 그 책에 보면, 제임스 백스터(James Baxter)라는 분이 만든 우화가 하나 소개되어 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인생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힘겨워진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는 자살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쭈그러진 대형 철제 탱크를 사서 그 안에 모든 생필품을 넣어 놓고 그 안에서 숨어 살기를 택합니다. 그는 탱크 벽에 십자가를 달아 놓고 기도하면서 외롭지만 흠 없이 살기 위해 힘씁니다. 그렇게 하고 나니, 하루하루가 만족스러워졌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탱크 벽으로 총탄이 날아옵니다. 처음에는 끄덕도 없던 탱크 벽이 매일같이 아침저녁으로 날아오는 총탄에 의해 점점 얇아져 가더니, 마침내 총알이 탱크 안까지 날아 들어옵니다. 그 남자는 총성이 들리는 동안 자세를 낮추고 있다가 총성이 멎으면 다시 일어나 일을 계속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탱크 안으로 날아든 총알을 피하지 못하여 그 남자는 군데군데 상처를 입습니다. 탱크 벽에는 많은 구멍이 뚫려 바람과 햇빛이 들어왔고, 비 오는 날이면 물도 샜습니다.

그는 구멍을 틀어막으며, 자신을 향해 매일같이 아침저녁으로 총을 쏘아 대는 그 사람을 저주합니다. 하지만 총알구멍을 틀어막기에 급급했던 그 사람은 때때로 그 구멍으로 밖을 내다봅니다. 연 날리는 아이들의 모습, 손잡고 걷는 연인들의 모습, 하늘의 구름과 날아다니는 새의 모습을 봅니다. 그럴 때면 그는 잠시나마 자신을 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총탄에 누더기가 된 그 탱크가 더 이상 쓸모없게 되어 버립니다. 그는 별 수 없이 탱크를 버리고 밖으로 나옵니다. 밖에는 한 남자가 소총을 들고 서 있습니다. 탱크에서 나온 남자가 자포자기한 상태로 말합니다. "이제 나를 죽이겠군요. 하지만 그 전에 한 가지 알고 싶은 것이 있소. 그동안 나를 못살게 군 이유가 무엇이요? 나는 당신을 전혀 해친 적도 없고, 당신을 알지도 못하는데, 당신은 왜 나를 죽이려 하는 것이오?"

그러자 그 사람은 소총을 내려놓으며 빙긋이 웃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의 적이 아니요. 나는 당신을 죽이려 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스스로 만든 감옥에서 해방시키려 한 것이오." 탱크에서 나온 그 사람은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그 사수를 자세히 살펴봅니다. 그 사람의 손과 옆구리에는 총을 쏘는 동안에 생겨난 상처가 깊게 나 있습니다. 그 상처들은 태양빛 아래에서 빛을 발산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로 벌써 여러 주일째 묵상하고 있는 요한복음 2019절부터 23절의 이야기와 유사한 면이 많습니다. 그 남자가 두려움에 질려 탱크 안으로 숨은 것처럼, 제자들도 예루살렘의 어느 구석방에 숨어들었습니다. 자신의 몸에 깊은 흉터를 남기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랑의 총을 쏘아댄 그 사람은, 제자들을 방문하여 자신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 준 예수 그리스도와 닮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손바닥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주신 것은 "내가 너희를 이만큼 사랑했다"는 몸짓이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은 그 상처들을 통해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확인했고, 그 때 그들의 마음에는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누군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믿음이 없이는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 사수가 사랑의 총으로 탱크를 허물어뜨리고 그 사람을 해방시켰듯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의 그 사랑을 확신시켜 주시고는 그들을 세상으로 내보내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얼숨을 불어 넣으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55절에 나오는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성령을 충만히 받으면 십자가에서 쏟으신 그 사랑에 취하게 됩니다. 그 사랑에 취하면 그 사랑으로 우리 내면의 상처와 아픔이 치유됩니다. 마음에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얻게 됩니다. 우리 내면에 있는 모든 어둠이 걷히고, 굽은 것이 곧게 되고, 꼬인 것이 풀어집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오직 그 때에만 우리는 꼭꼭 걸어 잠근 방문을 열고 세상에 나갈 수 있고, 우리 스스로를 가두고 있던 탱크를 버리고 밖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5.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 받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드러난 그 무조건적인 사랑에 취하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예수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체험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건이었고, 그래서 그분은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God’s Beloved)라고 규정하고 살았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사랑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누군가 여러분에게 "당신에게 일어난 사건 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건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당신은 누구요?"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제게 그럴 자격은 없습니다만, 그분은 저를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 외에 다른 것은 제게 중요하지 않습니다."라고 답할 수 있다면, 그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이면 다 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녹여서 새로운 사람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우리가 나누는 모조품 사랑을 통해서도 수 없이 경험합니다. 자그마한 사랑이 한 사람을 얼마나 깊이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말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쏟아 부은 사랑이 얼마나 강력한 변화의 능력이 되는지를 말입니다. 선생이 제자에게 쏟아 붓는 사랑이 얼마나 깊은 변화의 능력이 되는지를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쏟아 붓는 사랑이 얼마나 큰 변화의 힘이 되는지를 말입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조품 사랑에도 이 같은 능력이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에 항복하고 나면 더 이상 같은 사람일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은 우리의 모든 아픔과 상처를 치유해 주기 때문에, 내면의 상처와 아픔에 뿌리를 두고 있던 과거의 모든 꼬이고 비틀린 언행은 자연히 사라지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드러난 그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눈을 뜨게 해 줄뿐 아니라 이웃에 눈을 뜨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상처와 아픔을 치유 받았기에, 앞으로 그 어떤 상처와 아픔을 받아도 상관없다는 든든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두려움 없이 이웃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새롭게 한 그 하나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게 됩니다. 그것이 전도요, 그것이 선교입니다.

선교는 명령이기 이전에 우리 속에서 솟아나와 맺어지는 열매여야 합니다. 우리 속에 진실로 하나님의 사랑이 살아 있다면, 선교는 저절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랑을 모르면서 억지로 선교하려 하면 결국 사람의 공로와 업적 밖에는 될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슴 벅차다"고 말하는 사람이 만일 자기만의 탱크에 숨어 지내거나 마음의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살아간다면,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닐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에게만 붙들려 있게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내 마음의 빗장을 열게 하고, 내 집의 문을 열게 하며, 내 지갑을 열게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선교하러 나가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 자신을 선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부터 먼저 깨져야 합니다. 그런 경험이 없이 선교를 나가는 사람은 "내가 선교하러 간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가 선교 당하러 간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렇게 겸손한 마음으로 임하면,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선교지에 가서 봉사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흠뻑 취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6.

 

앞에서 저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찬양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 가사를 다시금 생각해 보시면, 이 찬양이 진리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사랑의 진리의 다른 반쪽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 받기 위해 지어진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그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받고 나서 어떻게 변하는지, 이 찬양은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뭔가 더 해야 할 말을 생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목사가 된 설경욱이라는 찬양 사역자가 2002년에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라는 찬양을 발표했습니다. 이 찬양의 가사는 마치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에 대한 답가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 찬양에 미진했던 그 무엇을 보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그 가사는 이렇습니다.

 

감사해요 깨닫지 못했었는데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라는 걸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날 향하고 있었다는 걸

고마워요 그 사랑을 가르쳐준 당신께

주께서 허락하신 당신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더욱 섬기며

이제 나도 세상에 전하리라

 

여기까지는 마치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로써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이 응답하는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런 다음, 찬양은 이렇게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그리고 그 사랑 전하기 위해

주께서 택하시고 이 땅에 심으셨네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여러분을 향하고 있었으며 또 영원무궁토록 그럴 것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그것을 믿으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십자가를 묵상하며 그 사랑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이 사랑이 없이는 그 무엇도 여러분을 진정으로 만족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혹시, 그것을 이미 경험했고 이미 알고 있으며 이미 믿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랑에 더욱 취하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살아 있게 하십시다. 그 사랑이 내 속에서 자라나 또 하나의 열매를 맺을 때까지, 그 사랑 속에서 사십시다. 그 사랑이 나를 구원할 것이며 내 이웃을 구원할 것입니다.

 

사랑이신 주님,

저희로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소서.

주님의 손과 옆구리에 난 상처를 보게 하소서.

저희를 향한 그 진한 사랑을 보게 하소서.

그 사랑에 항복하게 하소서.

그 사랑에 취하게 하소서.

그 사랑으로 저희를 정복하소서.

그 사랑이 저희의 내면을 치료하고

그 사랑이 저희의 결박을 깨뜨려

이웃에게 나아가

그 사랑 전하게 하소서.

아멘.